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서의 오탈자를 고치는 여자

1화: 붉은 잉크가 번질 때
왕립 서고 지하 2층 필사실은 언제나 묵직한 잉크 냄새와 말라붙은 양피지 냄새로 가득했다.
늦가을의 차가운 비가 서고 높은 곳에 난 좁은 창문을 쉴 새 없이 두드리고 있었다. 빗소리가 아득하게 울리는 가운데 세린 벨은 깃펜의 끝을 다듬었다. 그녀의 오른손 둘째 손가락 마디에는 베껴 쓴 세월만큼 짙은 검푸른 착색이 남아 있었다. 필경사 견습생으로서 그것은 훈장이자 벗어날 수 없는 신분의 낙인이었다.
"세린, 자간이 조금 좁다. 세 번째 줄의 농업 세금 기록은 제국 행정관이 읽을 서류다. 숫자가 뭉쳐 보이면 서고의 신용이 떨어진다."
은발을 단정하게 빗어 올린 수석 필경사 마렐라 도엔이 단안경을 비껴 쓰며 세린의 책상 곁을 지나갔다. 마렐라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건조하고 까다로웠다.
"죄송합니다, 마렐라 님. 다시 정갈하게 올리겠습니다."
세린은 즉시 깃펜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마렐라는 세린의 정갈한 글씨체와 성실함을 알고 있었지만 결코 겉으로 칭찬을 건네지는 않았다. 서고에서 오탈자는 곧 기록에 대한 배신이었으며 베껴 쓰는 자의 개인적인 감정은 잉크 한 방울만큼도 허용되지 않는 법이었다.
그때 필사실의 두꺼운 목재 문이 벌컥 열리며 붉은 곱슬머리의 청년이 숨을 헐떡이며 들어왔다. 서고 보존실 관리인이자 세린의 오랜 친구인 로웬 키르였다. 커다란 가죽 장갑을 낀 로웬의 어깨는 빗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마렐라 님! 지금 수도 광장 쪽 소식 들으셨습니까? 저녁 종이 울리기 전에 아르덴 왕자님의 처형식이 강행된다고 합니다!"
로웬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쏘아붙이듯 말했다. 세린은 필사하던 깃펜을 멈칫쥐었다.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가며 잉크 한 방울이 양피지 여백에 떨어질 뻔했다.
저주받은 둘째 왕자 아르덴 레오니스.
왕실에 검은 핏빛 저주가 내렸다는 소문과 함께 섭정 라우렌 백작에 의해 반역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은 비운의 왕자였다.
"로웬, 서고 안에서는 고함을 지르는 게 아니다."
마렐라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그리고 왕가의 일이나 예언청의 사형 집행은 우리가 다룰 기록이 아니다. 필경사는 오직 전달된 문장만을 베낄 뿐이다."
"하지만 마렐라 님, 이상하지 않습니까? 나흘 전까지만 해도 사형 집행 문서의 날짜가 다음 달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흘 전 예언청에서 봉인 잉크를 대량으로 반출해 가더니 오늘 아침 갑자기 사형 인장이 새로 찍혀 내려왔단 말입니다!"
로웬은 억울하다는 듯 서류 가방을 틀어쥐며 중얼거렸다.
"제가 보존실 장부를 정리하다가 봤습니다. 예언청 하급 전달책들이 서고 지하 근처를 서성거리는 것도 여러 번 봤고요."
"그만."
마렐라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청동 열쇠 뭉치를 집어 들어 자신의 전용 가죽 주머니에 넣었다.
"쓸데없는 호기심은 수명을 줄이는 지름길이다. 예언청 장관과 섭정 전하께서 결정하신 일에 서고의 하급 직원들이 왈가왈부할 순 없다. 세린, 남아 있는 중앙 영지 수확 장부만 마저 정리하고 보존실 문을 잠그거라. 나는 왕실 의회의 긴급 소환이 있어 잠시 자리를 비운다."
마렐라는 엄격한 눈빛으로 세린과 로웬을 번갈아 본 뒤 빗소리가 요란한 로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서고의 장중한 문이 닫히자 필사실 안에는 서늘한 정적만이 남았다.
로웬은 혀를 쯧쯧 차며 세린의 책상 옆으로 다가왔다.
"마렐라 님은 너무 차가워. 세린, 너도 들었지? 아르덴 왕자님이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걸 본 사람들이 있대. 목 뒤에서부터 검은 문장이 핏줄처럼 뻗어 나와 있었다더라고. 예언서에 기록된 죽음이 가까워지면 나타난다는 그 저주의 문장 말이야."
"로웬, 마렐라 님 말씀대로 우리는 그저 필경사일 뿐이야."
세린은 조용히 깃펜을 먹물병에 적시며 응수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 한구석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릴 적 어머니 이벨라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 세린은 항상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애써 왔다. 쓸모 있는 기록자로서 서고에 남아 있어야만 버려지지 않는다는 두려움이 그녀를 조종하고 있었다. 정치나 예언서 따위에는 관심도 두지 않는 것이 살아남는 법이었다.
"알았어. 난 보존실 서류 궤짝이나 마저 묶으러 갈게. 너도 너무 늦게까지 있지 말고 일찍 퇴근해."
로웬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보존실 깊은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혼자 남은 세린은 필사를 계속 이어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밖에서 불어오는 빗줄기는 더욱 사나워졌고 서고 지하 전체에 묘한 냉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탁상시계의 태엽 소리가 무겁게 틱톡거렸다. 저녁 여섯 시를 알리는 수도 중앙 탑의 종소리가 둔탁하게 울려 퍼졌다. 아르덴 왕자의 사형이 집행될 시간이었다.
세린은 서류 정리를 마치고 촛불을 끄기 위해 일어섰다. 그런데 지하 깊은 곳, 보통 때라면 굳게 닫혀 있어야 할 침묵의 서고 봉인실 방향에서 이질적인 바람이 불어왔다.
건조하고 서늘하며 알싸한 에테르와 푸른 봉인 잉크의 향이 섞인 바람이었다.
세린은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멈추었다. 침묵의 서고는 왕국의 미래와 왕가의 운명이 담긴 원본 예언서들이 보관된 금단의 구역이었다. 수석 필경사인 마렐라조차 왕실 인장 없이는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세린은 등불을 들고 지하 복도로 천천히 걸어갔다.
복도 끝에 서 있는 거대한 철제 이중문이 낯설게 열려 있었다. 문을 지켜야 할 왕실 근위대 기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르덴 왕자의 처형장 경비를 위해 차출되었거나 누군가 의도적으로 자리를 비운 것이 틀림없었다.
열린 문 틈새로 푸른색 잉크 향이 짙게 흘러나왔다.
그 순간 세린의 앞치마 안쪽 주머니에 들어 있던 낡은 펜촉이 작게 진동했다. 어머니 이벨라가 사라지던 날 세린의 손에 쥐여 주었던 붉은 구리 펜촉이었다.
이곳에 들어가는 일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세린의 발은 이미 열린 이중문 너머 계단을 내딛고 있었다. 무언가가 그녀를 이끌고 있었다. 서고의 기록자로서 느껴지는 설명할 수 없는 끌림과 어머니의 펜촉이 보내는 미세한 온기가 그녀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지하 봉인실은 거대한 천장 환기창을 통해 내려오는 늦가을 밤의 푸른 달빛으로 차올라 있었다. 공기 중에 떠도는 미세한 마력 입자들이 푸른 빛을 발하며 고요하게 일렁였다.
방 한가운데에는 흑단목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봉인시대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 굵은 사슬로 묶인 거대한 양피지 책 한 권이 펼쳐져 있었다.
아르케니아 왕국의 미래를 고정하는 원본 예언서였다.
세린은 숨을 죽인 채 봉인시대 앞으로 다가갔다. 감히 손을 대는 것조차 불경한 일이었지만 세린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오늘 날짜가 기록된 페이지로 향했다.
달빛 아래 짙은 푸른색 봉인 잉크로 적힌 문장이 세린의 눈에 들어왔다.
[저주받은 둘째 왕자 아르덴은 오늘 밤 처형장의 피로 죽으리라.]
문장을 읽는 순간 세린의 눈앞에 기묘한 광경이 펼쳐졌다.
평소에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이상한 감각이었다. 문장의 가운데 부분인 '죽으리라'라는 글자 주변으로 마치 촛농이 녹아내리듯 검고 어두운 그늘이 일렁이고 있었다.
검은 번짐이었다.
그리고 그 검은 번짐 한가운데 '죽'이라는 글자 위로 은은하고 맑은 은빛 빛무리가 실타래처럼 떠올랐다.
세린은 눈을 비볐지만 환영이 아니었다. 매일 수백 장의 사본을 필사하고 오류를 감식해 온 세린의 필경사적 감각이 명확하게 외치고 있었다.
이 문장은 틀렸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운명의 기록이 아니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먹을 덧칠해 문맥을 뒤틀어 놓은 오탈자이자 조작된 오류였다. 원문의 문법과 흐름에 맞지 않는 어색한 균열이 세린의 눈에는 또렷하게 보였다.
"어떻게 예언서의 글자가 틀릴 수가 있지?"
세린의 입술이 경련했다.
필경사로서 문장의 오류를 보고도 지나치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더욱이 그 오류가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사형 선고라면 더더욱 그랬다.
세린은 자신도 모르게 앞치마 주머니에 손을 넣어 붉은 구리 펜촉을 꺼냈다. 필경사들이 사용하는 교정용 붉은 잉크 병도 함께 손에 잡혔다.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예언서 원본에 손을 대는 일은 국왕에 대한 반역이자 대역죄였다. 발각되면 그 자리에서 목이 잘릴 터였다.
하지만 은빛으로 일렁이는 오탈자는 세린의 손길을 간절히 부르고 있었다.
세린은 깃펜 끝에 붉은 잉크를 살짝 묻혔다. 그리고 은빛으로 불타오르는 '죽' 자 위에 펜촉을 대었다.
펜촉이 양피지에 닿는 순간 찌릿한 전기 자극이 세린의 손가락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세린은 이빨을 악물었다. 새 문장을 만들어 낼 수도 문장을 지울 수도 없었다. 하지만 오류가 있는 한 글자는 바꿀 수 있었다.
세린은 은빛 글자의 결을 따라 단호하게 펜을 움직였다.
'죽' 자의 획을 꺾어 '살' 자로 고쳐 썼다.
[저주받은 둘째 왕자 아르덴은 오늘 밤 처형장의 피로 살으리라.]
붉은 잉크가 양피지의 결을 따라 스며들었다. 순간 원본 예언서 전체가 강렬한 푸른빛과 붉은빛으로 진동하며 서고 지하를 환하게 비추었다. 붉게 고쳐 쓴 '살' 자는 양피지 속으로 깊이 녹아들더니 이내 기존의 푸른 봉인 잉크와 완벽하게 융합하며 원래부터 거기에 있었던 문장처럼 깔끔하게 변했다.
"아…!"
그와 동시에 세린의 뇌리를 찢는 듯한 지독한 현기증이 급습했다.
머릿속에서 무언가 툭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차가운 허무감이 그녀의 기억 한구석을 휩쓸고 지나갔다.
세린은 머리를 감싸 쥐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숨이 턱 막히고 눈앞이 까맣게 물들었다.
매일 밤 떠올리던 어머니 이벨라의 다정한 얼굴. 그중에서 어머니의 따뜻한 눈매와 입가의 미소 윤곽이 마치 물에 젖은 잉크처럼 하얗게 번지며 지워져 버렸다. 어머니가 어떤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는지 기억해 내려 했지만 그 자리는 텅 빈 백지처럼 아득해질 뿐이었다.
정정의 대가였다.
원문에 없던 미래를 끌어당긴 대가로 세린 자신의 가장 소중한 기억의 조각이 잉크처럼 사라진 것이었다.
세린은 공포와 경악에 질려 가쁜 숨을 내쉬었다.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지 비로소 실감이 났다. 예언을 고쳤다. 왕자의 죽음을 비틀었다. 그리고 자신의 기억을 잃었다.
지하 봉인실 위쪽에서 사나운 벼락 소리가 서고 전체를 흔들었다.
세린은 떨리는 손으로 붉은 펜촉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허둥지둥 봉인실을 뛰어넘어 계단을 올라갔다.
빗소리가 사납게 울리는 서고 로비로 돌아온 세린은 젖은 벽에 몸을 기대고 가슴을 옥죄었다. 머릿속은 텅 빈 백지 같았고 손가락 끝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내가 왕자를 살린 건가?'
그러나 그것이 기적인지 아니면 자신과 왕국을 파멸로 이끌 재앙의 시작인지 세린은 알 수 없었다. 단지 창밖에 내리는 늦가을 비가 오늘 밤 수도의 모든 것을 씻어 내리듯 사납게 쏟아지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