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도 농장의 씨앗 도둑

1화: 하루에 한 알씩
온실의 새벽은 알람 대신 잎사귀가 만든다.
회전 농장 3구역의 인공 햇빛이 켜지자 박라희는 허리를 굽혀 토마토 잎끝을 살폈다. 잎맥이 안쪽으로 말려 있었다. 물이 부족한 모양은 아니었다. 관수관은 정상 압력이었고 배양액의 염도도 허용 범위였다. 그런데 잎은 마치 누군가 밤새 손톱으로 긁은 것처럼 수축해 있었다. 라희는 장갑을 벗고 잎에 손등을 가까이 댔다. 따뜻한 공기 속에서 잎만 차가웠다.
“첫날부터 작물과 속삭이는 중이에요?” 정이든이 차단문 안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말을 걸어야 대답을 하죠.”
“기계에 물으면 더 빨리 답합니다.”
이든은 생태 안전 담당자답게 농담도 센서처럼 건조했다. 그의 손에는 어제의 종자 재고표가 들려 있었다. 라희는 출근 전까지 모르는 척했던 숫자를 확인했다. 지구산 완두 종자 열두 알 가운데 한 알이 사라졌다. 씨앗은 냉동 은행에서 나온 뒤 발아실의 밀폐 용기에 보관됐다. 출입 기록상 온실에는 라희와 도경, 이든 세 사람만 들어왔다.
“누군가 실수로 옮겼을 수도 있어요.” 라희가 말했다.
“작은 종자는 실수로 사라지지 않아요. 특히 승인 전 종자는.” 이든은 용기 봉인을 확대경으로 확인했다. 찢긴 자국은 없었다. “농장 책임자한테 보고했습니까?”
“도경 팀장님은 내가 오기도 전에 알고 있었어요.”
“그게 더 걱정이네요.”
서도경은 온실 반대편의 배급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하루 식량량이 어제보다 3퍼센트 낮아졌다. 정거장에 새 화물선이 도착할 때까지 열흘. 농장은 그때까지 잎채소 수확을 앞당겨야 했다. 도경은 라희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종자에 대해서는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보관함을 확인했어요. 완두 하나가 없어요.” 라희가 말했다.
“아침에 알았어.”
“누가 가져갔습니까?”
“모르니까 조사하는 거겠지.” 도경은 농장 지도에서 통로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저녁 점검 전까지 온실을 닫고 싶진 않아. 수확량이 걸려 있어.”
“씨앗은 승인도 되기 전에 사라졌는데요.”
“그래서 지금 온실을 봉쇄하면 더 많은 작물이 죽어.”
도경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라희는 더 묻지 않고 용기 바닥의 먼지를 채취했다. 계량기에는 흙 성분이 없었다. 그러나 배양 선반 아래에 초록빛 섬유가 한 가닥 걸렸다. 온실에서 쓰는 묶음끈과 달랐다. 빛을 받자 가느다란 뿌리처럼 반응하며 수축했다.
라희는 샘플 봉투를 꺼냈다. 이든이 손목을 잡았다.
“맨손으로 만지지 마요.”
“장갑 위예요.”
“장갑도 뚫을 수 있습니다.”
이든은 작은 생물 재료가 포자를 내보내기 전에 봉투에 넣었다. 그 순간 농장 스피커가 울렸다. “폐쇄 생태 구역의 산소 필터 효율 저하. 출입 제한을 유지하십시오.” 안내 음성은 평소보다 한 박자 늦었다.
라희는 지도 화면을 확대했다. 폐쇄 구역은 4년 전 곰팡이 오염 이후 출입이 막혔다. 필터는 지금도 돌아가지만, 내부 생태계는 사멸 처리된 상태였다. 그런데 센서 그래프에는 호흡으로 보이는 산소 소비가 찍혀 있었다. 작물의 광합성 리듬과 반대였다.
“안에 사람이 있나 봐요.”
이든이 센서값을 두 번 확인했다. “오차일 수 있습니다.”
“기계에 물으면 답한다면서요.”
“기계도 틀려요.”
라희는 샘플의 섬유를 투명판에 놓았다. 작은 조각이 온실 조명 아래서 펼쳐지며 한쪽으로 기울었다. 방향은 폐쇄 구역을 향했다. 그녀는 작업대에 놓인 미니 분광기를 가져왔다. 초록 성분은 지구 토양에 사는 균근과 비슷했지만, 이곳에선 검출될 이유가 없었다.
도경은 출입 단말기의 잠금 카드를 들고 다가왔다. “라희 씨, 폐쇄 구역 쪽에 갈 생각이면 먼저 내 허가를 받아요.”
“필터 경고가 떴습니다. 안전 담당자와 확인해야 합니다.”
“이든, 열지 마.”
이든의 턱이 굳었다. 그는 도경을 봤다가 라희가 든 샘플을 봤다. 도경은 그의 옛 동료가 격리 사고로 죽은 뒤, 불확실한 생물 반응을 가장 먼저 차단했다. 이든은 그 선택을 탓하지 않았다. 다만 이번 그래프는 단순한 오염의 모양이 아니었다.
“문 앞까지만 가겠습니다. 압력과 호흡만 확인하고 돌아오죠.”
“문을 열면 책임은 네가 져.” 도경이 말했다.
이든은 대답 대신 보호복을 꺼냈다. 라희도 그의 뒤를 따라 전실로 들어갔다. 보호복의 산소 잔량은 18분. 필터를 통과하는 공기가 차가웠다. 잠금 단말기에 이든의 카드가 닿자 도경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렀다. “안전 담당자 권한으로만 외벽 확인을 허가해. 내부 진입은 금지야.”
두 사람은 격리막 앞에 섰다. 유리 너머는 어두웠다. 라희는 손전등을 켰다. 마른 화분과 정지된 관수관 사이, 바닥에 젖은 흙이 한 줌 놓여 있었다. 흙 한가운데 완두 씨앗 하나가 반쯤 묻혀 있었다. 표면이 갈라지고 하얀 뿌리가 나와 있었다.
“저 씨앗은 여기 있으면 안 돼요.”
“맞아요.” 이든이 말했다. “그리고 저건 저절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유리 안쪽에서 작고 빠른 손이 나타났다. 누군가 흙을 덮으려다 두 사람을 보고 멈춘 것이다. 라희는 경보 버튼에 손을 올렸다. 손이 다시 움직였다. 작은 종이를 유리에 붙였다. 글씨는 숨결에 흔들렸다.
‘싹이 트면 내보내 주세요.’
이든이 격리 통신기를 켰다. “내부 인원, 이름과 호흡 상태를 말해.”
유리 너머의 아이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씨앗 옆에 손바닥을 대고, 고개를 숙였다. 라희는 자기 손 안에 든 샘플 봉투를 보았다. 섬유 조각은 이제 완전히 말라 있었다. 폐쇄 구역 안쪽에서 경고등이 켜졌다. 필터 효율이 40퍼센트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도경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둘 다 후퇴해. 지금부터 격리문을 잠근다.”
라희는 유리에 손을 대지 않은 채 아이의 눈을 보았다. 아이는 입모양으로 무언가를 말했다.
“엄마가 아직 여기 있어.”
“엄마가 아직 여기 있어.”
라희의 손가락이 경보 버튼에서 멈췄다. 유리 너머 아이는 입을 다물고 손바닥을 들었다. 손목에는 낡은 산소 패치가 붙어 있었고, 바코드가 절반 벗겨져 있었다. 이든이 먼저 통신기를 가져갔다.
“노아, 우리 목소리는 들리지? 네가 혼자 있다는 건 확인했어. 다치거나 숨쉬기 힘들면 손을 들어.”
아이는 손을 들지 않았다. 대신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괜찮다는 뜻인지, 묻지 말라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라희는 유리에 손가락을 대고 자기 이름을 천천히 썼다. 박라희. 아이는 손가락으로 글씨를 따라 썼다가, 손바닥으로 지워 버렸다. 대화할 마음은 없는 모양이었다.
이든은 산소 센서에 작은 경고 스티커를 붙였다. 예상 잔량은 한 시간보다 길었다. 숨을 쉬는 사람이 있다는 건 분명했지만, 아이가 어디서 물과 음식을 얻는지는 불명확했다. 라희는 도경에게 문을 잠그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도경은 잠금 권한을 유지하되, 열지는 않겠다고 답했다. 조건은 분명했다. 산소 수치가 한 번 더 떨어지면 격리 구역은 완전히 차단한다.
라희는 농장 통로를 따라 작은 카메라를 밀어 넣었다. 카메라가 화분 옆을 지나자 아이는 렌즈를 쳐내지 않고, 대신 카메라 앞에 나뭇잎 하나를 놓았다. 잎의 뒷면에는 연필로 숫자가 적혀 있었다. 17, 18, 19. 날짜인지 수확량인지 알 수 없었다. 라희가 화면을 확대하는 동안 이든은 입구 필터를 다시 계산했다. 격리막에 구멍을 내지 않고도 사람 하나가 드나들 만한 정비 덕트는 있었다. 그러나 그 덕트는 종자 저장고를 통과했다.
“아이는 4년 전 사고 뒤 들어왔을 수 있어요.” 라희가 말했다.
도경의 얼굴에 짧은 표정이 스쳤다. “그때 폐쇄 구역에는 아무도 없었어.”
“누가 확인했죠?”
“내가.”
“그럼 확인을 다시 해야겠네요.”
도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금 카드에 손을 올린 채 한참 서 있었다. 온실의 식물들은 새벽 바람을 받으며 흔들렸고, 잎끝의 물방울이 작은 구슬처럼 떠올랐다. 농장 수확량이 걸린 일과 한 아이의 호흡이 같은 화면에 나란히 표시됐다. 라희는 둘 중 하나를 먼저 선택하지 않고, 남은 종자를 세기 시작했다. 사라진 완두 하나. 실종된 아이 한 명. 그리고 아직 이름을 모르는, 살아 있는 뿌리 한 조각.
이든은 아이의 대답을 들은 뒤에도 잠금 버튼을 내리지 않았다. 대신 통신 채널을 녹음하지 않도록 바꿨다. “내 이름은 이든이야. 전에 여기 들어온 적 있어. 오늘은 문을 열지 않고 네가 말하는 것만 들을게.”
노아는 그 말을 믿지 않는 눈으로 바라봤다. 라희는 아이가 원하지 않으면 대화를 끝내겠다고 덧붙였다. 잠깐 침묵이 흐른 뒤, 노아는 벽에 붙인 종이를 떼어 뒤집었다. 뒷면에 ‘물, 음식, 씨앗’ 세 단어가 적혀 있었다. 아이가 원하는 것은 구조 약속이 아니라 살아갈 물건이었다. 라희는 카메라를 바닥에 놓고, 물주머니와 밀봉 식량을 카메라 앞으로 밀었다. 노아는 그것을 주워 들었다. 봉지를 뜯기 전에 유통기한을 확인하는 행동이 낯설 만큼 익숙했다.
“지금은 문을 안 열게.” 라희가 말했다. “대신 내일 다시 물어볼게. 그때도 네가 원하면 방법을 찾자.”
노아는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물주머니를 놓지 않았다. 이든이 필터 수치를 확인하는 사이, 라희는 생태 센서 그래프를 저장했다. 산소 소비의 파형은 밤마다 반복됐다. 누군가 폐쇄 구역에서 잠들고 깨어나는 리듬이었다. 그 아이가 얼마나 오래 혼자였는지, 기록만으로는 알아낼 수 없었다.
노아는 카메라가 돌아가기 전에 손가락으로 숫자를 하나 더 썼다. 20. 네 번째 발아 날짜였다. 그는 종이를 물주머니 아래에 숨겼다. 라희는 그걸 빼앗지 않았다. 숫자가 아이의 생존 일수일 수도 있고, 씨앗을 돌본 날일 수도 있었다. 정답을 묻는 대신, 그녀는 내일 같은 시간에 다시 확인하겠다고 말했다. 그 약속은 문을 연다는 약속보다 작았지만, 지킬 수 있는 약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