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서의 오탈자를 고치는 여자

3화: 지워진 얼굴
세린은 아르덴이 거래를 받아들인 뒤에도 한동안 손을 움직이지 못했다.
빈 열람실의 탁자 위에는 사용하지 않는 장부와 마른 깃펜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장부의 여백을 펼쳐 놓고 펜촉을 들었다.
어머니의 얼굴을 그려 보려 했다.
눈썹의 각도부터 떠올리려 했지만 손끝은 종이 위에서 멈췄다. 이벨라의 손등에 있던 작은 흉터는 기억났다. 비가 오면 젖은 머리칼을 말려 주던 손길도 떠올랐다. 낮게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도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눈매와 입가를 이어 보려는 순간마다 하얀 공백이 번졌다.
세린은 억지로 선을 하나 그었다. 삐뚤어진 곡선은 낯선 사람의 얼굴처럼 보였다. 그녀는 그 선을 지우려다 손을 멈췄다. 이 서고에서 잘못된 기록은 찢어 내거나 다시 쓰는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얼굴인가?"
아르덴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렸다.
세린은 황급히 장부를 덮었다. 책장 뒤에 숨어 있던 그는 피가 밴 셔츠 위로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창백한 안색은 여전했지만 호흡은 안정되어 있었다.
"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미 봤다. 네가 종이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것도 함께 봤고."
세린은 장부를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왕자님께서 신경 쓰실 일은 아닙니다."
"내 목에 새로 생긴 문장을 읽고도 아무 일 아니라는 얼굴을 한 사람이 할 말은 아니군."
아르덴이 탁자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세린의 손이 아니라 덮인 장부를 바라보았다.
"잃은 것이 있나?"
질문은 단순했지만 세린의 숨을 막았다. 정정 직후 끊어진 감각과 지금의 공백은 너무 정확하게 맞물려 있었다.
"기억 하나가 흐려졌습니다."
"어떤 기억이지?"
"말할 수 없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과 말하기 싫은 것은 다르다."
"저에게는 같습니다."
세린은 장부 아래로 손을 밀어 넣었다. 붉은 구리 펜촉이 손바닥에 닿았다. 봉인실에서 그 펜촉이 따뜻해졌던 순간을 말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의 얼굴을 잃었다는 사실도 이미 지나치게 많이 말했다.
아르덴은 더 캐묻지 않았다.
"좋아. 네가 숨기고 싶은 기억을 내가 가져갈 생각은 없다. 다만 그 기억을 잃게 한 일이 내 생존과 이어져 있다면 언젠가는 알아야 한다."
복도 바깥에서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세린은 즉시 촛불을 손으로 가렸다. 문틈 아래로 푸른 빛이 스며들었다.
"예언청입니다."
아르덴이 검을 찾으려 하자 세린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검을 뽑으시면 모두 죽습니다."
"나를 넘기면 너만 살 것 같나?"
"넘길 생각이 없습니다."
세린은 지도 궤짝을 가리켰다. 아르덴은 말없이 그 뒤로 몸을 낮췄다.
"이번에는 내가 네 지시를 따르지."
"소리 내지 마세요."
"그건 이미 들었다."
세린은 장부를 품에 넣고 문 쪽으로 다가갔다.
복도 끝에서 굵은 목소리가 울렸다.
"왕실 섭정 명에 따라 왕립 서고를 수색한다. 처형 대상의 시신과 무단 침입자를 숨긴 자는 즉시 체포한다."
푸른 봉인 망토를 입은 수색관 둘이 보존실 통로로 들어왔다. 그 뒤에는 로웬이 커다란 장부 궤짝을 끌고 따라오고 있었다. 태연한 척했지만 장갑을 낀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이쪽은 수선 대기 문서뿐입니다. 물에 젖어서 냄새가 아주 고약합니다."
"비켜라."
앞선 수색관이 로웬의 어깨를 밀쳤다. 로웬은 비틀거리며 궤짝을 놓쳤고 낡은 장부들이 바닥에 쏟아졌다.
"죄송하지만 밟지는 마십시오. 그중에는 세금 징수 원본도 있습니다. 훼손되면 제 목이 날아갑니다."
로웬은 허리를 굽히는 척하며 세린 쪽을 보았다. 눈이 문고리와 수색관 사이를 빠르게 오갔다.
세린은 문을 열었다.
"빈 열람실도 확인하시겠습니까?"
수색관의 시선이 세린의 소매와 손가락에 닿았다.
"네가 이곳 담당인가?"
"필경사 견습생입니다. 보존실 안쪽 문서를 분류합니다."
"붉은 잉크를 쓰나?"
세린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쌌다.
"교정용 잉크는 수석 필경사의 허가가 있어야 쓸 수 있습니다. 저는 검은 잉크만 사용합니다."
"허가증을 보여라."
세린은 품에서 하급 출입증을 꺼내 내밀었다. 수색관은 그것을 받아 봉인 문양을 확인했다.
그때 로웬이 바닥의 장부 하나를 펼쳤다.
"잠깐만요. 이 장부 표지가 젖은 게 아니라 안쪽에서 부풀었습니다. 곰팡이 포자가 퍼진 모양입니다. 불을 가까이 대면 기록 전체가…"
그는 장부를 수색관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퀴퀴한 냄새가 복도에 퍼졌다. 수색관이 얼굴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났다.
"치워라."
"사흘 전 반출 기록도 확인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봉인 잉크를 가져간 수량이 맞지 않으면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로웬이 다른 장부를 집으려 하자 수색관의 얼굴이 굳었다.
"그 장부는 건드리지 마라."
명령은 너무 빨리 나왔다. 세린은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그들이 찾는 것은 아르덴의 시신만이 아니었다. 열린 봉인실과 반출된 봉인 잉크 그리고 붉은 교정 잉크가 하나의 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수색관 하나가 지도 궤짝 쪽으로 다가왔다.
세린은 재빨리 앞을 가로막았다.
"그 안에는 왕실 지도가 들어 있습니다. 습기가 들어가면 봉인지가 들러붙습니다."
"비켜."
"열람 기록을 먼저 작성하셔야 합니다. 왕실 지도를 훼손하면 수색관님도 책임을 피하지 못합니다."
궤짝 안쪽에서 아주 작은 숨소리가 났다. 세린은 피가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로웬이 바닥의 장부를 발로 밀었다. 모서리가 나무 바닥을 긁으며 큰 소리를 냈다.
"저쪽 장부가 더 심합니다. 검은 곰팡이가 표지까지 올라왔습니다."
수색관은 욕설을 내뱉고 고개를 돌렸다. 결국 그는 궤짝을 열지 못한 채 물러났다.
"침묵의 서고 쪽 문은 확인했다. 안에 들어간 흔적은 없었다고 기록하겠다. 하지만 붉은 잉크를 쓴 자가 나타나면 서고의 모든 필경사를 조사할 것이다."
그는 세린의 손가락을 다시 보았다.
"손을 깨끗이 씻어 두는 편이 좋을 거다."
수색대의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세린은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제야 다리에 힘이 풀렸다.
지도 궤짝의 뚜껑이 안쪽에서 들렸다. 아르덴이 조용히 빠져나왔다.
"네가 아니었다면 내 목은 다시 잘렸겠군."
"로웬이 시간을 벌어 주었습니다."
"너도 손을 내밀었다."
세린은 대답하지 않고 복도에 흩어진 장부를 주웠다. 로웬은 수색대가 사라진 방향을 확인한 뒤 낮게 말했다.
"저 사람들 아르덴 왕자님을 찾는 게 맞긴 한데 이상해. 시신을 찾는 사람이 왜 잉크 색부터 묻지?"
"그들도 봉인실의 흔적을 확인하려는 것 같습니다."
세린의 말에 로웬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궤짝 뒤에서 드러난 왕실 문장을 보고 더 묻지 않았다.
"내가 복도 쪽을 보고 있을게. 마렐라 님이 돌아오면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
로웬이 통로 끝으로 물러나자 열람실 안에는 다시 세린과 아르덴만 남았다.
아르덴의 시선이 탁자 위로 내려갔다. 덮어 둔 장부의 모서리가 들리며 낯선 얼굴의 절반을 드러냈다.
"그림을 완성하지 못했군."
세린은 장부를 접어 품에 넣었다.
"완성할 수 없는 그림이었습니다."
"네가 잃은 기억이 그 얼굴인가?"
세린은 이번에는 부정하지 않았다.
"어머니입니다. 손은 기억납니다. 목소리도요. 그런데 얼굴을 떠올리면 눈매와 미소가 사라집니다. 방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없었던 것처럼요."
그녀는 자신이 말하고서야 그 공백이 얼마나 잔인한지 알았다. 어머니가 자신을 바라보던 방식이 통째로 지워졌다. 세린이 버려지지 않았다고 믿게 해 주던 마지막 증거였다.
아르덴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의 손이 목의 검은 문장 위에서 멈췄다.
"처형대에서 내 저주가 끊길 때 잉크가 타는 냄새를 맡았다. 피 냄새보다 선명했다. 문장이 피부에서 빠져나가는 대신 안쪽으로 밀려 들어가는 느낌도 들었지."
세린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그 냄새를 서고에서도 맡으셨습니까?"
아르덴은 그녀를 빤히 보았다. 세린은 바로 후회했다. 그러나 그는 답을 재촉하지 않고 망토 안쪽에서 구겨진 종이 조각을 꺼냈다.
종이에는 왕실 명령문의 일부가 남아 있었다. 가장자리에는 라우렌의 인장이 반쯤 찍혀 있었다.
"처형 명령이 아니라 집행 직전의 추가 지시다. ‘문장이 끊기더라도 시신을 회수하고 기록의 이상을 보고할 것.’"
세린은 종이를 받아 들지 않았다.
"그 문장을 왜 보여 주십니까?"
"네가 본 것을 말하지 않아도 된다. 대신 내가 아는 것도 숨기지 않겠다. 거래를 공평하게 만들 생각이다."
그는 종이를 다시 접었다.
"지금 너를 쫓는 자들은 이미 네 손을 의심하고 있다."
"제가 무엇을 했는지 모르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군요."
"모른다. 그래서 묻는 거다."
세린은 붉은 구리 펜촉을 꺼내지 않았다.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설명할 말도 없었다. 펜촉을 대자 아르덴이 살아 돌아왔지만 그 대가로 어머니의 얼굴이 지워졌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제가 왕자님을 살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무엇이 일어났는지 저도 모릅니다."
아르덴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긴 침묵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오늘은 그 대답을 받아들이지."
그가 문 쪽으로 몸을 돌리자 목의 검은 문장이 꿈틀거렸다.
세린은 숨을 들이켰다. ‘필경사의 손으로’라는 단편 뒤에서 새로운 검은 번짐이 번지고 있었다. 은빛으로 떠오르는 획은 없었다. 정정할 수 있는 오류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아르덴이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무엇이 보이지?"
세린은 장부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아직 읽을 수 없습니다."
아르덴은 거짓말을 알아챈 듯했지만 따지지 않았다.
"그럼 읽을 수 있을 때까지 죽지 않겠다."
그는 보존실 뒤편의 비밀 통로 문을 열었다. 세린은 문장 끝의 번짐을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얼굴처럼 검은 어둠 속에 잠긴 글자는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
읽을 수 없는 문장 앞에서 추측은 금지였다. 그래도 그 어둠이 자신을 향한다는 감각은 떨쳐지지 않았다.
세린은 붉은 구리 펜촉을 주머니 깊숙이 숨겼다.
아직은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르덴을 혼자 남겨 둘 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