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의 몬스터 학자는 기사단을 지휘한다

2화: 짐꾼과 발자국
등 뒤에서 덜컹거리는 목재 궤짝의 무게가 척추를 짓눌렀다.
어깨를 파고드는 거친 삼베 끈 너머로 독초 방부액이 든 유리병들이 부딪쳐 달그락거렸다. 서준은 턱 끝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소매로 훔치며 묵묵히 흙길을 디뎠다.
"어이, 조교 양반! 걸음이 왜 그렇게 느려? 그러다 해 지기 전에 숲 근처에도 못 가겠어!"
말을 탄 채 대열 앞머리를 호위하던 상급 생도가 낄낄거리며 비아냥거렸다.
식량과 막사를 실은 보급 마차 세 대의 짐칸 절반이 비어 있었지만 하켄 교관은 출발 직전 서준의 짐을 전부 바닥에 내던졌다.
'현장 실습 보조라면 학술 기자재와 표본 채집용 방부제 궤짝은 제 손으로 지는 법이다. 무거운 짐을 져봐야 괴물 앞에서도 제 목숨 간수할 줄 알지.'
노골적인 괴롭힘이었지만 서준은 말없이 등짐을 멨다.
서준의 시선은 생도들의 비웃음이 아니라 마차가 지나간 바퀴 자국으로 향했다.
북부 가도의 흙은 건조했다. 며칠째 비가 오지 않아 메마른 모래먼지가 날렸으나 깊게 패인 바퀴 자국 밑바닥의 흙은 유독 검붉은 빛을 띠며 끈적하게 뭉쳤다.
'수액질이 섞여 있다. 가도 주변의 활엽수들이 정상적으로 수분을 순환시키지 못하고 있어.'
서준은 걸음을 옮기면서 손가락 끝으로 흙먼지의 점도를 가늠했다.
"저기…… 선생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낡은 가죽 조끼를 걸친 갈색 곱슬머리의 소녀가 서준의 궤짝 한쪽 모서리를 양손으로 살며시 받쳐 들고 있었다. 평민 장학생으로 선발된 신입 생도 세라 핀이었다.
"괜찮다, 세라. 중심이 흐트러지면 네가 다친다. 손을 떼거라."
"하지만 너무 무거워 보여서요. 제 배낭에 병 몇 개라도 나눠 담으면……."
세라는 주위 귀족 생도들의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품에는 목탄과 모서리가 닳은 방수 수첩이 소중하게 안겨 있었다.
"호의는 고맙지만 이 궤짝의 유리병들은 걸음걸이의 반동으로 균형을 맞춰야 깨지지 않는다. 다른 곳에 옮겨 담으면 충격을 흡수하지 못해."
서준이 차분하게 설명하자 세라의 동그란 눈이 반짝였다.
"그것보다 아까부터 수첩에 무언가를 적고 있던데 뭘 기록하고 있었지?"
세라가 흠칫 놀라며 수첩을 감추려다 서준의 담담한 눈빛을 마주하고 천천히 펼쳐 보였다. 서툰 필체였지만 놀라울 정도로 빽빽한 기록이었다.
[정오 바람 방향: 북동풍에서 북서풍으로 세 차례 급변. 풍속 감소.]
[가도 우측 물참나무 잎: 가장자리가 갈색으로 타들어가고 마른 버섯 냄새가 남.]
[새소리: 가도 진입 삼 마일 이후 산비둘기 울음소리 단절.]
서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일반적인 생도들이라면 검을 쥐는 법이나 갑옷의 무게를 재는 데 온 정신을 팔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 평민 소녀는 주변 환경의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고 있었다.
"관찰이 훌륭하구나. 특히 새소리의 단절을 짚어낸 점이 아주 예리하다."
"정말인가요? 하켄 교관님께 말씀드렸더니 쓸데없는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고 검이나 똑바로 쥐라고 하셔서……."
"교관의 말이 틀렸다. 숲의 맹수가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반응하는 것은 날짐승이다. 새가 울지 않는다는 것은 포식자가 영역을 넓히고 있거나 공기 중에 기피 잔향이 퍼졌다는 뜻이다."
서준은 숨을 고르며 덧붙였다.
"다만 다음부터는 바람의 방향을 적을 때 나뭇잎의 흔들림뿐 아니라 냄새의 변화를 함께 적어라. 북서풍이 불어올 때 어떤 냄새가 섞여 있었지?"
세라가 잠시 기억을 더듬더니 눈을 크게 떴다.
"약간…… 덜 익은 감 같은 떫은 냄새와 달착지근한 썩은 냄새가 났어요."
"잘 기억해 두어라. 그 떫은 냄새가 바로 몬스터의 변이 분비물 냄새다."
그때 앞쪽에서 날카로운 말발굽 소리와 함께 차가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학자 나으리께서는 짐을 지고 걷는 와중에도 한가하게 강연을 늘어놓으시는군."
화려한 은빛 마갑을 두른 백마 위에서 카일 로슈가 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라 핀. 천한 출신이라 격을 모르는 건 이해하지만 낙제 조교의 헛소리에 휘둘릴 시간이 있다면 전방 정찰 대형이나 복습해라. 실습지에서 낙오되면 가문도 없는 널 구해줄 사람은 없다."
세라가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카일은 서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에는 해부실에서 겪었던 굴욕에 대한 앙금이 가득했다.
"이서준 조교. 당신이 해부실에서 기괴한 이론으로 교관님을 당황하게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여긴 야외다. 책상머리 지식 따위는 실전에서 아무 쓸모도 없어. 짐이나 똑바로 챙겨라. 낙오하면 숲에 버려두고 갈 테니까."
카일은 말을 박차며 흙먼지를 흩뿌리고 달려 나갔다.
서준은 카일의 뒤를 응시했다. 화려한 기마술이었지만 말의 콧김이 유독 거칠었고 네 발굽의 박자가 미세하게 엇갈리고 있었다.
'말도 느끼고 있다. 숲에서 풍겨오는 기운에 겁을 집어먹었어.'
서준은 어깨의 짐을 고쳐 멨다. 그들이 눈을 감고 있는 동안 숲의 이빨은 턱밑까지 다가와 있었다.
대열이 검은 숲의 경계선에 도달한 것은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거대한 검은 침엽수들이 하늘을 가릴 듯 빽빽하게 솟아 있었고 숲 안쪽에서는 서늘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전원 정지! 십 분간 휴식 후 야영지로 이동한다!"
하켄 교관의 호령에 생도들이 환호하며 배낭을 내려놓았다. 하켄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지도 양피지를 펼쳤다.
"모두 잘 들어라. 여기서부터가 바브드 울프의 서식지다. 놈들은 영역 본능이 강해서 침입자를 결코 살려두지 않는다. 그렇다면 놈들의 영역 표시를 어떻게 구분하지?"
카일이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나섰다.
"교과서 제4장에 따르면 바브드 울프는 성체의 어깨높이에 맞춰 약 이 미터 높이의 참나무 줄기를 앞발톱으로 세 줄기 긁어 흔적을 남깁니다. 깊게 파인 수액 자국이 신선할수록 최근에 머물렀다는 증거입니다."
"훌륭하다, 카일! 바로 그거다!"
하켄이 흡족하게 웃으며 외쳤다.
"들었느냐? 숲에 들어서면 나무 위쪽의 긁힌 자국을 주시하라. 흔적을 먼저 발견하는 조에게 가산점을 주겠다."
생도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무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서준은 홀로 무거운 궤짝을 내려놓더니 숲길 가장자리의 축축한 덤불 쪽으로 걸어갔다.
서준은 참나무 줄기 위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대신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덤불 밑동을 살폈다.
지면에서 불과 삼십 센티미터 떨어진 관목 줄기.
단단한 가시덤불의 밑동이 날카로운 발톱이 아니라 무언가에 짓눌린 것처럼 으스러져 있었다. 줄기 표면에는 푸른 이끼 대신 끈적끈적하고 불투명한 액체가 엉겨 붙어 있었다.
서준은 소매에서 얇은 은박 주걱을 꺼내 액체를 긁어냈다.
떫은 약초 냄새 밑바닥에 숨어 있는 역겨울 정도로 달콤한 향취.
'향료다.'
서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연적인 몬스터의 분비물이 아니었다. 식물성 수지에 인위적인 화학 처리를 거쳐 마수의 신경계를 흥분시키는 가공된 유인 향의 찌꺼기였다.
"이서준 조교. 거기서 뭐 하는 거냐?"
카일 로슈가 쌀쌀맞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의 칼집 끝이 서준이 웅크린 흙바닥을 툭 쳤다.
"또 흙장난으로 생도들에게 겁을 줄 셈인가? 교관님이 분명히 나무 위쪽의 발톱 자국을 보라고 하셨을 텐데."
서준은 일어서지 않은 채 덤불 밑동을 가리켰다.
"카일 생도. 네가 말한 지식은 평범한 단독 수컷 바브드 울프의 영역 표식이다."
"그렇다면 내 말이 맞지 않나."
"틀렸다. 이 밑동을 봐라. 지면에서 한 뼘 높이의 줄기가 으스러져 있다. 발톱으로 긁은 것이 아니라 거친 갑각이나 등가시를 바닥에 질질 끌며 지나간 자국이다."
서준은 은박 주걱에 묻은 액체를 카일의 눈앞에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 액체는 늑대의 체액이 아니다. 영역 표시를 위한 분비물에 정체불명의 유인 성분이 섞여 있어. 늑대는 이런 달콤한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유인 성분……?"
"몸을 잔뜩 웅크린 수십 마리의 개체가 대열을 이루어 바닥을 기어가듯 통과했다. 녀석들은 영역을 과시하는 게 아니라 무언가에 홀려 한곳으로 집결하고 있다."
카일은 본능적으로 허리의 검 손잡이를 꽉 쥐었다. 눈앞의 학자가 말하는 광경이 섬뜩한 형상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일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저었다.
"허튼소리 마라. 교관님도 눈치채지 못한 것을 당신 따위가 어떻게 안다는 거냐!"
"믿지 않아도 상관없다. 하지만 발밑의 흙을 봐라. 수십 마리의 발자국이 남긴 보폭 간격이 전부 일정하다. 그것은 녀석들이 누군가의 통제를 받고 있다는 뜻이다."
서준은 긁어낸 액체를 유리 시험관에 담았다.
카일은 굳은 얼굴로 서준을 노려보다가 거칠게 돌아섰다.
실습대가 검은 숲 전초 기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붉은 노을이 능선을 집어삼킨 뒤였다.
거친 통나무 목책과 방벽으로 둘러싸인 전초 기지의 분위기는 황량했다. 망루 위에 걸린 왕국의 사자 깃발은 군데군데 찢겨 바람에 펄럭였다.
"수고 많으십니다, 아리아 부단장님!"
하켄 교관이 목책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사를 향해 경례를 붙였다.
은빛 흉갑 위에 낡은 푸른색 망토를 두른 여인. 짧게 자른 흑발 사이로 드러난 날카로운 턱선과 왼쪽 팔 갑주 틈새의 험악한 발톱 흉터. 북부 제3기사단 부단장 아리아 발렌이었다.
"오랜만이군요, 하켄 교관. 행렬이 꽤 요란스럽습니다."
아리아의 목소리는 차갑고 메말라 있었다.
"하하, 왕국의 미래를 짊어질 기린아들입니다. 특히 카일 로슈 생도는 이번 실습에서 숲의 마수들을 단숨에 토벌할 인재지요."
"토벌이라. 아카데미는 여전히 검은 숲을 사냥터쯤으로 여기는 모양이군요."
아리아의 서늘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최근 국경 순찰대의 피해가 급증했습니다. 마수들이 기괴한 연계 행동을 보이고 있어요. 이런 시기에 생도들을 몰고 들어오는 건 자살행위입니다."
"부단장님, 우리 생도들은 정규 전술을 철저히 이수했습니다. 기사단의 위세를 보여주면 짐승 따위는 금세 흩어질 겁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군요."
아리아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녀의 시선이 행렬 맨 뒤편에서 멈추었다.
무거운 표본 궤짝을 내려놓고 옷의 흙을 털어내고 있는 청년. 낡은 학자 망토를 걸치고 손가락 마디마다 잉크와 흙먼지를 묻힌 채 시험관을 정리하는 서준이 보였다.
"저 자는 누구지? 기사 생도가 아닌 것 같은데."
"아, 마력 낙제 판정을 받고 짐꾼 겸 사체 수거역으로 딸려온 조교입니다.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하켄이 경멸조로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아리아는 서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생도들은 지쳐 널브러져 있었지만 저 마른 학자는 흔들림 없는 호흡으로 주변 지형과 목책의 상태를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아리아가 성큼성큼 다가와 서준의 앞에 섰다.
"이봐, 학자. 손에 든 병은 뭐지?"
서준은 유리 시험관을 내보였다.
"숲 초입의 관목 덤불에서 채취한 몬스터 분비물입니다."
"분비물?"
"예. 그리고 부단장님, 한 가지 여쭈어보아도 되겠습니까."
서준의 담담한 어조에 아리아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말해 봐라."
"부단장님의 무릎 갑주와 정강이받이에 묻은 흙은 숲 깊은 곳의 부엽토가 아니라 늪지대 하층의 청회색 진흙입니다. 그리고 망루의 방어 깃발이 서쪽을 향해 비상 신호 형태로 묶여 있더군요."
서준의 나직한 말이 이어지자 아리아의 동공이 작게 수축했다.
"기사단의 전방 정찰선이 이미 무너졌군요. 숲 안쪽에서 밀려나 전초 기지 서쪽 능선까지 후퇴한 상태 아닙니까?"
정적이 내려앉았다.
하켄 교관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이서준! 감히 부단장님 앞에서 무슨 망발을 지껄이는 거냐!"
하지만 아리아는 손을 들어 하켄을 제지했다.
그녀의 시선은 오롯이 서준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눈앞의 학자는 칼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체구였지만 그가 던진 한마디는 기사단이 숨기던 전황의 핵심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흙 색깔과 깃발 매듭만으로 그걸 알아챘다고?"
"학자의 일은 사소한 잔향과 흔적으로 진실을 복원하는 것입니다. 숲은 지금 평소와 다릅니다. 내일의 실습을 강행하면 생도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합니다."
아리아의 턱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했다.
그녀는 서준의 깊은 눈을 응시하다가 나직하게 내뱉었다.
"이름이 뭐지?"
"왕립 몬스터 아카데미 조교실의 이서준입니다."
"이서준…… 기억해 두지. 하지만 전장의 지휘권은 기사단에게 있다. 학자의 추측만으로 작전을 취소할 수는 없다."
아리아는 차갑게 말을 맺고 돌아섰다. 그러나 걸어가는 뒷모습에는 숨길 수 없는 동요가 묻어났다.
깊은 밤이 찾아왔다.
기지 중앙에서는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생도들은 둘러앉아 내일 펼칠 무용담을 떠들었다.
서준은 그들의 모임에서 멀찍이 떨어진 북쪽 목책 구석에 서 있었다.
밤공기는 살을 에는 듯 차가웠다. 바람을 타고 실려 오는 공기 속에는 떫은 마비독 냄새와 역겨운 유인 향이 한층 더 짙어져 있었다.
바스락.
조심스러운 발소리와 함께 세라 핀이 다가왔다.
"선생님……."
"잠들지 않았느냐?"
"잠이 오지 않아요."
세라는 목책 너머 칠흑 같은 숲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숲이 너무 조용해요. 바람이 부는데도 풀벌레 소리가 단 하나도 들리지 않아요. 그리고……."
세라가 귀를 감싸 쥐며 몸을 떨었다.
"낮부터 땅속에서 계속 쿵, 쿵 하는 소리가 울려요. 아주 낮고 일정한 박자인데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못 듣겠다고 해요."
서준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는 천천히 허리를 굽혀 장갑을 벗은 맨손을 차가운 진흙 바닥에 밀착시켰다.
손바닥을 통해 지면의 미세한 마력 파동이 전해졌다. 심장 박동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땅을 두드리는 거대한 진동.
'지하 둥지다.'
이것은 늑대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숲 전체의 지반 아래에 거대한 굴을 파고 수백 마리의 마수를 통솔하는 군체형 상위 개체가 깨어나 있었다.
그 진동의 중심은 서서히 전초 기지를 둘러싸며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세라. 네 귀는 정상이다. 오히려 기사들의 그 어떤 마력 탐지기보다 정확해."
"정말인가요……?"
"그래. 내일 날이 밝으면 지옥이 열릴 거다. 교관과 생도들은 자신들이 맹수의 입속으로 걸어 들어간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칼을 뽑겠지."
서준은 품속에서 낡은 수첩과 흑연 심을 꺼냈다.
달빛 아래 서준의 손끝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낮 동안 관찰했던 식생, 진흙의 경사도, 바람의 골짜기 그리고 기사단이 남겨둔 지형적 틈새.
수첩 위로 검은 선들이 얽히며 하나의 정밀한 탈출선이 그려졌다.
'전투력으로는 이길 수 없다.'
하지만 놈들에게도 생물로서의 한계가 있다. 빛에 대한 반응, 소리의 사각지대, 독안개의 확산 경로.
서준은 수첩을 덮으며 어두운 숲을 응시했다.
그의 손끝에는 마력이 없었지만 머릿속에는 이미 전장을 뒤흔들 학자의 설계가 새겨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