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관의 암호 서리

2화: 바람장에 적힌 이름
판각점은 항구의 뒷골목에 있었다. 복선은 주인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지만, 낡은 간판의 먹빛을 알아봤다. 그는 그곳에서 견습으로 일하며 판을 새긴 적이 있었다. 문은 잠겨 있었고, 안쪽에서 망치 소리가 났다.
송매는 문을 두드리기 전에 해안 마을의 이름을 적은 종이를 윤교에게 건넸다. 그 종이는 사절단에 보여 주지 말라고 했다. 윤교는 종이를 봉투에 넣고, 위치 대신 바람 방향만 적었다. 복선은 판각점 안에 있는 사람이 문서를 만든 장인이라면 어떤 질문을 할지 고민했다.
“왜 나한테 물어보죠?”
“당신은 판을 새겼고, 문서가 어디서 나왔는지 알아요.”
“그게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잖아요.”
“아니요. 그래서 직접 확인하려는 겁니다.”
복선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노인이 목판에 글자를 새기고 있었다. 그는 세 나라의 암호 문서를 만들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하지만 종이 끝의 눌림은 그의 인쇄소에서 쓰는 압착틀과 같았다. 그는 문서를 복제하라는 의뢰를 받았지만, 내용을 읽지 않았다고 말했다.
윤교는 누가 의뢰했는지 물었다. 노인은 매화관에 있던 외국 사절의 통역관이라고 답했다. 그 통역관의 이름은 강유진이었다. 송매가 놀라 노인을 바라봤다. 유진은 문서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원본을 복사해 세 사절단에게 같은 정보를 보내려 했을 수 있었다.
“그녀는 왜 그렇게 했을까요?”
노인은 문서의 암호를 풀면 세 사절단이 동시에 같은 해안으로 향하게 될 거라고 했다. 그들은 각자 상대방이 먼저 도착했다고 믿으면 군대를 보낼 수 있었다. 유진은 서로 다른 나라가 같은 문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충돌을 막으려고 복제본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누군가 그 복제본을 이용해 문서를 다시 바꿨을 수 있었다. 복선은 인쇄소에서 쓴 압착판의 가장자리가 잘려 있다고 확인했다. 노인은 그 부분을 손댄 적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판의 한쪽에 새로 깎인 자국이 있었다. 윤교는 판을 가져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모양만 그렸다.
노인은 자료를 넘기면 자신도 반역 혐의로 잡힐 수 있다고 걱정했다. 그는 외국 사절의 의뢰를 받았지만, 암호 내용은 몰랐다고 했다. 윤교는 그가 공개하고 싶은 범위를 물었다. 노인은 자신의 이름은 밝히지 않고, 판형과 의뢰 날짜만 알리겠다고 했다.
송매는 해안 바람장에 기록된 날짜와 인쇄소의 의뢰일을 비교했다. 세 포구에서 바람이 북쪽으로 바뀌던 날, 각 사절단의 배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유진은 그 움직임을 피난 신호로 바꾸려고 했던 듯했다. 지도 표식은 군대가 아니라 주민이 어느 만으로 이동해야 하는지 알리는 순서였다.
그들은 주민의 동의 없이 이 해석을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이미 세 사절단이 문서를 가지고 있었고, 서로 다른 해석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한 사절은 항구에 군대를 보내려 했고, 다른 사절은 문서를 위조라며 태우려 했다. 세 번째는 유진을 찾으려 사람을 보냈다.
윤교는 매화관으로 돌아가 각 사절단에게 암호 문서의 차이를 보여 주자고 했다. 송매는 그 자리에서 지도 전체가 드러나면 마을의 피난길도 위험해진다고 반대했다. 윤교는 위치를 지우고, 종이와 인쇄 흔적, 번역의 근거만 공개할 방법을 찾았다.
복선은 판각점 노인이 한 말을 다시 생각했다. 노인은 유진이 의뢰할 때 문서에 한 줄을 추가해 달라고 했지만, 자신은 그 요청을 거절했다고 했다. 그 문장은 ‘마을의 이름은 읽지 말고, 바람만 세어라’였다.
“그럼 암호 문서에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거군요.” 복선이 말했다.
“
관아 통역관이 판각점으로 찾아왔다. 그는 윤교에게 매화관으로 돌아와 문서를 넘기라고 명령했다. 서기관장이 윤교를 해임하고, 외교 문서에 손댄 혐의로 조사하겠다고 했다. 통역관은 송매에게 외국 사절과 내통한 책임을 물었다.
복선은 도망치려 했지만 문선처럼 단단한 송매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는 도망가면 어머니가 누명을 쓸 수 있다고 했다. 복선은 자신이 인쇄판을 복제한 사실을 공개하겠다고 결심했다. 다만 어머니의 이름은 문서에서 제외해 달라고 요청했다.
판각점 노인은 그들이 떠나기 전에 인쇄 장부를 보여 줬다. 그 장부에는 세 문서의 주문이 따로 기록되어 있었지만, 돈을 낸 사람은 하나였다. 그는 이름을 공개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각 의뢰가 같은 날 들어왔고, 그날 밤 유진이 매화관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증언하겠다고 했다.
송매는 문서의 인쇄 시점을 바람장의 기록과 대조했다. 복제본은 원본보다 이틀 늦게 만들어졌다. 이틀 사이 해안의 바람 방향이 바뀌어, 표식의 순서가 피난로가 아니라 상륙 순서처럼 보이게 됐다.
“누군가 일부러 바람장의 날짜를 지웠어요.”
그녀는 자신이 외국 사절에게 팔았던 지도의 사본을 떠올렸다. 원본에는 바람 변화와 마을의 피난길이 함께 있었지만, 사절에게는 바람만 제공했다고 믿었다. 그 사본에서 날짜가 잘린 이유를 확인해야 했다.
매화관 문 앞에 군인이 배치되어 윤교를 막았다. 그는 자신의 번역본을 건네지 않고, 통역관에게 해독 근거를 직접 읽어 줬다. 통역관은 번역이 조작이라며 그를 체포하려 했다.
그 순간 항구 쪽에서 작은 배가 급히 들어왔다. 배에 탄 어부는 바람장이 사라졌다며 송매를 찾았다. 주민들이 기록을 잃고, 배들이 바다로 나갈 때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외교관보다 먼저 바람장을 돌려받아야 했다.
송매는 관아로 갈지 마을로 갈지 선택해야 했다. 윤교는 그녀를 막지 않았다. 그녀는 바람장이 있는 곳으로 향했고, 복선과 윤교가 뒤따랐다. 그들이 도착한 방파제 아래에서 강유진의 신발 한 짝이 발견됐다.
신발 안쪽에는 세 번째 암호의 마지막 점과 같은 매듭이 묶여 있었다. 누군가 그녀가 바다로 갔다고 믿게 만들려는 흔적이었다.
송매는 신발을 주워 들지 않았다. 먼저 모래에 눌린 자국을 살폈다. 발자국은 물가로 이어지지 않고, 방파제 안쪽의 낮은 돌계단으로 돌아갔다. 신발은 오른발이었지만, 유진은 왼발에 더 무게를 싣고 걸었다. 그녀가 남긴 신호라면 발자국이 물을 향해야 했다.
윤교는 신발 안의 매듭을 풀지 않았다. 매듭은 유진이 역관 견습들에게 문서 봉투를 표시할 때 쓰던 방식과 닮았다. 그는 그녀가 죽었다고 추정하지 않고, 살아서 숨었다고 단정하지도 않았다. 그가 확인한 건 신발이 물가에서 발견됐다는 사실뿐이었다.
어부는 바람장이 없으면 배를 띄울 수 없다고 재촉했다. 송매는 바람을 직접 읽을 수 있지만, 언제 바람이 바뀌는지 마을 어른들의 기록과 맞춰야 한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이 지도를 팔아 위험을 만든 사실을 어부에게 털어놓았다. 어부는 당장 그녀를 용서하지 않았다. 대신 오늘 배가 출항하지 못하면 생선과 약재가 상할 수 있다고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바람장 복사본을 돌려받을 때까지 배를 묶어 두는 것뿐이에요.”
복선은 인쇄소에서 베낀 판형이 바람장과 연결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세 문서에 찍힌 작은 점이 바람의 방향을 나타내는 게 아니라, 배에 실린 돛의 종류를 표시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점은 해안의 방위가 아닌 마을의 위치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들은 방파제 아래 좁은 창고를 확인했다. 바람장 원본은 없었지만, 매화관에 보내려던 복사본이 상자 밑에 숨겨져 있었다. 상자는 잠겨 있지 않았다. 안에는 날짜가 잘린 종이와, 주민들이 손으로 적은 조수 기록이 들어 있었다.
윤교는 기록을 읽으며 특정 날짜에 바람이 바뀌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세 문서에 적힌 날짜는 서로 달랐지만, 같은 바람 방향을 표시하고 있었다. 암호를 만든 사람은 각국의 달력을 이용해 날짜를 달리 적고, 조수와 바람의 순서를 같게 맞췄다.
“세 나라가 함께 만든 문서일까요?” 복선이 물었다.
“아직은 모릅니다.” 윤교는 답했다. “서로 다른 달력에 같은 표식을 붙인 이유만 확인했어요.”
창고의 벽에는 손톱으로 긁은 글씨가 있었다. ‘매화관으로 가지 마라.’ 유진이 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송매는 글씨의 끝 획이 자기 지도 기호와 닮았다고 했다. 그녀는 유진에게 바람장 사본을 넘긴 적이 있었다.
“그녀가 여기 왔다면 왜 흔적을 남겼을까요?”
“누군가 따라오고 있었겠죠.”
어부는 창고 밖에서 낯선 사람을 봤다고 했다. 그는 매화관의 군인이 아니라 외국 사절의 하인이었다. 하인은 바람장을 가져간 뒤, 종이를 몇 장 태우고 떠났다. 어부는 무서워서 말하지 못했다. 배와 가족이 외국 상단에 빚을 지고 있었다.
송매는 어부에게 이름을 묻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증언할 수 있었다. 어부는 얼굴을 가리고, 물건을 가져간 사람의 걸음과 외투 색만 말하겠다고 했다. 복선은 그 묘사를 판각점에서 본 흰 장갑과 비교해도 같은 사람이라고 확정하지 않았다.
관아 통역관이 창고로 들어왔다. 그는 윤교에게 문서를 넘기라고 다시 요구했다. 이번에는 무장한 경비 두 명이 함께 왔다. 송매가 바람장 복사본을 내놓지 않자, 통역관은 그녀를 관아로 데려가겠다고 했다.
윤교는 자신도 문서 해독에 관여했다고 밝혔다. 복선은 인쇄판을 베꼈다고 인정했다. 어부는 바람장 원본이 아니라 복사본만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이 본 것을 말한 뒤 창고를 나갔다. 통역관은 그를 붙잡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돌아가자마자 어부의 배를 조사하겠다고 했다. 송매는 어부에게 먼저 가족을 안전한 곳으로 옮길 시간을 줘야 한다고 요구했다.
통역관은 군사 정보가 새어나갈까 우려된다고 했다. 윤교는 바람장의 내용은 주민의 생계 기록이지 외교관의 소유물이 아니라고 답했다. 그가 말하자 통역관은 왜 조선의 역관이 외국 사절의 문서를 방어하느냐고 물었다.
“누구의 문서인지보다, 누구에게 위험이 가는지 확인하고 있습니다.”
통역관은 잠시 침묵했다. 그가 처음 번역한 세 문서에는 해안 마을의 이름이 없었다. 이름을 지도에 옮긴 사람은 유진이었다. 그녀는 각 사절단이 같은 지점을 가리키더라도 목적을 단정하지 않도록, 주민의 피난 길을 따로 기록했다.
윤교는 그 기록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통역관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유진을 본 곳은 매화관의 정원이라고 했다. 그녀는 ‘남쪽 창고’에 가겠다고 했지만, 그곳은 지도에 없는 장소였다. 송매는 창고가 아니라 주민들이 쓰는 배의 정박지를 뜻한다고 알아들었다.
그들은 어부의 배를 타고 남쪽 정박지로 향했다. 바람은 거세졌고, 송매는 돛을 펼치지 말라고 했다. 물살이 배를 바위 쪽으로 밀었다. 복선은 노를 잡으려 했지만 손에 힘이 부족했다. 윤교가 두 사람과 함께 배를 안정시켰다.
정박지에 닿자 해안의 주민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유진이 사라진 게 아니라, 자신들을 다른 마을로 옮기는 길을 찾으러 갔다고 말했다. 어디로 갔는지는 알려 주지 않았다. 유진은 그들에게 위치를 외부에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은 윤교에게 해독 결과를 요구했다. 그는 포구를 공개하지 않고 바람의 순서와 위험만 알렸다. 주민들은 경계를 거두지 않되 피난로를 지킬 사람을 가족별로 정했다.
새벽에 정박지에 배 한 척이 들어왔다. 선수에는 강유진의 외투가 걸려 있었지만, 배 안에는 사람이 없었다. 돛 밑에 봉투 하나가 묶여 있었다. 봉투에는 윤교가 쓴 번역본과 같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다음 문서는 외교관이 아니라 고을 수령에게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