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도 농장의 씨앗 도둑

3화: 숨 쉴 자리를 나누다
필터가 멈춘 뒤 폐쇄 구역의 산소 수치는 다시 떨어지기 시작했다.
“관을 다시 연결하면 섬유가 넘어올 수 있어요.” 이든이 말했다.
“문을 열면 더 크게 번질 수도 있죠.” 도경이 응수했다.
두 사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아가 유리 안쪽의 경보 버튼을 눌렀다.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숨이 가쁘지만 손은 떨리지 않았다.
“엄마 표본이 자랐어요. 그것 때문에 필터가 멈춘 건 아니에요.”
라희는 모니터의 파형을 확인했다. 초록 섬유의 움직임과 산소 저하가 동시에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식물 센서가 광합성 수치를 내고 있었다. 문제는 이산화탄소 흡수 장치가 멈췄다는 것이었다. 표본은 폐쇄 구역에서 공기를 정화하고 있었다.
“노아, 네 뒤에 있는 잎을 건드리지 마. 환기구 아래쪽에서 회색 덮개를 찾아.”
“그걸 열면 돼요?”
“아직 몰라. 먼저 위치만 확인해 줘.”
노아는 천천히 움직였다. 흙을 밟지 않으려 발끝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는 잎사귀 사이로 손을 넣었다가 움찔했다. 가느다란 뿌리가 손목에 감겨 있었다. 라희는 뛰어들 뻔했지만, 이든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안쪽 생태 반응을 자극하지 마요.”
노아는 뿌리를 잡아당기지 않았다. 그는 손을 펴고 가만히 기다렸다. 뿌리는 손목을 한 바퀴 감은 뒤 스스로 풀렸다. 노아는 덮개를 찾아 열었다. 그 안에 있는 필터 카트리지는 망가진 게 아니라, 누군가 바깥에서 전원을 끊어 놓은 상태였다.
도경의 시선이 단말기 로그로 향했다. 전원 차단 명령은 그녀의 보안 코드로 입력돼 있었다.
“내가 내린 명령이 아니야.”
“코드가 도경 팀장님 거예요.” 이든이 말했다.
“그럼 누군가 내 권한을 복제했겠지.”
상황을 부인할 수도 있었지만 도경은 자신의 카드키를 뽑아 라희에게 건넸다. “내 권한을 임시 정지해. 내가 조사받을게. 지금은 필터부터 살려.”
라희는 도경의 선택을 기록했다. 그녀는 카드키를 단말기에 대어 관리자 권한을 정지시켰다. 남은 전력으로 필터를 다시 돌릴 수는 있었지만, 그 전력을 쓰면 농장 3구역 관수 펌프가 멈춘다. 종자와 채소가 말라 죽을 수 있었다. 이든은 대체 전력선을 연결하면 격리막의 압력이 불안정해진다고 경고했다.
“하나만 살릴 수 있다는 거예요?” 노아가 물었다.
라희는 그에게 사실대로 말했다. “지금은 둘 다 지킬 방법을 찾지 못했어.”
“그러면 하나만 고르지 말아요.”
노아는 폐쇄 구역의 물 저장통을 가리켰다. 엄마가 남긴 수동 펌프가 연결돼 있었다. 그 물을 온실 관수관으로 보내면 전력 펌프를 잠시 끄고, 남는 전력을 필터에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수동 펌프는 생태 구역의 물을 섞게 되어 있었다. 이든은 그 물에 미생물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완전히 안전한 선택은 없어.” 라희가 말했다. “네가 가진 정보를 우리에게 말해 줄래?”
“엄마는 물을 끓여서 썼어요. 이 식물은 물을 그대로 먹지 않았어요.”
라희는 그 규칙을 확인하기 위해 폐쇄 구역 벽에 붙은 표기들을 확대했다. 은주의 필체로 ‘열 교환 후 분리’라는 메모가 있었다. 이든은 온실의 예비 열교환기를 이용해 물을 순환시킬 수 있다고 했다. 다만 압력이 모자라면 관수관이 끊길 위험이 있었다.
도경은 자신의 관리자 권한이 막힌 상태에서도 밸브를 수동으로 조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위험을 감수하겠다고 했다. 이든은 압력을 지켜보겠고, 라희는 온실 펌프를 낮은 회전으로 돌리기로 했다. 노아는 안쪽에서 수동 펌프를 작동할 수 있다고 자원했다.
라희는 그가 어른 대신 위험을 맡는 건 원하지 않았다. 노아는 자신의 집을 가장 잘 안다고 말했다. 결국 역할을 나눴다. 노아는 격리막 바깥으로 나오지 않고 펌프 손잡이만 돌린다. 이든이 수치가 위험해지면 즉시 중단을 외친다. 도경은 수동 밸브를 잡고, 라희가 온실 순환을 맞춘다.
작업은 한 번에 돌아가지 않았다. 첫 회전에서 압력계가 붉은 선까지 튀었다. 이든이 중단을 외쳤고 도경이 밸브를 잠갔다. 물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필터는 다시 꺼져 가고 있었다. 라희는 배관을 따라가 막힌 구간을 찾았다. 온실 관수관이 아니라 폐쇄 구역 쪽 역류 방지 밸브가 잠겨 있었다. 라희가 장갑을 낀 손으로 레버를 당겼다.
“힘으로 하지 마요.” 이든이 외쳤다.
“그럼 어떻게 열어요?”
“압력을 빼고 2초씩 당겨.”
라희는 배관의 진동이 멈출 때마다 레버를 조금씩 움직였다. 세 번째 시도에서 금속이 탁 소리를 내며 풀렸다. 물이 열교환기로 흘렀고, 농장 펌프는 멈췄다. 관수관의 잎들이 처졌지만 꺾이지 않았다. 필터가 다시 돌아가자 폐쇄 구역의 산소 수치가 천천히 올라갔다.
노아는 펌프 손잡이에서 손을 떼었다. “엄마가 한 방법이 맞았어요.”
“그 기록을 누구도 지우지 못하게 할게.” 라희가 말했다.
도경은 은주의 이름이 적힌 작업 기록을 열어 공개 보존함에 넣었다. 그녀는 사고 뒤에 무엇을 숨겼는지 밝혀야 한다고 인정했다. 이든은 격리막을 풀지는 않았지만, 노아에게 임시 호흡 장치를 보내기로 했다. 안전 규칙은 남아 있었고, 이제 그 규칙을 아이에게 설명하는 사람이 생겼다.
라희가 종자 은행의 실시간 수치를 확인하자, 사라진 완두 종자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런데 그 빈 칸에서 새로운 발아 신호가 감지됐다. 정거장 승인 목록에 없는 씨앗이 얼음 속에서 싹을 틔우고 있었다. 화면에는 종자 소유자 대신 오래된 작업자의 이름이 떴다. 박은주.
노아는 작은 스피커 너머로 숨을 삼켰다. “엄마가 여기에도 있어요?”
라희는 대답하지 못했다. 종자 은행의 유리 안쪽에서 흙 한 줌이 천천히 부풀었다.
“엄마 이름을 한 번 더 말해 봐.” 이든이 물었다.
노아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라희가 손을 들어 질문을 막았다. “지금은 그 이름을 말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돼.”
아이의 눈이 손에 든 태그로 내려갔다. “그 이름을 말하면 다들 엄마를 죽은 사람이라고만 해요. 엄마는 내게 씨앗을 맡겼어요. 사람들을 믿을지 말지는 내가 고르라고 했어요.”
도경은 고개를 숙였다. “은주는 네가 태어나기 전에 죽었어.”
“그걸 누가 봤어요?”
도경의 입술이 떨렸다. 그때 정거장 알람이 울렸다. 농장 3구역 펌프 정지로 잎채소 온도가 올라가고 있었다. 저녁 수확까지 남은 시간은 20분. 이대로면 출하할 수 있는 채소의 절반이 시들었다. 농장 바깥 스피커에서 배급 담당자가 열량 감축을 예고했다. 라희는 노아와 농장의 양쪽을 지키기 위해 설비를 재가동해야 했다.
그녀는 수동 밸브 앞에 몸을 낮췄다. 밸브 손잡이는 벽 안쪽에 걸려 있었다. 장갑 끝이 금속 모서리에 찢겼다. 피가 묻기 전에 이든이 붕대를 던졌다. 라희는 손을 감고 다시 손잡이를 잡았다. 도경은 압력계 앞에서 숫자를 읽었고, 노아는 격리 구역 안에서 펌프 회전수를 손으로 세었다.
첫 번째 시도에서 관이 울컥이며 물을 역류시켰다. 필터 센서가 뛰었다. 이든은 중단을 외쳤지만, 노아가 펌프를 놓지 않았다. “이걸 멈추면 싹도 죽어요!”
“노아, 내려놔!” 라희가 말했다.
“엄마가 그랬어요. 물을 천천히 보내야 뿌리가 놀라지 않는다고.”
라희는 회전수를 듣고 밸브를 아주 조금 열었다. 물의 진동이 가라앉았다. 이번에는 열교환기 쪽으로 흐름이 이어졌다. 한 번의 선택이 다른 위기를 만들 수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도 각자가 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온실 펌프가 다시 돌자 잎들이 조금씩 일어났다. 관수 센서가 녹색으로 바뀌고, 폐쇄 구역 필터에도 산소가 돌아왔다. 다만 예비 전력의 절반을 썼다. 농장 전체 수확량은 계획보다 줄어들 것이다. 배급 담당자는 불만을 쏟아냈지만, 도경은 그 손실의 승인자로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그녀는 보안실에서 필터 정지 명령 원본을 불러왔다. 코드가 도경의 것이 맞았다. 하지만 명령을 내린 단말기는 농장 안이 아니라 지구의 종자 회사 서버였다. 계약상 회사는 승인되지 않은 종자를 발견하면 정거장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온실 설비를 차단할 수 있었다. 도경은 그 계약에 서명한 사람 중 하나였고, 회사는 그 권한으로 폐쇄 구역까지 잠갔다.
“은주가 계약을 바꾸려 했어.” 도경이 말했다. “그날 사고 뒤, 나는 서명을 지우지 못했어.”
이든은 나사 파편을 봉투에 넣었다. 그는 과거 사고와 오늘의 필터 차단이 연결됐다고 단정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원격 명령의 접속 기록을 공개 보존함에 올렸다. 도경은 자신의 코드가 사용된 책임을 지고 조사에 협조하기로 했다.
노아는 환기구 앞에서 씨앗을 확인했다. 완두의 껍질이 갈라지고, 흰 뿌리가 흙 속으로 한 밀리미터 더 들어갔다. 그는 그 작은 성장을 라희에게 보여 주었다. “이걸 밖으로 내보내도 돼요?”
“안전 검사가 필요해. 하지만 네 허락 없이 버리지는 않을게.”
“그럼 여기서 키워요. 정거장 사람도 먹을 수 있게요.”
농장의 승인 목록에 없는 씨앗 하나가 자랄 자리를 얻었다. 라희는 온실의 수확 손실을 확인하고, 배급표에 부족분을 직접 적었다. 그 대가를 숨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노아가 남긴 종이의 숫자 17, 18, 19는 날짜가 아니라 발아 일수였다.
저녁 조명이 꺼지기 직전, 종자 은행의 빈 칸에서 경고가 떴다. 얼음 안쪽의 오래된 씨앗이 발아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등록 기록에는 작물 이름도 소유자도 없었다. 오직 저장 시각만 남아 있었다. 사고 당일, 박은주가 폐쇄 구역으로 들어간 4년 전의 시간이었다.
라희는 수확 모니터에 손실 숫자를 숨김없이 입력했다. 손실은 구역 전체의 몫으로 나뉘어 배급표에 반영됐다. 누군가 화를 내도 그 책임을 피하지 않기로 했다. 도경은 농장 스피커를 켜고 자신이 필터를 차단하는 계약에 서명했다고 주민들에게 말했다. 그 선택이 오늘 아이를 위험에 빠뜨렸다고 인정했다.
침묵 끝에 누군가 “그래도 오늘은 채소가 살아 있네요”라고 말했다. 농장 사람들은 남은 수확량을 다시 계산하기 시작했다. 라희는 그 소리를 들으며 노아가 건넨 새싹 사진을 저장했다. 그것은 멋진 해결책이 아니었다. 내일도 물을 나누고, 감염을 검사하고, 누가 씨앗을 소유하는지 다투어야 했다. 하지만 적어도 씨앗은 오늘 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