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열차 막차의 차장입니다

3화: 사라진 동료의 마지막 방송
“다음 정차역은 유리 종착역입니다.”
건우의 목소리가 객실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입을 열지 않았는데도, 억양까지 자기와 같았다. 민하는 방송기 앞에 섰고 준수는 운전실의 손잡이를 붙들었다. 열차가 속도를 줄이자 창밖의 어둠이 유리처럼 반짝였다.
“자동 방송이 차장님 목소리를 흉내 낼 수도 있습니까?”
“이 열차가 흉내 내는 건 처음 봅니다.”
“그럼 누가 차장님 목소리를 녹음했겠죠.”
준수의 말에 건우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자기 목소리로 방송한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도 마지막 음절이 혀끝에 남아 있었다. 유리 종착역은 노선도 어디에도 표시되지 않았다. 그가 문을 열려 하자 민하가 팔을 잡았다.
“이번에는 제가 먼저 내려가 볼게요.”
“표에 목적지가 있습니까?”
“없어요. 그러니까 제가 선택하는 거예요.”
민하는 자신의 교통카드를 꺼내 문 옆 센서에 댔다. 불이 켜지지 않았다. 그녀는 카드 모서리를 엄지로 문지르며 잠시 눈을 감았다. 열차 창문에 한 여자가 비쳤다. 자주색 코트의 민하와 똑같은 얼굴, 다만 어깨에 낡은 바이올린 가방을 멘 사람.
민하는 그쪽을 오래 보지 않았다.
“언니죠?” 건우가 물었다.
“열차에서 본 적 있어요. 내리지 않은 사람이라고 했잖아요. 저 장면은 내가 언니를 찾으러 왔다면의 모습일 거예요.”
“문을 열어 드릴까요?”
“아니요. 오늘은 내가 직접 전화할래요.”
그녀는 전화기를 꺼냈다. 번호를 누르는 동안 열차가 흔들렸고, 연결음이 길게 이어졌다. 한 번, 두 번, 세 번. 민하는 끊으려다 손가락을 멈췄다. 건우는 재촉하지 않았다. 네 번째 신호 뒤에 잠긴 목소리가 들렸다.
“민하야?”
민하는 숨을 삼켰다. “언니, 나야.”
“잘못 걸었어.”
“아니. 네 목소리 맞아. 지금 어디야?”
대답 대신 잡음이 흘렀다. 민하의 눈이 창에 비친 언니에게 향했다. 반사 속 여자는 바이올린 가방을 내려놓고 손바닥을 유리에 붙였다.
“보고 싶었어.” 민하가 말했다. “그런데 찾으러 가지 않을 거야. 네가 내리는 역을 내가 정하면 안 되니까.”
“그럼 전화는 왜 했어?”
“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말하려고. 네가 돌아오면 예전처럼 굴지는 않을 거라고.”
잠시 뒤 언니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울음인지 웃음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아직 열차에 있어.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어.”
“그럼 오늘은 통화만 하자.”
민하는 통화를 끊지 않은 채 창가에 앉았다. 열차는 정차했고 문은 그대로 닫혀 있었다. 그 선택으로 역명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대신 유리창의 언니가 처음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건우는 그녀 곁을 지나 운전실로 갔다. 유리 종착역의 승강장은 오래된 분기역과 비슷했다. 철거된 4번 플랫폼, 닳은 노란 선, 벽에 남은 역 번호. 하지만 승강장에는 열차보다 더 많은 사람이 서 있었다. 저마다 다른 얼굴과 옷차림이었고, 모두 창문에 비친 승객과 닮았다.
“저 사람들이 다 다른 선택의 모습입니까?”
“가능성의 반사겠죠.” 민하가 통화 중인 전화기를 내리며 말했다. “그 사람들 자체는 아니에요.”
어떤 승객은 창을 등지고 앉았다. 한 젊은 여성이 승차권을 반으로 찢으려 했다. 건우가 다가가자 그녀는 표를 움켜쥐었다.
“여기서 내리면 아버지가 살아 있는 장면을 볼 수 있나요?”
건우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표에는 ‘마지막 응급실’이라고 적혀 있었다.
“열차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장면을 봐도 그날을 바꿀 수 없어요.”
“그럼 볼 이유가 없네요.”
“그렇게 느낀다면 표를 찍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성은 승차권을 펀치기에 밀어 넣다가 손을 뺐다. “아버지가 마지막에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나요. 병원 복도에 너무 오래 있었고, 무서워서 귀를 막았어요.”
“그 기억을 찾고 싶으세요?”
“찾고 싶기도 하고, 그대로 두고 싶기도 해요.”
민하가 그녀 옆에 앉았다. “둘 다 가능해요. 오늘 결정하지 않아도 돼요.”
여성은 표를 구기지 않고 가방에 넣었다. 그녀는 내리지 않았다. 문 밖의 반사 속 아버지는 병실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손을 들지도 입을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 장면은 위로를 주려는 답이 아니라, 그녀가 기억하지 못하는 빈칸으로 남았다.
그때 열차의 조명이 한꺼번에 꺼졌다. 승강장 끝에서 안내 방송이 들렸다.
“4번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열차는 운행을 종료합니다. 승객 전원 하차 확인 후 출발하십시오.”
이번 목소리는 건우보다 젊었다. 그는 호각을 쥔 손을 꽉 닫았다. 지후가 마지막으로 근무하던 때의 방송이었다.
준수가 운전실로 뛰어갔다. “이건 제 기록에 없어요. 폐선 구간의 수동 방송 장치가 켜진 겁니다.”
“그 장치 위치를 압니까?”
“예전 도면에 표기돼 있어요. 승강장 반대편, 비상 계단 아래.”
“찾으러 가겠습니다.”
“혼자 보내지 마세요.” 민하가 말했다.
건우는 문 레버를 잡았다. 이번에도 뜨거운 열기가 손바닥에 닿았다. 하지만 문은 열렸다. 그는 발을 내딛기 전 객실을 돌아봤다. 승객들이 모두 그를 보고 있었다. 누구도 대신 결정하지 않았다.
“원치 않는 분은 그대로 계셔도 됩니다. 열차는 기다립니다.”
그는 준수와 함께 승강장에 내렸다. 민하는 객실 문을 붙든 채 남은 승객들에게 말했다. “차장님은 돌아옵니다. 그렇다고 그분의 선택까지 대신할 순 없어요.”
비상 계단은 잠긴 철문 뒤에 있었다. 준수가 도면의 모서리를 접어 위치를 맞췄다. “여기 아래에 수동 스피커 선이 지나갑니다. 근데 잠금장치가 오래돼서 열쇠가…”
건우는 허리의 호각을 빼 들었다. 손잡이 끝으로 자물쇠를 두드리자 첫 번은 무딘 소리만 났다. 두 번째에 낡은 걸쇠가 비틀렸다. 세 번째 충격에 철문이 열리며 먼지가 쏟아졌다.
좁은 계단 아래에는 작은 방송실이 있었다. 마이크 하나, 전원 스위치, 종이 한 장. 종이에는 ‘승객 확인 완료’라고 적혀 있었지만 서명란은 비어 있었다. 준수는 손전등을 비췄다.
“이게 지후 차장님 마지막 방송 기록인가요?”
“아니요. 말하고 싶었던 문장일 겁니다.”
“왜 서명을 안 했죠?”
건우는 방송실 벽면에 남은 손자국을 봤다. 검은 기름 자국이 계단 위를 향해 길게 이어졌다. 지후가 위로 올라간 흔적일 수도 있고, 누군가가 그를 끌어내려 했던 흔적일 수도 있었다.
“방송을 재생하겠습니다.”
준수가 마이크 옆의 낡은 테이프를 꺼냈다. “재생하면 열차가 기억을 또 가져갈지도 몰라요.”
“그럼 듣지 않겠습니다. 이건 승객 표가 아니니까요.”
건우는 테이프를 받아 손바닥에 올렸다. 테이프 케이스에 ‘임건우에게’라고 적혀 있었다. 자기 이름이었다. 그는 재생 버튼을 누르지 않고 케이스를 열었다. 안에는 작은 종이 조각이 끼워져 있었다.
‘내 방송을 대신 끝내지 마. 네가 내릴 역은 네가 골라.’
준수가 숨을 들이켰다. “차장님이 지후 씨와 함께 근무했던 기억이 없는 게 아니군요.”
“기억은 있는데, 그 사람을 잃은 날만 없어졌어요.”
“그게 펀치 때문입니까?”
건우는 대답 대신 왼손을 펼쳤다. 오래된 화상 자국 아래로, 어렴풋한 장면이 되살아났다. 비상등이 붉게 깜박이던 객실, 문턱에 떨어진 아이의 장갑, 그 장갑을 주우려 선로 쪽으로 몸을 기울인 지후. 그리고 자기 손에 들린 출발 신호기. 장면은 거기서 끊겼다. 건우는 신호기를 눌렀는지, 지후를 붙잡았는지 알지 못했다.
“제가 뭘 했는지 기억나지 않아요.”
준수는 그의 손을 봤다. “그래서 확인하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확인하면 차장님이 누군가를 두고 출발했다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어요.”
건우는 주머니 속 테이프를 쥐었다. 플라스틱 모서리가 손금에 눌렸다. “그러면 그 결론을 들고 다음 운행을 하겠습니다. 모르는 채로 책임을 미루고 싶진 않습니다.”
준수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위로하지도 않았다. 대신 마이크의 선을 뽑아 테이프 플레이어를 멈췄다. 그 작은 조치가 두 사람 사이에 남은 변명이 하나 사라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건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손에 쥔 화상 흉터가 욱신거렸다. 그날 열차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테이프를 재생하면 답을 얻을지도 몰랐다. 대신 어떤 기억이 사라질지 장담할 수 없었다.
스피커가 다시 켜졌다. 이번에는 잡음 사이로 낮은 목소리가 섞였다.
“건우야. 네가 듣고 있다면, 이번에는…”
목소리는 거기서 끊겼다. 재생 버튼을 누르지 않았는데 테이프가 돌아가고 있었다. 준수가 전원을 뽑았지만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플랫폼 위의 열차가 짧게 경적을 울렸다.
건우는 종이 조각을 접어 제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기록을 가져가죠. 방송은 승객이 원하지 않는 이상 끝까지 틀지 않겠습니다.”
“지후 차장님을 찾을 수 있는 단서인데도요?”
“찾는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선택을 대가로 쓰진 않겠습니다.”
그가 계단을 올라오자 민하가 기다리고 있었다. 통화기 너머로 그녀의 언니 목소리가 여전히 들렸다. 승객들은 열차에서 내리지 않았고, 누구의 표에도 펀치 자국이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객실 벽의 노선도에 없던 선 하나가 희미하게 떠올랐다. 폐선 구간에서 북쪽으로 뻗는 선이었다.
“저 선은 어디로 가죠?” 준수가 물었다.
건우는 자신이 가진 승차권을 꺼냈다. 종이 위에는 이제 역명 대신 짧은 문장이 찍혀 있었다.
‘다음 막차에는 혼자 오지 마.’
그는 그것을 민하에게 보여 줬다. 민하는 통화를 마치고 휴대전화를 내렸다.
“다음에는 저도 같이 갈게요.”
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열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승강장 끝에 서 있던 지후의 모습은 어느 창에도 비치지 않았다. 그러나 유리 종착역의 방송실에 남긴 테이프는 건우의 주머니 안에서 다시 한 번 스스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