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 괴담 라디오로 세상을 구함

2화: 거짓말 뒤에 남겨진 빈칸
스튜디오 B를 채운 빛은 서늘했다.
벽면에 걸린 낡은 아크릴 램프는 분명 몇 분 전까지만 해도 피처럼 붉은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십수 년 동안 먼지를 뒤집어쓴 채 웅웅거리던 평범한 방송 조명이었다.
하지만 지금 램프를 채운 것은 칠흑 같은 심야를 얼려버릴 듯 시린 청백색 푸른빛이었다. 깊은 바닷속에서 길어 올린 냉기가 아크릴 케이스를 뚫고 나와 스튜디오를 핥고 지나가는 듯했다.
"……PD님!"
조정실 인터콤 스피커에서 찢어지는 유진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페이더 내려요! 마스터 리미터가 안 먹혀요!"
도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콘솔을 내려다보았다.
아날로그 오디오 레벨 메터의 두 바늘이 오른쪽 끝 붉은 눈금 너머로 꺾인 채 떨리고 있었다. 데시벨 눈금을 초과한 바늘은 철판에 부딪히며 딱, 딱, 딱 하는 날카로운 기계음을 토해냈다.
치이익- 삐익-!
모니터링 헤드폰 너머로 정체불명의 고주파 노이즈가 고막을 찔렀다.
전화선은 이미 여학생이 문을 닫고 들어선 순간 뚝 끊긴 상태였다. 외부 입력 신호가 전혀 없어야 정상인데도 마이크 라인을 타고 알 수 없는 파동이 밀려들었다.
도윤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마이크 페이더를 끌어내렸다.
동시에 유진이 긴급 바이패스 스위치를 내리자 요동치던 레벨 메터 바늘이 덜컥 가라앉았다. 벽면을 채우던 푸른 발광도 서서히 힘을 잃더니 원래의 붉은 ON AIR 조명으로 돌아왔다.
적막이 내려앉았다.
스튜디오 안에는 거칠게 몰아쉬는 도윤의 숨소리와 모니터 스피커의 백색소음만이 맴돌았다.
유진이 유리창에 손을 얹은 채 도윤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망울에는 전에 본 적 없던 당혹감과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도윤은 심호흡을 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은 밀실이 아니었다. 폐지 위기에 몰린 심야 프로그램이라 해도 공중파 전파를 타고 흘러나가는 생방송 현장이었다.
도윤은 마이크 암을 다시 끌어당겼다. 페이더를 부드럽게 밀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잠시 오디오 송출 장비의 이상으로 날카로운 잡음이 섞여 들었습니다. 늦은 밤 방송을 듣고 계시던 청취자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도윤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옥타브 낮았지만 단단하고 평온했다.
진행자가 동요하면 듣는 사람은 몇 배의 불안에 휩싸인다. 심야 방송에서는 진행자의 호흡 하나가 청취자의 안전선이 된다.
"조금 전 복도에서 두려움에 떨며 전화를 주셨던 사연자분은 무사히 현관문 안으로 들어가 가족과 합류하셨습니다. 거친 호흡 속에서도 스스로 용기를 내어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여러분도 부디 가슴을 쓸어내리시고 평온한 밤을 이어가시길 바랍니다."
도윤은 큐시트에 걸려 있던 차분한 첼로 연주곡 버튼을 눌렀다.
선율이 전파를 타고 흘러나가자 도윤은 마이크 뮤트 버튼을 누르고 헤드폰을 벗었다.
이마에서 식은땀 한 줄기가 턱선을 타고 뚝 떨어졌다.
도윤은 방음 철문을 밀고 조정실로 나갔다.
데스크 앞의 유진은 멍하니 오디오 인터페이스 화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유진 씨, 괜찮아?"
"……이거 단순한 전압 쇼트 아니에요."
유진이 마우스를 움직여 방금 녹음된 멀티트랙 오디오 파형을 화면 가득 띄웠다.
"보이세요, PD님? 전화가 연결되어 있던 동안은 음성 신호가 평범했어요. 그런데 사연자가 거짓말을 털어놓고 엄마를 부르며 문을 열던 그 5초 사이에 주파수 스펙트럼이 완전히 붕괴했어요."
화면 속 파형은 기이했다. 날카로운 톱니바퀴처럼 사방으로 찢겨 있었다.
"더 이상한 건 이 불빛이에요."
유진이 벽면의 ON AIR 램프를 가리켰다.
"저 등은 단순한 백열전구예요. 필라멘트가 타버리면 꺼질지언정 푸른색으로 변하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요. 아날로그 전압계도 내내 정상이었어요. 기계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빛만 변했다는 뜻이에요."
유진의 목소리에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철저한 엔지니어인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기에 무게는 더욱 무거웠다.
도윤은 묵묵히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머릿속에는 통화 도중 자신의 귓바퀴를 찌르던 서늘한 감각이 생생했다.
여학생이 엄마와 통화했다고 말하던 순간에 귓속을 날카롭게 긁어대던 불협화음.
'거짓말이 소리의 잡음으로 들렸어.'
도윤은 마른침을 삼켰다. 사람이 하는 말의 진실과 거짓을 소리로 구분한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스튜디오 벽면을 물들였던 시린 푸른빛과 눈앞의 기괴한 파형은 그것이 착각이 아니었음을 똑똑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때 보조 모니터에서 알림음이 연이어 울렸다.
유진이 깜짝 놀라며 인터넷 방송 접속 창을 열었다.
"PD님, 이거 보세요. 접속자가 갑자기 왜 이러죠?"
[실시간 청취자: 41명 → 89명 → 164명 → 247명……]
평소 40명 안팎에 불과하던 숫자가 순식간에 여섯 배로 치솟고 있었다.
- [익명]: 방금 전화 통화 뭐냐? 라디오 듣다가 소름 돋아서 의자에서 굴러떨어질 뻔함.
- [새벽달]: 여학생 비명 지를 때 뒤에서 문 긁는 소리 진짜였음? 오디오 연출 아니죠?
- [달리는택시]: 야간 운전 중에 라디오 듣다가 뒷골이 서늘해져서 차 세웠습니다.
생생한 현장의 공포가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수백 개의 반응 사이에서 도윤의 시선을 사로잡은 글이 하나 있었다.
[작성자: 11층 사연자 / 00:29:41]
[제목: 저 방금 통화했던 학생이에요.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도윤은 다급하게 마우스를 쥐고 글을 클릭했다.
‘아저씨, 저 아까 전화했던 학생이에요. 엄마가 문 열어줘서 집 안으로 들어왔어요. 거실에 불 켜고 앉아 있는데 손이 멈추질 않아요. 엄마는 제가 왜 이러는지도 모르고 안방으로 들어가서 다시 잠드셨어요. 그런데 아직 안 끝났어요. 복도 쪽으로 난 제 방 창문 밖에서 소리가 나요. 비상계단 철문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려요. 그 문은 평소에 항상 닫혀 있거든요. 누군가 계단 문고리를 천천히 돌리고 있어요. 저 어떡해요……?’
글을 읽어 내려가는 도윤의 등줄기로 서늘한 오한이 타고 올랐다.
유진도 모니터 옆에 다가와 창백해진 얼굴로 물었다.
"집 안에 들어갔는데 왜 아직 소리가 나는 거죠?"
도윤은 대답 대신 모니터 화면 속 글자를 곱씹었다.
'비상계단 철문이 덜컹거린다.'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여학생이 보내왔던 첫 사연.
[엘리베이터에서 엄마한테 통화했다. 11층에 내려서 센서등이 켜지자마자 복도 끝 비상계단 쪽에서 소리가 났다. 10초 전에 엄마한테 했던 말이 똑같이 들렸다.]
여학생은 처음에 그렇게 적었었다.
하지만 도윤의 귓가에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둔탁한 위화감이 남아 있었다.
잡음은 여학생이 엄마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인정했을 때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엄마 나 왔어'라고 외치며 현관문을 여는 순간에 비로소 폭발하듯 찢어졌다가 잦아들었다.
단순히 늦은 것을 둘러대려 했다면 엘리베이터 안에서 조용히 문자를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여학생은 굳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큰소리로 통화를 했고 내리자마자 비상계단 쪽에서 목소리가 메아리쳤다고 했다.
거기에는 명백한 논리적 공백이 있었다. 두려움 때문에 숨겨둔 이야기의 빈칸.
"유진 씨."
"네, PD님."
"노래 페이드아웃 준비해 줘. 마이크 다시 연다."
"네? 지금 게시판에 사람 몰려서 난리예요. 여기서 삐끗하면 내일 아침에 방송 사고로 징계받아요!"
"저 아이는 지금 공포의 한가운데에 고립되어 있어. 전파가 닿는 건 우리 방송뿐이야."
도윤은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마이크 앞에 앉아 헤드폰을 썼다. 흘러나오던 첼로 곡의 볼륨이 줄어들었다. 붉은 ON AIR 램프 아래에서 도윤은 침착하게 숨을 골랐다.
"0시의 사연함, 2부를 이어갑니다."
도윤의 목소리가 깊은 밤의 정적을 갈랐다.
"조금 전 11층 복도 사연을 보내주셨던 학생분. 지금 방 안에서 이 방송을 듣고 계신다는 것을 압니다. 익명 게시판에 남겨주신 글을 방금 확인했습니다."
도윤은 마이크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학생, 두려워하지 말고 제 질문을 잘 들어주세요. 아까 통화할 때 학생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엄마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제 귀에는 아직 메워지지 않은 빈칸이 들립니다."
도윤은 차분하게 말을 골랐다.
"학생은 왜 엘리베이터 안에서 굳이 목소리를 높여 통화를 해야 했습니까? 11층에 도착해 문이 열렸을 때, 센서등이 켜지기 직전 비상계단 쪽에서 무엇을 보았거나 들었던 것은 아닙니까?"
스튜디오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실시간 게시판의 댓글 속도가 뚝 멎었다. 수백 명의 청취자가 도윤의 입술 끝에 매달려 숨을 죽이고 있었다.
"등 뒤를 쫓아오는 목소리는 누군가가 지어낸 악령이 아닙니다. 학생 자신이 두려움을 피하려 어둠 속에 내던진 거짓말과 회피의 그림자예요. 그 어둠 속에 무엇을 두고 오셨습니까? 무엇을 감추기 위해 거짓된 목소리를 내셨나요."
상대를 다그치는 날카로움 대신 깊은 상처를 어루만지는 온기가 실려 있었다.
침묵이 흐르는 동안 유진은 마른침을 삼키며 문자 서버를 응시했다.
그리고 40초가 지났을 때였다.
띠링!
스튜디오 프롬프터 모니터에 단 하나의 장문 메시지가 떠올랐다.
[발신: 11층 사연자]
도윤의 시선이 화면으로 내달렸다.
‘……죄송해요. 제가 거짓말을 또 했어요.’
메시지의 첫 문장이었다.
‘엘리베이터가 11층에 도착했을 때 문이 열리자마자 복도 비상계단 문틈에 박스랑 폐가구가 쌓여 있는 게 보였어요. 센서등도 나가 있어서 너무 캄캄했어요. 그런데 그 계단 안쪽 어둠 속에서 누군가 작게 헛기침을 하면서 덜덜 떠는 소리가 들렸어요.’
도윤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 소리가 너무 섬뜩하고 무서워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어요. 그래서 비상계단 문을 있는 힘껏 발로 차서 쾅 닫아버렸어요. 그리고 혹시 그 사람이 문을 열고 쫓아올까 봐, 나 혼자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려고 허공에 대고 엄마랑 통화하는 척 고함을 질렀어요. 엄마! 나 지금 내렸어! 현관문 열어놔! 라면서요…….’
도윤은 입술을 다물었다.
사연의 모든 빈칸이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여학생을 쫓아왔던 그 기괴한 목소리.
비상계단 어둠 속에서 들려온 누군가의 기척에 겁을 집어먹고 그를 밀어내기 위해 허공에 대고 필사적으로 내뱉었던 기만과 공포의 메아리였다.
타인의 존재를 외면하고 문을 걷어찬 채 스스로를 지키려 지어냈던 가짜 목소리가 어두운 복도의 시멘트 벽에 고착되어 여학생의 등 뒤를 집요하게 쫓아왔던 것이다.
"……그랬군요."
도윤은 떨리는 숨을 내쉬며 마이크를 잡았다.
"계단 문틈에 버려진 짐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들려오던 헛기침 소리. 그것이 두려워 계단 문을 차서 닫고 허공을 향해 가짜 통화를 연출하셨던 거군요."
도윤의 목소리가 전파를 타자마자 그의 귓바퀴를 괴롭히던 불협화음의 잡음이 썰물처럼 깨끗하게 씻겨 내려갔다.
동시에 조정실 유리창 너머에서 유진이 경악에 찬 얼굴로 손을 번쩍 들었다.
오실로스코프 화면에서 사방으로 찢겨 나가던 붉은 오디오 파형이 일순간 부드럽고 맑은 곡선으로 정렬되고 있었다.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순수한 정현파였다.
"PD님…… 파형이……!"
유진이 인터콤 버튼을 누른 채 외쳤다.
"잡음이 사라졌어요. 소리가 완전히 정렬됐어요!"
그와 동시에 프롬프터에 사연자의 마지막 문자가 올라왔다.
[창밖에서 덜컹거리던 소리가 뚝 멎었어요. 계단 문이 조용해졌어요. 아저씨, 저 이제 진짜 괜찮은 것 같아요. 제 말 믿어주셔서 감사해요…….]
스튜디오를 짓누르던 무겁고 축축한 음압이 거짓말처럼 흩어졌다.
도윤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길게 숨을 토해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유진의 시선이 콘솔 맨 우측에 장착된 보조 수신기 모니터로 향했다.
한성방송 사내 송출망과는 연결되지 않은 아날로그 보조 주파수 대역.
그곳에 정체불명의 전파 신호 하나가 잡혀 있었다.
지지직…… 지직……
라디오 반송파 틈새로 기계음인지 숨소리인지 분간할 수 없는 기괴한 음성 신호가 스튜디오 B의 주파수를 핥고 지나갔다.
[……빈칸을…… 찾았군…….]
유진의 얼굴이 다시 얼어붙었다.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마이크 앞에 앉아 있는 도윤을 바라보았다.
방송국 밖, 칠흑 같은 서울의 밤하늘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이 방송을 똑똑히 엿듣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