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법 도서관의 심야 사서

3화: 어린 흑룡의 요구
통로 안쪽의 공기는 얼음물처럼 차가웠다.
벽면에 붙은 수천 장의 반납표 사이로 검은 잉크가 번지고 있었다. 종이 표면을 타고 흘러내린 글자는 분명하고 선명했다.
‘다음 반납자: 한서윤.’
한이든은 숨을 멈추고 그 이름을 바라보았다.
손에 쥔 찢어진 책갈피에서 미약한 온기가 전해졌다. 검은 종이 위에 그어진 은색 선은 해온시 도서관 서랍 속에 있던 것과 같은 모양이었다.
“서윤아.”
이든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을 더 내딛으려 했다. 통로 너머에서 빗소리가 들렸다. 비에 젖은 유리문 소리와 횡단보도의 신호음이 어둠 속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그때 차가운 손가락이 이든의 옷깃을 강하게 잡아챘다.
“멈춰!”
미라 벨이 이든의 팔을 뒤로 끌어당겼다.
“반납 통로에 발을 함부로 들이지 마. 그 안쪽은 네가 아는 현실이 아니야.”
“하지만 서윤이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집으로 이어지는 통로일지도 모릅니다.”
“착각이야. 반납 통로는 주인을 잃은 기록의 미련이 고이는 곳이야. 네가 가진 불안과 기억이 글자로 맺힌 것뿐이라고.”
미라가 종이 새 한 마리를 허공에 날렸다. 종이 새가 잉크가 번진 벽면을 스치자 ‘한서윤’이라는 이름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벽면에는 다시 비어 있는 반납 사각형만 남았다.
이든은 가슴 한구석이 텅 비어 버린 듯한 허탈감을 느꼈다.
“방금 그건 환영이었습니까?”
“환영이라기보다는 메아리에 가까워. 누군가 지구에서 그 책갈피를 만졌고 너는 그 미련에 반응한 거야. 하지만 지금 네가 통로 안으로 뛰어들면 좌표가 완전히 꼬여서 영영 돌아갈 수 없게 돼.”
미라는 단호한 표정으로 통로 입구의 청동 손잡이를 돌렸다.
철컥.
통로 문이 닫히며 빗소리와 낯선 도시의 소음이 완전히 차단되었다.
이든은 주머니 속에 든 책갈피 파편을 꼭 쥐었다. 메아리라는 말은 서윤이 지구에서 여전히 자신을 찾고 있다는 뜻이었다.
‘살아서 기다리고 있어.’
그것만으로도 손끝의 떨림을 멈출 이유는 충분했다.
그 순간 바닥이 심하게 흔들렸다.
우르르릉!
원형 서고 전체가 거대한 생물처럼 요동쳤다. 공중에 매달려 있던 수천 개의 유리등이 격렬하게 흔들렸고 높은 서가에서 미분류 책 몇 권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지진입니까?”
“도서관에는 지진 같은 거 없어!”
미라의 청록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건…… 손님이 억지로 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충격이야.”
심야 서고의 거대한 외벽 너머에서 굉음이 터졌다. 묵직한 청동문이 부서지듯 열리는 소리와 함께 맹렬한 열풍이 복도를 타고 들이닥쳤다.
공기가 단숨에 메말라 갔다. 타는 냄새와 유황 냄새가 섞인 검은 연기가 서가 사이로 번졌다.
“안내 데스크로 가!”
미라가 소리치며 앞장서 달렸다.
이든은 품 안의 검은 책을 단단히 붙들고 미라의 뒤를 쫓았다. 손등의 붉은 인장이 심장 박동에 맞춰 강하게 고동쳤다. 사서의 인장이 위험을 경고하고 있었다.
중앙 로비에 도착했을 때 서가 사이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불꽃이 일렁이는 통로 한가운데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칠흑 같은 검은 장발이 거친 바람에 흩날렸고 눈동자는 맹수의 것처럼 번뜩이는 금빛 세로 동공이었다. 짙은 흑요석 색의 로브를 걸친 그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풍기는 기운은 전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남자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대리석 바닥에 검은 그을음이 새겨졌다.
“새 사서가 왔다는 소리를 들었다.”
낮게 깔린 목소리가 공간 전체를 울렸다. 목소리 자체에 쇳소리와 불꽃의 파열음이 섞여 있었다.
남자의 오른손이 로브 밖으로 드러났다. 손목부터 팔꿈치까지 시커멓게 눌어붙은 사슬 모양의 화상 흉터가 끔찍하게 얽혀 있었다.
미라가 망토를 펄럭이며 이든의 앞을 가로막았다.
“벨카르 아르드라코. 도서관 안에서 화염을 일으키는 건 중대한 규율 위반이야!”
고대 흑룡의 왕 벨카르.
벨카르는 미라의 경고 따위는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규율? 내 알 바 아니다. 전임 관장이 사라진 뒤로 이곳은 내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오늘 밤 새 심야 사서가 임명되었다고 들었다.”
벨카르의 시선이 미라의 뒤에 선 이든에게 꽂혔다.
금빛 세로 동공이 이든의 얼굴과 손등에 새겨진 붉은 인장을 훑었다.
“네놈이냐?”
숨이 막힐 듯한 압박감이 이든의 온몸을 짓눌렀다. 공기가 너무 무거워서 폐 안으로 산소가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지구의 공공도서관에서는 결코 마주할 수 없는 압도적인 포식자의 기운이었다.
“……그렇습니다. 임시 심야 사서 한이든입니다.”
이든은 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벨카르가 손을 뻗었다. 그의 손톱 끝에서 검은 불꽃이 튀었다.
“장황한 인사는 필요 없다. 봉인된 금서고를 열어라. 내 누이의 노래가 담긴 책을 지금 당장 내놔.”
“금서 열람은 불가합니다.”
미라가 종이 새들을 허공에 띄우며 소리쳤다. 종이 새들이 허공에서 은빛 방어막을 엮어 냈다.
“금서는 사서 인장과 두 명의 증인이 필요해! 신입 사서의 권한으로는 열 수 없어!”
“닥쳐라!”
벨카르가 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콰아앙!
돌풍 같은 검은 불길이 은빛 방어막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종이 새들이 잿가루가 되어 바닥으로 흩어졌다.
미라가 뒤로 밀려나며 책상 모서리에 부딪혔다.
“크윽……”
벨카르는 미라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이든에게 다가왔다. 그의 발걸음마다 서가의 책들이 비명을 지르며 제멋대로 펼쳐졌다.
“두 번 말하지 않는다. 금서를 내놓지 않는다면 이 서가째로 태워 버리겠다. 도서관이 불타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니까.”
벨카르의 오른손이 이든의 목덜미를 향해 뻗어 왔다.
살을 태울 듯한 열기가 뺨에 닿았다.
이든은 본능적으로 물러서려던 발을 멈췄다. 도망쳐 봤자 끝없는 서가 어디에도 피할 곳은 없었다.
그의 시선이 벨카르의 오른손에 머물렀다. 살을 파고든 사슬 화상. 그리고 맹수처럼 번뜩이는 금빛 눈동자 깊은 곳에 서린 지독한 초조함.
그것은 단순한 파괴자의 눈이 아니었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벼랑 끝에 몰린 자의 눈이었다.
이든은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빳빳한 종이 한 장을 꺼내 벨카르와 자신 사이의 데스크 위에 탁 올려놓았다.
“책을 빌리기 위해서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벨카르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뭐라고?”
“이곳은 도서관입니다. 손님이 왕이든 신이든 도서관에 들어온 이상 책을 대출하기 위해서는 대출증을 작성해야 합니다.”
이든은 손등의 붉은 인장을 카운터 위에 얹었다.
인장이 맑은 푸른빛을 뿜어내며 데스크 주변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만들었다. 벨카르의 검은 불길이 경계선에 닿자 얇은 연기를 내며 사그라들었다.
도서관 내부에서는 손님이 사서를 직접 해칠 수 없다는 규칙이 작동하고 있었다.
벨카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일개 사서 놈이 내게 명령하는 거냐?”
“명령이 아니라 안내입니다.”
이든은 펜을 들어 대출증 옆에 놓았다.
“원하시는 책이 금서이든 일반 도서이든 손님의 소원이 기록되지 않은 대출증으로는 어떤 서가도 열리지 않습니다.”
미라가 잿더미 속에서 몸을 일으키며 숨을 헐떡였다.
“이든…… 그자는 용이야. 자극하지 마……”
하지만 벨카르는 이든을 태워 버리는 대신 카운터 위의 대출증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도서관의 법칙은 절대자에게도 절대적이었다. 힘으로 억지를 부릴 수는 있어도 도서관의 책을 온전히 손에 넣으려면 사서의 승인이 필요했다.
벨카르는 거친 숨을 내쉬며 데스크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쾅!
“누이의 자장가다. 내가 봉인했던 ‘용의 마지막 노래’. 그 책을 찾아내.”
벨카르의 검은 손가락이 대출증을 짓누르듯 쥐었다.
그의 손끝에서 잉크가 뿜어져 나오듯 대출증의 빈칸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현재의 소원: 용의 마지막 노래를 되찾는다.’
그 순간 이든의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손등의 인장이 뜨겁게 타오르며 서지안이 강제로 개방되었다.
환영 속에서 거대한 흑룡이 눈 덮인 절벽 위에서 포효하고 있었다.
그의 발밑에는 작은 은빛 용 한 마리가 차갑게 굳어 가고 있었다.
— 미안하다. 너를 지키려면 이 노래를 지워야만 했다.
흑룡은 자신의 가슴 비늘을 뜯어내며 울부짖었다. 그 비늘에 묶인 사슬이 작은 은빛 용의 목소리를 봉인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흑룡의 표정은 공포로 뒤틀렸다.
— 누이의 이름이…… 뭐였지? 내가 무엇을 잊은 거지?
환영이 깨어지며 현실의 열람실이 돌아왔다.
이든은 비틀거리며 책상 모서리를 붙잡았다. 서지안이 보여 준 것은 벨카르의 깊은 상처였다.
그는 단순히 노래를 찾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봉인해 버린 누이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릴까 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벨카르는 대출증을 거칠게 밀어붙이며 이든의 눈을 쏘아보았다.
“새벽 네 시까지다. 도서관이 문을 닫기 전까지 그 노래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네 손목의 인장째로 영혼을 불태워 버리겠다.”
벨카르가 몸을 돌려 열람실 구석의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그의 주변으로 검은 불꽃이 장벽처럼 둘러쳐졌다.
로비에는 타는 냄새와 무거운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미라가 절뚝거리며 다가와 대출증을 들여다보았다.
“‘용의 마지막 노래’…… 저건 7급 위험 금서야. 신입 사서가 열 수 있는 책이 아니야. 오르도 규율관이 알면 당장 출입 정지를 내릴 거야.”
“알고 있습니다.”
이든은 대출증에 적힌 문장을 손가락으로 가만히 쓸어내렸다.
‘용의 마지막 노래를 되찾는다.’
하지만 서지안이 읽어 낸 벨카르의 진짜 결핍은 그 문장 너머에 있었다.
“손님이 찾는 것은 노래라는 이름의 마법이 아닙니다.”
이든은 안경을 고쳐 쓰며 검은 책을 품에 안았다.
“이 대출증의 진짜 소원을 읽어야 합니다.”
새벽 네 시까지 남은 시간은 세 시간 남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