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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에만 열리는 길드1화

비 오는 날에만 열리는 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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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장부의 퇴출 예정자

비가 오는 날이면 윤세하는 우산을 접지 않았다. 우산을 접는 순간 문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골목 끝에는 지도에도 등록되지 않은 사무실이 하나 있었다. 주소를 입력하면 공사장으로 표시되고, 낮에 찾아가면 벽만 보였다. 그러나 비가 내리는 밤에는 오래된 유리문이 생겼다. 유리에는 금이 가 있었고, 안쪽에서는 노란 조명이 새어 나왔다.

세하는 문 앞에서 시간을 확인했다. 밤 11시 42분. 문고리를 잡자 손바닥의 화상 흉터가 당겼다. 게이트를 통과할 때 생긴 자국이었다. 그녀는 세 해 전 협회에서 제명된 뒤로 이 흉터를 가리려 하지 않았다.

문을 열자 종이 냄새와 젖은 먼지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사무실에는 책상 하나, 서류 캐비닛, 그리고 길고 검은 장부가 놓여 있었다. 정하림은 장부 옆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늦었네요.”

“의뢰 내용이 없어서요.”

“비가 오면 의뢰가 옵니다. 당신은 비가 오는 걸 알았고.”

“의뢰를 받겠다고 한 적은 없어요.”

하림은 대답 대신 장부를 열었다. 젖은 손가락으로 페이지를 누르자 흐린 글씨가 떠올랐다. 첫 줄에는 길드 이름과 사건 번호가 적혀 있었다. 두 번째 줄에는 ‘지하 주차장 게이트, 구조 실패, 책임 미확정’이라고 쓰여 있었다.

세하는 사건번호를 알아봤다. 협회에서 제명되기 전 마지막으로 참여했던 공략과 같은 번호였다. 그녀는 페이지를 덮으려 했지만 하림이 손등을 얹었다.

“당신 기록이 아닙니다.”

“제 이름이 있잖아요.”

“이름이 있다는 것과 책임이 확정됐다는 건 다릅니다.”

장부 아래쪽에 ‘퇴출 예정: 윤세하, 7일 뒤’라는 문장이 나타났다. 세하는 손을 거뒀다. 이곳이 무슨 원리로 기록을 쌓는지 몰랐다. 하지만 자기 이름이 적힌 종이를 보고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누가 썼죠?”

세하는 장부를 본 뒤에도 책상에 손을 올리지 않았다. 그녀는 계약서에 적힌 글씨를 읽을 때마다 먼저 종이의 출처와 작성 시각을 확인했다. 협회 시절에는 동료의 구두 보고만 믿고 비상문을 열었다가, 구조 대상이 계약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책임을 혼자 떠안았다. 이후 그녀는 어떤 문서든 서명란보다 종이의 뒷면을 먼저 살폈다.

“제가 읽을 수 있는 건 글자뿐이에요. 누가 왜 썼는지는 당사자에게 물어야 합니다.”

하림은 장부를 닫았다. “그래서 당신을 부른 거예요. 믿으라고 부른 게 아니라, 의심할 사람으로요.”

“왜 저죠?”

“당신은 협회에서 제명됐지만 자격 취소 사유를 공개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실제로 무엇을 어겼는지 확인할 사람이 필요했죠.”

세하는 그 말이 칭찬인지 조롱인지 묻지 않았다. 자격 취소 통보에는 현장 지시 불복종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녀는 당시 구조 대상이 계약서에 없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문을 열었다. 그 선택으로 동료 하나가 다쳤고 시민 둘은 살아났다. 협회 보고서는 시민 둘의 이름을 빼고 동료의 부상만 남겼다.

“제가 규정을 어긴 건 사실입니다.”

“그 사실을 숨기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그럼 뭘 원하죠?”

“다른 사람들이 같은 방식으로 지워지는 걸 막아 주세요.”

세하는 장부의 퇴출 날짜를 다시 확인했다. 숫자는 7일 뒤였다. 자신의 퇴출 예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묻자 하림은 아직 모른다고 했다. 세하는 이곳의 기록이 누구의 손을 거쳤는지 확인하기 전까지 장부를 믿지 않겠다고 못 박았다.

“좋아요. 원본 계약이 있으면 함께 확인하죠.”

하림은 캐비닛 열쇠를 꺼냈지만 문을 열지는 않았다. “원본은 의뢰인이 가져오기로 했어요.”

“그럼 의뢰인의 이름부터 알려 주세요.”

“이강우.”

세하는 이름을 알아봤다. 강우는 과거 같은 훈련장에서 방패를 들던 헌터였다. 그가 부상을 입고 팀을 나간 뒤, 협회 게시판에는 임무 이탈자라는 문구가 붙었다. 세하는 그때 그를 찾아가지 않았다. 그가 살아남았다는 소식을 듣고도 자신이 처한 상황이 더 급하다고 여겼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을 때, 세하는 우산을 접지 않은 채 현관에 섰다. 비를 흘리는 사람을 안으로 들이기 전 바닥에 종이를 깔았다. 하림은 그 행동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젖은 흔적도 나중에는 기록이 될 수 있었다.

“아직 모릅니다.”

“그런데 왜 나한테 보여 줍니까?”

“이 페이지를 가져온 사람이 당신을 찾았어요.”

문밖에서 누군가가 세 번 노크했다. 하림은 고개를 들었다. 밖에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문을 열자 젖은 작업복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이강우였다. 세하는 그를 협회 훈련장에서 본 적이 있었다. B급 탱커였지만 무릎 부상 뒤로 팀에서 밀려났다는 소문이 있었다.

“기록을 가져왔습니다.” 강우가 말했다.

그는 얇은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봉투 안에는 길드 계약서와 공략 실패 보고서가 있었다. 보고서에는 시민 구조를 위해 경로를 이탈한 행위가 ‘임무 이탈’로 기록돼 있었다. 강우는 그 때문에 보상금을 받지 못했고, 길드에서 퇴출 통보를 받았다.

“지하 주차장 게이트 사고군요.” 세하가 말했다.

“사고가 아니라 구조 성공입니다. 시민 둘을 꺼냈어요.”

“보고서에는 한 명만 구조됐다고 되어 있네요.”

“두 번째 사람은 계약 대상이 아니라서 빼 버렸습니다.”

하림이 장부를 펼쳤다. 비에 젖은 잉크가 조금씩 올라왔다. ‘출구 폐쇄 00:17’, ‘정산 누락 1명’, ‘경보 지연 4분’. 세하는 세 조건을 소리 내 읽었다. 장부는 결과가 아니라 확인할 항목을 적고 있었다.

“이 글씨가 맞다면 아직 게이트가 열려 있다는 뜻이에요.”

“그곳은 이미 봉쇄됐습니다.” 강우가 말했다.

“누가 확인했죠?”

“길드 본부요.”

“현장에 간 사람이 있습니까?”

강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봉투에서 다른 종이를 꺼냈다. 본부의 폐쇄 확인서였지만 날짜는 사고가 난 밤보다 이틀 전이었다. 세하는 서류를 빛에 비췄다. 날인이 흐릿했고, 페이지 번호가 다음 장과 맞지 않았다.

“이건 뒤늦게 만든 문서예요.”

“증거가 있습니까?”

“아직은 없습니다. 그래서 확인하러 가야죠.”

하림은 갈색 우비를 건넸다. “지하 출입구는 잠겨 있을 겁니다. 열쇠가 있어도 안쪽으로 들어가지는 말아요.”

“왜요?”

“장부는 위험을 알려 줄 뿐, 안전을 보증하지 않으니까요.”

세하는 현장에 갈 준비를 했다. 강우는 무릎 보호대를 조여 맸다. 그는 구조대가 아니라 동행자라며, 현장에 들어갈지 말지는 직접 판단하겠다고 했다.

걸어가는 동안 강우는 예전 공략팀이 쓰던 이동 지도를 꺼냈다. 지도에는 출구와 몬스터 흔적이 표시되어 있었지만, 시민 작업자의 대기 장소는 없었다. 그는 당시 팀장이 출구 근처에서 기다리라고 했다고 기억했다. 계약 담당자는 그런 지시를 한 적이 없다고 보고서에 적었다.

“말로 들은 지시는 기록에 남지 않겠네요.” 세하가 말했다.

“그래도 사람은 들었습니다.”

“그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강우 씨 기억만으로는 책임을 확정할 수 없어요.”

강우는 지도를 접었다. “제가 그때 민수를 두고 나왔어요. 그게 사실입니다.”

“그가 안에 남은 이유는 아직 확인하지 않았어요.”

“제가 구하러 돌아갔어야 했습니다.”

세하는 답하지 않았다. 후회는 동기를 설명할 수 있지만, 누가 문을 닫았는지 알려 주지는 않는다. 그녀는 강우에게 구조 당시의 순서를 처음부터 다시 말해 달라고 했다. 그가 기억하는 시각, 명령, 통로의 상태를 한 줄씩 적었다. 강우는 두 번 같은 구간에서 말을 멈췄다. 그때마다 세하는 기억이 나지 않는 부분을 비워 두었다.

하림은 길드 본부에서 받은 통화 기록을 보여 줬다. 사고 신고는 밤 11시 58분, 출입문 잠금은 0시 17분. 신고와 잠금 사이에는 19분이 있었다. 담당자에게 구조 요청을 전달했는지 확인하려면 통화 상대의 이름이 필요했지만, 본부 기록에는 내선 번호만 남아 있었다.

“내선 번호를 쓰는 사람은 몇 명이죠?”

“그날 근무표에는 네 명입니다. 하지만 교대 기록까지 봐야 정확해요.”

세하는 근무표 원본을 요청하기로 했다. 장부의 글씨가 사실이라고 해도, 그 글씨가 가리키는 원인을 기록 밖에서 찾아야 했다. 강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내가 잘못했다고 먼저 말하면 다른 사람은 조사받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렇게 되지는 않았네요.”

“네.”

“그럼 이번에는 사실을 나눠서 말해요. 당신이 한 일과 다른 사람이 한 일을 따로.”

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원본 지도와 통화 기록을 찾는 데 협조하겠다고 했다.

세 사람은 빗속을 걸어 지하 주차장 입구에 도착했다. 차단선은 그대로였지만, 안쪽 경보등이 꺼져 있었다. 문 앞 바닥에는 젖은 발자국이 두 갈래로 남아 있었다. 하나는 밖으로 향했고, 다른 하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세하는 발자국의 크기와 간격을 기록했다. 안쪽으로 향한 자국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물이 고인 곳마다 발자국이 이어졌지만, 마지막 자국은 문 바로 앞에서 끊겼다.

“누군가 아직 안에 있을 수 있어요.”

“공략팀은 전원 철수했다고 보고됐습니다.” 강우가 말했다.

“보고서가 틀렸을 가능성을 확인하는 중이죠.”

그녀는 차단선을 넘지 않았다. 먼저 하림에게 연락해 소방과 협회에 현장 확인을 요청했다. 응답을 기다리는 동안 장부의 잉크가 젖은 종이 위에서 번졌다. 새 문장이 나타났다.

‘문을 열면 구조비가 청구된다.’

세하는 장부를 덮었다. 문 너머에서 금속이 두드려지는 소리가 났다. 한 번, 두 번, 세 번.

강우가 차단선 앞으로 나섰다. “저 안에 사람이 있습니다.”

“확인 전에 들어가면 당신도 구조 대상이 됩니다.”

“그러면 들어가야겠네요.”

세하는 그를 막지 않았다. 대신 출입문 옆 비상 설비함을 열고 안의 경보 장치를 확인했다. 내부 잠금은 정상 작동했지만, 출구 신호는 바깥에서 끊겨 있었다. 누군가 출구를 잠근 것이 아니라, 전원을 차단한 흔적이었다.

그때 장부 위에 또 한 줄이 생겼다.

‘퇴출 예정일: 6일 뒤.’

세하는 글씨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잉크는 번지지 않았다. 문 안에서 다시 노크가 울렸다.

이번에는 네 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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