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주세요, 드래곤이 너무 집착해요

5화: 레어 청소 1일 차 보고서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마주친 것은 번쩍이는 금빛 눈동자였다.
천장도 아니었고 동굴 벽도 아니었다. 내 코앞 반 뼘 거리에서 이글거리는 거대한 파충류의 동공이었다.
"으악!"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뒤통수가 차가운 보물 상자 모서리에 쿵 부딪혔다.
[일어났군.]
카엘루스는 인간형 모습을 한 채 내 침상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은금빛 머리칼이 어깨 아래로 쏟아져 내렸고 턱을 괸 손가락 끝에는 희미한 금빛 비늘이 돋아나 있었다.
"왜 남의 얼굴 바로 위에서 그러고 계세요? 심장 떨어질 뻔했잖아요!"
[네 숨소리가 얕았다.]
카엘루스는 미간을 찌푸린 채 태연하게 대답했다.
[인간은 수면 중에도 숨이 끊어지는 연약한 생물이라고 들었다. 어제 독초의 즙을 삼킨 탓에 아침이 되기 전 재로 변했을까 확인했을 뿐이다.]
"멀쩡히 숨 쉬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설마 밤새 거기 계셨어요?"
[짐은 드래곤이다. 며칠 밤쯤 깨어 있는 것은 숨 쉬는 것보다 쉽다.]
그는 어제 했던 말을 문자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식사 때도 잠들 때도 곁에 있겠다더니 정말로 밤새 침상 머리맡을 지킨 모양이었다.
등줄기에 서늘한 식은땀이 흘렀다. 최강 드래곤의 보살핌이라기보다는 거대한 맹수가 언제 먹이를 덮칠지 감시하는 쪽에 가까웠다.
"아무리 그래도 사생활이라는 게 있잖아요."
[사생활?]
카엘루스가 코웃음을 쳤다.
[짐의 둥지 안에서 숨을 쉬는 미물이 입에 담을 단어가 아니군. 네 목숨은 짐의 소유다. 관리자가 죽으면 짐의 레어가 다시 먼지 구덩이로 돌아간다.]
말은 오만하게 하면서도 그의 시선은 내 손목에 머물러 있었다. 어제 금빛 몽상초의 즙이 닿았던 자리를 집요하게 살피는 눈치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굳은 어깨를 가볍게 돌렸다.
"좋아요. 드래곤님이 저를 지키고 싶어 안달이 난 건 잘 알겠어요."
[안달이 난 적 없다.]
"그럼 그 넘치는 열정을 건설적인 곳에 쓰죠. 오늘은 계획을 세워야 하거든요."
나는 어제 구해 온 넓적한 평면 석판과 하얀 석회 분필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원룸 자취 시절 좁아터진 방을 구역별로 나누어 정리하던 노하우를 발휘할 때였다.
카엘루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석판을 내려다보았다.
[그 돌멩이는 또 무엇이냐.]
"레어 구역 분할표예요."
[구역 분할?]
"네. 언제까지 발 닿는 대로 먼지를 털고 아무 풀이나 만질 수는 없잖아요. 어제 일로 확실히 배웠어요. 이 동굴은 너무 넓고 위험한 물건과 안전한 물건이 뒤섞여서 대책이 없어요."
나는 분필을 쥐고 석판 위에 커다란 사각형을 그렸다. 그리고 능숙한 솜씨로 선을 그어 네 개의 칸으로 나누었다.
"자 보세요. 1구역은 침소 및 보물 호드 구역이에요. 드래곤님이 주무시고 보석을 쌓아 두는 곳이죠. 여기는 반사광과 먼지 관리가 핵심이에요."
카엘루스는 턱을 괸 채 석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2구역은 식량 저장고예요.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재료와 드래곤님 전용 식량을 철저히 격리하고 이름표를 붙일 거예요. 3구역은 동굴 입구와 외부 거래 구역이고요. 오늘 해 지기 전에 이안 씨가 약초를 가져오기로 한 장소예요."
[그 하찮은 약초상의 이름은 굳이 칸에 적지 않아도 된다.]
카엘루스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기록은 정확해야 하거든요. 그리고 마지막 4구역."
나는 석판의 가장 깊은 구석 칸에 빗금을 빽빽하게 쳤다.
"식량 저장고 뒤편 심층 통로예요. 어제 이안 씨가 준 서리꽃을 까맣게 썩힌 그 검은 안개의 발원지요."
카엘루스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인간이 감히 짐의 둥지에 선을 긋고 규칙을 정하려 드는군.]
"규칙이 없으면 제가 죽어요. 제가 죽으면 보석 정리는 누가 하고 산양 고기 스테이크는 누가 구워요?"
카엘루스는 입을 다물었다.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얼굴이었다.
나는 쐐기를 박듯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위대한 골드 드래곤의 레어라면 세상에서 가장 체계적이고 눈부셔야 하잖아요. 쓰레기장 같은 소굴에서 주무시는 건 드래곤님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죠."
[……말은 청산유수로군.]
카엘루스가 콧김을 훅 내뿜었다. 뜨거운 바람에 앞머리가 흩날렸다.
[하지만 4구역은 안 된다. 그곳은 네가 발을 들일 곳이 아니다.]
"그럼 드래곤님이 같이 가 주시면 되잖아요. 다섯 걸음 안에서 지켜보겠다고 하신 건 드래곤님이었어요."
나는 석판을 번쩍 들어 올려 카엘루스의 가슴팍에 내밀었다.
"우선 4구역 입구부터 확인하러 가요. 안개가 어디까지 번졌는지 알아야 차단선을 치든 청소를 하든 하니까요."
카엘루스는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발을 디딜 때마다 은금빛 마력이 바닥을 스치며 잔잔한 파동을 일으켰다.
식량 구역 뒤편은 평소에 가 본 적이 없는 미지의 공간이었다.
선반들이 늘어선 구역을 지나자 천장이 점점 낮아졌고 습하고 서늘한 공기가 피부를 찔렀다. 발밑의 바위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으며 틈새마다 끈적한 검은 이끼가 달라붙어 있었다.
코를 찌르는 것은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쇠 녹슨 냄새였다.
선반 아래에서 피어오르던 검은 안개는 벽면의 갈라진 틈을 따라 실타래처럼 이어져 있었다.
카엘루스가 내 앞을 가로막아서며 손을 들어 올렸다.
[물러서라. 태워 버리겠다.]
그의 손끝에서 맹렬한 금빛 화염이 소용돌이쳤다. 당장이라도 동굴 안쪽을 향해 거대한 불기둥을 뿜어낼 기세였다.
"잠깐만요! 멈춰요!"
나는 질겁하며 그의 소매를 덥석 붙잡았다.
"동굴 안에서 그렇게 불을 질렀다가 천장 무너지면 어쩌려고요! 안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태우면 유독 가스가 이쪽으로 다 밀려와요!"
[짐의 화염은 모든 불순물을 정화한다.]
"바위까지 녹여서 퇴로를 막으면 그게 정화예요? 사고지!"
카엘루스는 불꽃을 거두지 않은 채 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내 손아귀에 잡힌 옷자락을 억지로 빼내지는 않았다.
그는 짧게 혀를 차며 불길의 크기를 손톱만 하게 줄였다.
[네 잔소리는 브레스보다 시끄럽군.]
"살고 싶어서 그래요. 불 끄지 말고 조명으로만 써 주세요. 벽 쪽을 비춰 봐요."
카엘루스가 투덜거리며 손을 벽 쪽으로 뻗었다. 작은 불꽃이 어둠을 밀어내자 젖은 석벽의 표면이 드러났다.
벽면에는 자연적으로 생긴 균열 외에도 인위적인 흔적이 가득했다.
"어…… 이건 글씨인가요?"
이끼를 긁어내자 돌벽 깊숙이 파인 문양이 나타났다. 방패 모양 테두리 안에 날개를 펼친 매와 왕관이 새겨져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바닥의 굳은 진흙 위에는 희미하지만 분명한 신발 자국들이 찍혀 있었다. 드래곤의 발톱이 아니라 굽이 있는 인간의 가죽 장화 자국이었다.
"인간의 발자국이에요. 그것도 한두 사람이 아니에요."
카엘루스는 문양을 내려다보더니 차가운 비소를 흘렸다.
[카르반의 날개로군.]
"카르반이요?"
[수백 년 전 이 산맥 아래에 있던 인간 왕국이다. 지금은 멸망하여 흔적조차 남지 않았지.]
카엘루스의 목소리에는 깊은 경멸과 피로가 묻어 있었다.
[그 왕국의 지배자는 짐의 발밑에 기어와 영원한 번영과 불사의 힘을 구걸했다. 그리고 바친 것이 그 역겨운 검은 상자였지.]
"검은 공물함 말씀이세요?"
[그래. 이 통로는 놈들이 짐의 허락도 없이 둥지 밑바닥을 파고들어 공물을 밀어 넣었던 쥐구멍이다.]
카엘루스는 벽에 새겨진 매의 문양을 차가운 눈길로 훑었다.
[탐욕에 눈이 먼 인간들은 상자를 바치고 짐의 은혜를 입었다며 기뻐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욕망에 잡아먹혀 왕실 전체가 피바다로 끝났다. 인간이란 언제나 그렇다. 바치고 탐하고 배신하지.]
그의 황금빛 눈동자에 언뜻 스친 것은 단순한 오만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의 위선과 배신을 목격하며 쌓인 짙은 환멸과 외로움이었다. 천 년 동안 이 거대한 동굴에 홀로 틀어박혀 쓰레기더미 속에서 잠만 청했던 이유가 어렴풋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굳은 발자국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손을 털고 일어섰다.
"저는 배신 안 해요."
카엘루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헛소리냐.]
"배신할 시간도 체력도 없다고요. 당장 오늘 치워야 할 먼지가 산더미고 저녁에는 이안 씨한테 약초 받아서 정리해야 하는데요."
[…….]
"그리고 전 탐욕 같은 거 없어요. 그냥 깨끗한 방에서 밥 제때 먹고 안 아프게 자고 싶을 뿐이에요."
카엘루스는 한참 동안 대답 없이 나를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너무 깊어서 괜히 목덜미가 간지러웠다.
"어쨌든 이 통로는 완전히 봉쇄해야겠어요. 안개가 더 새어 나오지 못하게 돌로 막고 경고문을 붙이죠."
나는 챙겨 온 석회 분필로 바닥에 굵은 가로선을 그었다.
<4구역 위험 통로. 오염 안개 발생지. 허가 없는 접근 절대 금지.>
주변에 굴러다니던 커다란 금괴와 돌덩이를 끌어모아 임시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카엘루스는 팔짱을 낀 채 그 꼴을 보더니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웅웅거리는 마력과 함께 금빛 결계막이 쳐지며 바리케이드 위를 덮었다.
[짐의 마력을 더했다. 안개가 이 선을 넘지는 못할 것이다.]
"협조적인데요? 4구역 조치 완료예요."
나는 석판 구역표의 4구역 칸에 동그라미를 크게 쳤다.
어느덧 동굴 입구 쪽에서 붉은 노을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약속했던 일몰 시간이었다.
우리는 3구역 입구로 이동했다. 레어 바깥의 서늘한 바람과 함께 누군가 조심스럽게 바위를 밟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 에블린 아가씨?"
이안 로웰이었다. 그는 커다란 가죽 배낭과 묵직한 약초 상자를 양손에 든 채 바위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약속 시간보다 반 각 늦었다.]
카엘루스가 내 등 뒤 정확히 다섯 걸음 거리에서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에 이안은 다리를 덜덜 떨며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죄송합니다! 험한 산길이라 짐을 지고 오느라 시간이 조금 걸렸습니다!"
"괜찮아요 이안 씨. 안 늦었어요. 저분이 원래 성격이 급해서 그래요."
[짐은 성격이 급하지 않다. 인간이 게으를 뿐이다.]
카엘루스가 바로 뒤통수에서 쏘아붙였지만 나는 가볍게 무시하고 이안에게 다가갔다.
이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상자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정갈하게 건조된 약초들이 칸막이마다 나뉘어 담겨 있었다.
"어제 말씀하신 해독용 서리꽃 말린 것과 식용으로 쓸 수 있는 달빛쑥입니다. 그리고 고기 요리에 잡내를 없애 주는 향초도 몇 가지 챙겨 왔습니다."
"상태가 정말 좋네요."
"그리고 이건 저희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약초 도해 필사본입니다. 독초와 식용 풀의 그림이 상세히 그려져 있어서 구역 정리하실 때 도움이 될 겁니다."
이안이 건넨 낡은 가죽 책을 펼쳐 들자 카엘루스의 시선이 불화살처럼 날아와 책장을 꿰뚫을 듯 박혔다.
나는 구역표 석판을 꺼내 들고 2구역 식량 목록에 약초의 이름을 하나씩 받아 적었다.
"이안 씨 혹시 카르반이라는 왕국에 대해 아세요?"
내 물음에 이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카르반이요? 아주 오래된 전설 속 왕국 말씀이십니까?"
"네. 아까 안쪽 통로에서 그 왕국의 문장을 봤거든요."
이안은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특히 등 뒤에 버티고 선 카엘루스의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마을 노인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먼 옛날 카르반의 탐욕스러운 왕이 드래곤의 힘을 탐내 재앙을 부르는 검은 상자를 바쳤다고요. 하지만 상자를 바친 그날 밤 왕궁 안에서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고 다음 날 아침 왕국 전체가 잿더미로 변해 멸망했다고 합니다."
"잿더미로요?"
"네. 마을 사람들은 위대한 골드 드래곤님의 노여움을 사서 천벌을 받은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이 산에 함부로 오르지 못하는 것이고요."
카엘루스가 코웃음을 쳤다.
[천벌은 무슨. 제 분수에 넘치는 힘을 다루려다 상자에서 뿜어져 나온 욕망에 질식해 서로를 물어뜯었을 뿐이다. 짐은 그 추악한 꼴을 보지도 않았다.]
이안은 기겁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렇군요! 역시 위대한 분께서는 그런 하찮은 인간들의 자멸 따위에 관여하지 않으셨던 거군요!"
필사적인 아부였다. 카엘루스는 기분이 썩 나쁘지 않은지 턱을 치켜들었다.
나는 허리춤에서 미리 챙겨 온 작은 주먹만 한 은광석 덩어리를 꺼내 이안에게 건넸다.
"오늘 가져오신 약초와 책값이에요."
이안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이건 순도 높은 천연 은광석 아닙니까! 이렇게 귀한 것을 주셔도 됩니까?"
"레어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중 하나예요. 정당한 노동의 대가니까 받으세요. 대신 내일도 안전한 식재료와 양념류를 구해다 주셔야 해요."
[짐의 은을 함부로 퍼주는군.]
카엘루스가 불만을 터뜨렸지만 나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드래곤님은 은화 같은 건 보석 축에도 안 끼워 주시잖아요. 금화랑 다이아몬드만 좋아하시면서 치사하게 굴지 마세요."
[치사하다고?]
카엘루스가 기막혀하는 사이 이안은 은광석을 소중하게 품에 넣고 연신 허리를 굽신거렸다.
"감사합니다 에블린 아가씨! 내일은 인간들이 먹는 제대로 된 소금과 곡물 가루도 구해 오겠습니다!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 내려가겠습니다!"
이안은 카엘루스의 서슬 퍼런 눈빛을 피해 쏜살같이 산길을 뛰어내려 갔다.
동굴 입구에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밤이 깊어지자 레어 안은 서늘한 어둠에 잠겼다.
나는 모닥불 대신 카엘루스가 피워 준 작은 불꽃 화로 옆에 엎드려 양피지 한 장을 펼쳤다. 낮 동안 석판에 메모했던 내용을 깔끔하게 정리한 최종 보고서였다.
"드래곤님. 이리 와서 앉아 보세요."
카엘루스는 귀찮다는 듯 어슬렁거리며 다가와 내 맞은편 보물 상자에 걸터앉았다.
[또 무슨 짓을 꾸미는 것이냐.]
"꾸미는 게 아니라 보고서 결재받는 거예요."
[결재?]
"네. 오늘의 청소 실적 보고서요."
나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양피지를 들어 올렸다.
"레어 청소 1일 차 보고서. 보고자 에블린."
카엘루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첫째 1구역 침소. 보석 호드 외곽의 묵은 먼지 1차 제거 완료. 붕괴 위험이 있던 사파이어 탑을 완만한 경사로 재배치하여 수면 안전 확보. 둘째 2구역 식량 저장소. 위험 등급별 선반 분류 완료. 이안 로웰과의 거래를 통해 안전한 서리꽃 및 식용 허브 확보. 식물 도해 필사본 확보로 내일부터 독초 오인 사고 방지 가능."
카엘루스는 턱을 괸 채 묵묵히 내 목소리를 들었다.
"셋째 4구역 심층 통로. 검은 안개 확산 경로 확인 완료. 바리케이드 및 드래곤님의 마력 결계로 1차 봉쇄 성공. 고대 카르반 왕국 문장 확인으로 오염원 정보 일부 확보."
"그리고 마지막 항목이에요."
나는 카엘루스를 똑바로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의 레어 주인 협조 태도 평가."
[……뭐?]
카엘루스의 눈동자가 커졌다.
"평가 점수는 100점 만점에 70점입니다."
[칠십 점?]
카엘루스의 목소리가 위험하게 낮아졌다.
[짐의 점수가 고작 칠십 점이란 말이냐? 짐이 밤새 네 침상을 지켰고 그 통로에 결계까지 쳐 주었거늘!]
"아침부터 얼굴 들이밀어서 심장마비 올 뻔하게 만든 감점 10점. 브레스로 동굴 날려 버리려고 했던 감점 10점. 이안 씨한테 쓸데없이 으르렁거려서 겁준 감점 10점이에요."
[짐을 하찮은 종이쪽지로 재단하다니 제정신이 아니군!]
"하지만 결계 쳐 주신 건 훌륭했어요. 불꽃 조명도 딱 적당했고요. 그래서 70점이나 드린 거예요. 내일은 더 잘하시면 돼요."
나는 양피지 하단을 톡톡 두드렸다.
"자 여기 서명해 주세요. 결재 인장이 있어야 내일 2일 차 청소를 시작할 수 있어요."
카엘루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세상 그 누구도 골드 드래곤에게 보고서를 들이밀고 서명을 요구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당장이라도 양피지를 불태워 버릴 것처럼 노려보더니 쯧 하고 혀를 찼다.
[어리석은 인간의 유희에 어울려 주는 것도 오늘뿐이다.]
카엘루스가 손가락을 뻗었다. 그의 손톱 끝에서 작은 금빛 불꽃이 피어오르더니 양피지 오른쪽 아래에 닿았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종이에 섬세한 드래곤 비늘 문양의 낙인이 새겨졌다.
완벽한 결재 도장이었다.
나는 만족스럽게 양피지를 품에 안았다.
"감사합니다. 내일은 1구역 바닥에 쌓인 묵은 때를 벗겨낼 거예요. 물걸레질을 하려면 손이 열 개라도 모자라겠어요."
내가 기지개를 켜며 한숨을 내쉬자 카엘루스가 한심하다는 듯 나를 내려다보았다.
[인간이란 참으로 비효율적인 생물이군. 그깟 먼지 따위 손으로 일일이 닦아내다니.]
"그럼 어떡해요? 빗자루질만으로는 끈적한 때가 안 지워지는데요."
카엘루스가 거만하게 코웃음을 치며 옷자락을 펄럭였다.
[짐의 마법 한 번이면 3구역 전체의 먼지 따위는 1초 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마법이요? 그런 편리한 게 있어요?"
[내일 똑똑히 보아라. 위대한 드래곤의 권능이 무엇인지.]
카엘루스는 의기양양하게 돌아누우며 눈을 감았다.
나는 벽에 기댄 채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왜인지 모르게 불안한 예감이 등줄기를 스치고 지나갔다.
드래곤의 거대한 마법과 청소라니.
내일 하루도 결코 조용히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