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에만 열리는 길드

3화: 지워진 이름의 가격
강우는 서명란에 펜을 대지 않았다. 그는 정유라와 민수가 안전한 곳으로 옮겨졌는지 먼저 확인했다. 소방대가 도착했고, 민수는 병원 이송을 거부한 채 현장에서 발목 상태를 확인받았다. 골절 가능성은 낮았지만 인대 손상이 의심됐다.
“정산 서명을 하면 구조비를 받을 수 있다고 했잖아요.” 유라가 말했다.
“누가요?” 세하가 물었다.
“길드 계약 담당자요. 우리가 공략 경로를 알려 주면 이름을 올려 준다고 했습니다.”
“담당자 이름을 기억합니까?”
“명함을 받았어요.”
유라는 휴대폰에서 명함 사진을 찾았다. 이름은 서정필, 본부 계약팀 과장이었다. 명함의 전화번호는 현재 없는 번호였다. 세하는 사진의 원본을 전달받기 전에 복사와 보관 방식을 설명했다. 유라는 동의했고, 하림은 수신 시각과 파일 크기를 기록했다.
“이름을 공개해도 괜찮습니까?”
“동생이 다친 비용을 누가 낼지 정해질 때까지는 제 얼굴도 이름도 기사에 나오지 않았으면 해요.”
“수사 기록에는 남겨야 하지만 외부 공개와는 별도입니다.”
세하는 그 조건을 기록했다. 구조 사실을 입증하는 일과 당사자의 신원을 공개하는 일은 다른 문제였다. 하림은 계약서 원본의 절단 흔적을 감정받기 위해 보존 봉투를 준비했다.
그때 협회 안전팀이 도착했다. 팀장은 세하에게 현장 지휘 권한이 없다고 말했다. 세하는 그 말에 동의하고 현장 기록과 구조 경과를 넘겼다. 다만 장부는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며 제출을 거부했다.
“그 장부에 적힌 내용은 증거가 아닙니다.” 팀장이 말했다.
“맞습니다. 그래서 현장 기록과 분리해 두고 있어요.”
“그럼 왜 계속 갖고 있습니까?”
“누가 계약을 바꿨는지 조사할 단서라서요.”
팀장은 장부를 빼앗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구조가 끝났으니 길드를 해산하라고 했다. 하림은 우중 길드는 등록된 길드가 아니라고 말했다. 세하는 길드가 무엇인지부터 정식으로 확인할 생각이었다.
협회 차량이 떠난 뒤 강우는 정산서를 들여다봤다. 문서에는 구조 인원 1명, 외부 조력 1명으로 기록돼 있었다. 민수는 ‘현장 주변인’으로 분류되어 치료 비용 지원 대상에서 빠져 있었다.
“이걸 어떻게 바꿉니까?”
“원본 계약과 구조 기록을 같이 제출하면 됩니다.” 세하가 말했다.
“그러면 길드에서 제명되겠죠.”
“이미 제명 통보를 받았잖아요.”
“다시 들어갈 자리가 없을 수도 있죠.”
세하는 그가 걱정하는 게 자기 자리가 아니라 동생 치료비라는 걸 알았다. 그녀는 강우의 계약서에서 퇴출 조항을 확인했다. 임무 이탈로 판정되면 남은 정산액을 회수할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구조 행위는 임무 이탈의 예외로 명시돼 있었다. 단, 구조 대상이 계약 부속서에 이름을 올린 경우에만 해당했다.
“부속서가 잘려 나간 게 핵심이에요. 강우 씨가 서명해도 이 문서는 바뀌지 않습니다.”
“그래도 서명하면 책임은 제가 진다고 쓸 수 있겠죠.”
“그렇게 두면 본부가 만든 누락을 당신이 인정하는 셈이에요.”
강우는 펜을 내려놓았다. 그는 처음으로 자기 이름을 보호하는 선택을 했다. 대신 구조 당시 착용한 방패의 손상 흔적과 통로에서 촬영한 영상을 공개하기로 했다. 피해자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도록 자료를 원본으로 제출하겠다고 했다.
하림은 장부의 빈 서명란을 가리켰다. 잉크가 바뀌어 있었다. ‘지급자 미상’이라는 글씨 아래, 서정필의 이름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 이름은 계약서에서 잘려 나간 부속서의 복사본에도 있었다.
“장부가 진실을 쓴다고 했잖아요.” 세하가 말했다.
“거짓은 쓰지 않아요. 하지만 우리가 확인하지 않은 채 결론을 내리면, 빈칸은 우리 추측으로 채워집니다.”
세하는 장부를 덮었다. 페이지가 닫히기 전에 퇴출 예정일이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5일 뒤였다. 그녀는 글씨를 촬영해 비교하려 했지만, 휴대폰 화면에는 빈 종이만 찍혔다.
“장부는 왜 당신에게만 보입니까?” 강우가 물었다.
“저한테만 보인다고 말한 적 없어요. 당신도 읽었잖아요.”
“그럼 세하 씨의 기록은 누가 보고 있죠?”
하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서류 캐비닛의 가장 아래 칸에서 오래된 정산표 한 묶음을 꺼냈다. 첫 페이지의 날짜는 세하가 마지막 공략에 참여한 날과 같았다. 구조 대상 세 명, 정산 완료 두 명. 누락된 사람의 이름은 페이지에서 뜯겨 나가 있었다.
세하는 종이의 절단면을 확인했다. 강우와 민수가 발견한 계약서와 같은 방향의 섬유가 보였다. 서로 다른 문서가 같은 손에 의해 훼손됐을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종이만으로 누가 뜯었는지 알 수 없었다.
“이 기록을 언제부터 보관했어요?”
“세 해 전부터요.” 하림이 말했다. “제가 지우라는 지시를 받았고, 지우지 않은 사본을 남겼어요.”
“왜 바로 신고하지 않았습니까?”
“원본이 없으면 조작이라고 몰릴 걸 알았어요. 그리고 저도 처음엔 정산을 수정하는 데 서명했습니다.”
“그럼 지금 공개하면 하림 씨도 조사받겠네요.”
“네.”
“그래도 내놓겠다는 거예요?”
하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에게만 비용을 넘기지 않을 겁니다.”
세 사람은 원본 정산표를 봉인했다. 공개 여부는 피해자들과 상의한 뒤 결정하기로 했다. 강우는 유라와 민수에게 먼저 동의를 구하겠다고 했다. 세하는 자료를 협회 감사 부서에 제출하되, 신원 보호 요청을 함께 넣기로 했다.
정산표를 펼친 뒤 하림은 자신이 수정한 항목을 한 줄씩 짚었다. 그녀는 구조 대상이 두 명으로 기록된 초안을 본 적이 있었지만, 본부의 지시를 받아 최종 보고서에는 한 명만 남겼다. 그때 하림은 이름이 빠져도 치료비는 지급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급 기준이 바뀌자 민수는 주변인으로 밀려났다.
“제가 서명한 건 맞아요. 지시를 받았다는 이유로 책임을 피하고 싶진 않습니다.”
세하는 수정 권한을 가진 계정 목록을 요청했다. 하림은 자기 계정도 포함해 제출하겠다고 했다. 계정 로그만으로 문서를 수정한 사람을 확정할 수는 없지만, 어느 단말에서 언제 접근했는지 확인하면 질문을 좁힐 수 있었다.
세 사람은 원본 서류를 각각 봉투에 넣었다. 봉투마다 날짜, 장소, 수집자, 봉인 번호를 기록했다. 강우는 자신의 방패에 묻은 페인트 조각을 별도 봉투에 넣고, 정식 감정 요청에 동의했다. 유라와 민수는 함께 진술서를 작성하되 서로의 문장을 대신 쓰지 않기로 했다.
“우리 말이 서로 다르면요?” 민수가 물었다.
“그 차이도 남겨요.” 세하가 말했다. “같은 사건을 봤어도 기억은 달라질 수 있어요. 일치하지 않는다고 한쪽을 지우면 안 됩니다.”
하림은 세하를 바라봤다. “그 말을 예전에도 했습니까?”
“아니요. 그땐 빨리 구조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어요.”
“그 선택은 잘못이었나요?”
“문을 연 건 옳았다고 생각해요. 동료에게 위험을 설명하지 않은 건 잘못했어요. 둘을 나눠서 책임져야 합니다.”
세하는 처음으로 과거 일을 길게 설명했다. 당시 문 안에 있던 시민의 이름은 정식 보고서에 없었다. 그녀는 그 이름을 기억했지만, 이름을 말하면 지금 살아가는 가족이 드러날 수 있어 당사자 동의 전에는 공개하지 않겠다고 했다.
비는 그치지 않았다. 장부의 종이는 습기를 머금고 가장자리가 말렸다. 하림은 습도계를 가져와 캐비닛을 열고, 장부를 직접 닫아 두었다. 기록을 더 읽는 일보다 종이를 보존하는 일이 먼저였다.
“기록이 사라지면 어떡하죠?” 강우가 물었다.
“원본과 복사본, 증언을 따로 보관하면 하나가 사라져도 전부 사라지지는 않아요.” 세하가 답했다.
그들은 그날 밤 확보한 자료의 목록을 만들었다. 누구의 손에 어떤 사본이 있는지 적고, 다음 날 누구에게 확인을 요청할지 정했다. 하림은 계약 담당자 서정필에게 보낼 질의서를 작성했다. 강우는 구조 당시 함께 있던 팀원에게 연락하기로 했다. 세하는 지하 출입 통제 기록을 공식 절차로 요청했다.
그때 장부의 잉크가 번졌다. 글씨가 지워지는 대신 페이지 아래쪽으로 흘러내렸다. 세하는 우산 아래 놓인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물방울이 떨어진 자리는 깨끗했다. 장부에는 새 문장이 남아 있었다.
비가 그치기 시작했다. 사무실 창문 바깥에서 빗물이 가늘어졌다. 장부의 글씨도 희미해졌다. 세하는 마지막으로 페이지를 열었다. 퇴출 예정일은 5일 뒤였지만, 그 아래에 새로운 문장이 적혀 있었다.
‘구조 대상은 세 명. 세 번째 이름은 윤세하.’
세하는 장부를 바로 덮지 않았다. 그녀는 페이지 번호와 기록된 날짜를 적고, 하림에게도 읽었는지 물었다. 하림은 자기 눈으로 같은 문장을 봤다고 답했다. 강우는 휴대전화로 촬영했지만 화면에는 아무 글씨도 남지 않았다.
“누가 구조 대상인지, 어떤 조건인지도 확인되지 않았어요.” 세하가 말했다. “저 문장을 근거로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그녀는 먼저 본부 감사 부서의 접수 번호를 확인했다. 구조자 명단에 이름을 추가하려면 현장 기록과 당사자 진술이 필요했다. 세하는 자신의 과거 계약서를 요청할 수는 있지만, 다른 구조 대상의 이름을 본인 동의 없이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하림은 비밀 유지 요청서를 준비했다.
“내일은 세하 씨의 자료를 찾으러 가죠.”
“퇴출 기록부터 찾을까요?” 강우가 물었다.
“아니요. 구조 대상 명단과 계약 원본부터요. 제가 퇴출될지 말지는 그다음입니다.”
세하는 처음으로 자기 이름보다 누락된 사람의 이름을 먼저 조사하기로 했다. 그것이 예전 선택을 지우지는 않지만, 같은 방식으로 누군가를 기록 밖에 두지 않는 시작은 될 수 있었다.
그녀는 손을 멈췄다. 자기 이름은 누구의 계약서에도 없었다. 세 번째 이름이 적힌 순간, 사무실의 문이 두드려졌다.
밖은 비가 그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