랭킹 0위는 퇴근을 원한다

1화: 야간 근무자 정우
정우는 퇴근 도장을 찍으려다가 멈췄다.
출입 단말기 화면에 숫자가 하나 떠 있었다. 0. 헌터 랭킹 전산을 관리하는 구역이었지만, 경비원 카드로 랭킹을 조회할 일은 없었다. 정우는 화면을 껐다가 다시 켰다. 숫자는 그대로였다.
“또 고장 났네.”
야간 경비실의 냉장고가 웅웅거렸다. 복도 끝 훈련장에서는 청소 로봇이 박스를 밀고 있었다. 오늘 근무표에는 헌터 열두 명, 정비 기사 둘, 경비원 정우 하나가 적혀 있었다. 경비실에 있는 컴퓨터는 낡았고, 랭킹 서버는 본부에 있었다. 오류를 고칠 권한은 없었다.
정우는 화면을 촬영하고 고장 접수 번호를 적었다. 랭킹 오류 신고는 9시 이후에 처리된다고 자동 응답이 왔다. 그는 퇴근을 미루지 않기로 했다. 야간 근무자의 출입 기록은 정시 퇴근 여부도 포함했다.
그때 훈련장 셔터가 올라갔다. 내부에서 박다미가 나왔다. 손목 보호대는 젖어 있었고, 얼굴에는 흙이 묻었다.
“아직 안 갔어요?”
“오류 신고만 하고 나가려던 참입니다.”
“무슨 오류요?”
정우는 단말기 화면을 보여 줬다. 다미는 숫자를 보고 웃지 않았다. 헌터 랭킹 0위는 단순한 등수 오류로 끝나지 않을 수 있었다. 시스템이 유효 순위로 인식하면 관련 권한이 따라붙었다.
“이런 경우는 본 적 있어요?”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류가 아니라 임시 관리자 등록일 수 있어요.”
“저는 경비원입니다.”
“시스템은 직업란을 보지 않을 때가 있어요.”
다미는 훈련장 내부로 돌아가려고 했다. 정우는 공략 시간 밖이라 출입을 기록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공략대의 안전 점검을 끝내지 못했다고 했다. 훈련장 벽에 붙은 근무표에는 야간 점검 책임자가 공란이었다.
“누가 이 시간에 점검하기로 되어 있습니까?”
“원래는 제가 하죠. 오늘은 관리자가 그만두면서 공백이에요.”
“그럼 승인 전에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다미는 입술을 다물었다. 그녀는 팀원들이 장비를 안에 두고 왔다고 설명했다. 내일 아침 공략을 앞두고 있었다. 정우는 출입 로그를 확인했지만, 팀원들이 장비를 두고 나왔다는 기록은 없었다. 일단 문을 열기 전에 안쪽에 남은 사람을 확인해야 했다.
정우가 경비실 전화기를 들자 단말기 화면이 켜졌다. 랭킹 0위 아래에 ‘던전 임시 운영 관리자’라는 권한이 나타났다. 그는 확인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권한은 관리자 업무를 자동으로 떠맡기는 것처럼 보였다.
다미는 문을 열어 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팀원들이 위험할 수 있으니 먼저 확인해 달라고 했다. 정우는 정비실과 통화해 훈련장 내부의 센서 로그를 요청했다. 로그에는 한 구역에서만 움직임이 기록됐다.
“사람인가요?”
“센서는 생체 구분이 안 됩니다.”
“그럼 들어가야겠네요.”
“안 됩니다. 안전 점검자가 필요합니다.”
다미는 그 말에 화를 내지 않았다. 그녀는 현장 장비를 빌려 문 밖에서 센서 판독기를 연결했다. 두 사람은 출입문을 닫아 둔 채 내부 움직임의 방향을 확인했다. 움직임은 헌터 대기실에서 지하 통로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 순간 셔터가 안쪽에서 두드려졌다. 세 번, 잠시 뒤 두 번. 다미는 바로 문을 열려 했지만, 정우가 손을 들어 막았다.
“안에 누가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사람이면요?”
“그럼 본인 확인 신호를 정해야 합니다.”
정우는 경비실 무전으로 야간 근무자 암호를 물었다.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훈련장 근무표는 관리자가 떠난 뒤 업데이트되지 않았다. 그는 숫자 0을 다시 봤다. 그때 단말기에서 새로운 화면이 떴다.
‘관리자 승인 대기. 대상 구역: 지하 훈련 던전.’
그는 승인하지 않았다. 시스템은 30초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권한을 거부하면 구역이 자동 폐쇄될 수 있었다. 다미는 닫히기 전에 안쪽 사람을 빼내야 한다고 했다.
정우는 열쇠를 꺼내지 않고, 셔터 옆 비상 인터폰을 눌렀다. “안에 계신 분, 이름과 현재 위치를 말씀하세요.”
짧은 정적 뒤, 낮고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오르그다. 우리는 야간 근무를 거부한다.”
다미는 헌터용 창을 들었다. 정우는 셔터를 열지 않았다. 던전 내부에 몬스터가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처음이었다.
“왜 거부합니까?” 정우가 물었다.
“휴식 시간이 없다. 출구가 닫혔다. 이름도 기록되지 않는다.”
정우가 셔터를 열기 위한 절차를 확인하는 동안, 경비실 바닥에서 금속이 긁히는 소리가 났다. 정우는 반사적으로 문 쪽을 봤다. 복도 끝의 청소 로봇이 멈춰 있었고, 바퀴 아래에는 케이블이 감겨 있었다. 케이블은 훈련장 셔터의 수동 잠금 장치까지 이어져 있었다. 누가 설치했는지 모를 보조 전원선이었다.
“그 선, 아까는 없었어요.” 다미가 말했다.
정우는 허리를 굽혀 케이블의 피복을 살폈다. 표면이 뜨거웠다. 끝부분은 셔터 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내부에서 전력을 끌어다 쓰면 잠금이 풀릴 수도 있지만, 선이 끊어지는 순간 문이 갑자기 떨어질 위험이 있었다. 그는 로봇의 전원을 끄고 케이블을 손으로 잡지 않은 채 절연 장갑을 찾았다.
“누가 안에서 연결했을까요?”
“전력이 필요한 장비를 쓴 사람이겠죠.”
“우리 팀은 장비를 두고 나왔다고 했잖아요.”
다미는 대답 대신 안쪽을 향해 이름을 불렀다. 아무 반응도 없었다. 정우는 벽의 차단기를 내려 보려 했지만, 던전 센서와 출입 잠금이 같은 회로에 묶여 있었다. 차단하면 안쪽의 움직임을 볼 수 없게 된다. 그는 배선을 따라가 별도 분기점을 찾아야 했다.
케이블이 한 번 튀었다. 셔터가 손가락 한 마디만큼 내려왔다. 다미가 뒤로 물러서며 창을 세웠다. 정우는 절연 장갑을 끼고, 케이블을 당기지 않은 채 보조 전원 단자만 분리했다. 스파크가 짧게 튀어 장갑 끝을 그을렸다. 손바닥에 열이 남았다.
“괜찮아요?”
“아직은요.”
그는 본부에 보낼 사고 보고를 떠올렸지만, 지금은 문이 떨어지지 않게 하는 편이 먼저였다. 다미가 셔터 밑에 고정용 받침대를 밀어 넣었다. 둘이 숨을 맞춰 손잡이를 조금씩 풀자, 안쪽에서 누군가 받침대를 밀었다. 문이 다시 덜컹했다.
“밀지 마세요!” 정우가 외쳤다. “문 아래에 사람이 있습니다.”
안에서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전등이 꺼졌어요.”
다미가 정우를 바라봤다. 부상자 한 명이라는 시스템 숫자가 틀리지 않았을 수도 있었지만, 그 한 명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정우는 문을 더 열지 않고 인터폰을 켰다. 이름과 위치를 묻자 상대는 대답 대신 숨을 삼켰다.
“태식 씨?” 다미가 물었다.
“아니요. 저는… 장비실에 있어요.”
정우는 명단을 훑었다. 장비실은 내부 지도에 표시돼 있었지만, 야간 근무표에는 담당자가 없었다. 누가 들어갔는지도 기록되지 않았다. 그가 확인을 이어 가려는 순간, 내부 센서의 점 하나가 출구 반대편으로 움직였다. 다미는 구조자를 한 명 더 데리고 오겠다고 했다.
“혼자 들어가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럼 같이 가요.”
“문을 열면 전원이 다시 튈 수 있어요.”
정우는 셔터를 지지하는 받침을 확인했다. 문을 여는 동안 자신은 바깥에서 전선을 감시하고, 다미는 문턱까지만 들어간다. 안쪽 사람은 케이블에서 떨어져 벽을 따라 움직인다. 세 가지 조건을 하나씩 말해 확인했다. 인터폰 너머의 목소리는 떨면서도 모두 따라 했다.
다미는 어깨를 좁혀 틈으로 들어갔다. 내부의 비상등이 한 번 깜빡였다. 정우는 전압계를 보며 손잡이를 붙들었다. 셔터가 조금 더 내려오려는 순간, 안쪽에서 작은 손이 문틈으로 나왔다. 손목에는 출입증이 매달려 있었다. 사진은 흐릿했지만 이름은 읽혔다. 서하린.
“하린 씨, 발을 뒤로 빼세요.”
다미가 안에서 아이를 끌어당겼다. 문 아래 바닥에 떨어진 공구가 셔터 레일에 끼어 있었다. 그것이 걸림을 만들고 있었다. 정우는 문을 억지로 올리지 않고, 다미가 아이를 안전 구역으로 옮길 때까지 받침대를 더 깊이 밀었다. 공구가 튕겨 나오는 순간 셔터가 급하게 내려와 받침대 한쪽을 부러뜨렸다. 금속 파편이 정우의 팔을 스쳤다.
하린은 장비 업체의 견습 직원이었다. 야간 점검을 돕다가 잠금 오류에 갇혔다고 했다. 부상자는 아니었지만, 센서에는 기침으로 인한 호흡 이상이 부상 신호로 잡혀 있었다. 숫자 하나가 사람 하나를 뜻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정우는 그녀의 이름을 임시 출입 명단에 적었다.
다미는 셔터 안쪽의 목소리를 듣고 창을 내렸다. 그녀의 손등이 손잡이에 닿아 하얗게 질렸다. 정우는 먼저 이름을 다시 물었고, 답을 들은 뒤에야 다음 조치를 정하겠다고 했다. “문을 열면 안쪽에 있는 사람을 모두 셀 수 있어요?” “모르겠습니다.” “그럼 모른다는 걸 적고, 한 사람씩 확인하죠.” 정우는 종이에 확인 순서를 써 붙였다. 문을 열기 전에 정한 이 순서는 누구 하나를 숫자에 묻히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시스템의 카운트다운이 10초 아래로 내려갔다. 정우는 관리자 승인을 누르지 않고, 권한 화면에서 ‘현황 조회’만 선택했다. 화면에 던전 내부의 인원 수와 잠긴 출구가 표시됐다.
헌터 세 명, 몬스터 여덟. 부상자는 한 명.
“문을 열어야 합니다.” 다미가 말했다.
“먼저 안전 구역을 열겠습니다.”
정우는 출입 권한을 임시로 조정했다. 헌터와 몬스터가 같은 통로를 동시에 쓰지 않도록 교대선을 지정했다. 시스템은 적대 상태를 해제하지 않았지만, 출구 하나를 열었다.
셔터 안쪽에서 다시 세 번, 두 번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정우가 두 번 답했다.
카운트다운은 멈췄다. 화면에 새로운 문장이 나타났다.
‘임시 관리자: 정우. 퇴근 처리 보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