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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 괴담 라디오로 세상을 구함1화

심야 괴담 라디오로 세상을 구함

심야 괴담 라디오로 세상을 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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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자정의 복도에서 내 목소리가 들린다

서울 여의도 한성방송 본관 지하 2층.

환풍기 돌아가는 둔탁한 기계음만이 텅 빈 복도를 채우고 있었다. 낮 동안 수많은 방송 관계자와 연예인으로 북적이던 본관은 밤 열한 시를 넘기면 거대한 콘크리트 무덤처럼 가라앉았다.

한도윤은 뻑뻑하게 마른 눈을 비비며 낡은 철제 문을 열었다.

문패에는 빛바랜 아크릴로 ‘제2 라디오 스튜디오’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방송국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저 ‘지하 스튜디오 B’로 불리는 버려진 공간이었다.

책상 모서리에는 한 시간 전 백진호 본부장이 던져두고 간 A4 용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2026년도 가을 정기 개편에 따른 프로그램 일몰 안내]

붉은 결재 도장이 선명하게 찍힌 폐지 통보서였다. 수신인은 라디오본부 제작2팀 한도윤 PD.

"PD님, 오셨어요."

조정실 콘솔 데스크 앞에 앉아 있던 서유진이 헤드폰 한쪽을 목에 건 채 고개를 돌렸다. 짧은 단발머리 사이로 은색 귀마개가 차갑게 반짝였다.

그녀의 시선이 도윤의 손에 들린 구겨진 큐시트와 책상 위의 폐지 공문으로 차례로 향했다.

"본부장님이 다녀가셨나 보네요."

"응. 다음 주 목요일이 마지막 방송이 될 것 같아."

도윤은 담담하게 큐시트를 콘솔 위에 올려놓았다. 겉으로는 침착해 보였지만 입안은 모래를 씹은 듯 바짝 타들어 가고 있었다.

3년 전 야심 차게 기획했던 심야 프로그램 〈0시의 사연함〉.

자정부터 새벽 한 시까지 고단한 도시의 밤을 음악과 익명 사연으로 채우던 방송이었다. 하지만 유튜브와 숏폼에 밀려 심야 라디오 청취율은 바닥을 쳤다. 지난달에는 메인 DJ마저 하차를 선언하며 프로그램은 완전히 침몰 직전에 몰렸다.

결국 연출자인 도윤이 임시 진행 마이크까지 잡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실시간 동시 청취자 수는 매일 밤 마흔 명 안팎. 방송국의 그 누구도 이 지하 스튜디오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늘도 혼자 들어가시는 거죠?"

"어. 대타 DJ를 구할 예산도 없으니까."

도윤이 부스 안으로 들어가 낡은 의자에 앉았다. 마이크 암을 가볍게 당겨 입술 높이에 맞췄다.

스튜디오 정면에 달린 붉은 아크릴의 ON AIR 램프는 십수 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머금은 채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 가끔 원인 모를 정전기 때문에 웅웅거리는 미세한 진동을 뿜어내는 기묘한 조명이었다.

"유진 씨, 오늘 익명 게시판에 사연 몇 개나 들어왔어?"

"평소랑 비슷해요. 광고 스팸 빼면 일곱 개 정도."

유진이 서브 모니터를 툭툭 두드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좀 이상한 글들이 계속 올라와요. 음악 신청이나 일상 고민이 아니라 전부 섬뜩한 괴담 같은 것들이에요."

"괴담?"

"네. 처음엔 어디 커뮤니티에서 긁어온 낚시 글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작성자 IP는 매번 다른데 문체나 분위기가 너무 생생해요. 오늘도 방금 하나 올라왔어요."

도윤은 부스 안의 태블릿 화면을 켰다.

〈0시의 사연함〉 공식 익명 수신함 최상단에 올라온 글이었다.

[제목: 11층 복도 끝에서 제 목소리가 따라옵니다.]
[작성자: 익명 / 23:51:14]

‘독서실 끝내고 아파트에 도착했어요. 엘리베이터에서 엄마한테 이제 집에 들어간다고 통화했거든요. 그런데 11층에 내려서 센서등이 켜지자마자 복도 끝 비상계단 쪽에서 소리가 났어요. 제가 10초 전에 엘리베이터 안에서 엄마한테 했던 말이 똑같이 들려요. 엄마 나 이제 집에 들어가, 라면서요. 목소리가 제 목소리예요. 지금 현관문 도어락 앞에서 손이 떨려서 번호를 못 누르겠어요. 등 뒤에서 점점 가까워져요.’

짧은 문장이었지만 기이할 정도로 서늘한 압박감이 활자 틈새로 뿜어져 나왔다.

단순한 공포 소설의 한 구절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문장 끝마다 묻어나는 호흡의 떨림이 지나치게 절박했다.

도윤이 마른침을 삼키며 시계를 확인했다.

자정 30초 전.

"유진 씨, 3번 직통 전화 라인 신호 들어오고 있어?"

"아뇨, 아직은요. 방송 시작하면 딜레이 시스템 켜 둘 테니까 문제 생기면 바로 컷트할게요."

"부탁해."

도윤은 검은색 모니터링 헤드폰을 귀에 덮었다. 외부 소음이 완벽하게 차단되며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만이 고막을 때렸다.

디지털 벽시계의 초침이 58, 59를 지나 정각 00:00:00을 가리켰다.

삐- 삐- 삐- 삐이-!

자정을 알리는 시보음이 메마른 정적을 찢었다.

조정실 너머의 유진이 검지를 들어 큐 사인을 보냈다. 스튜디오 벽면의 붉은 ON AIR 램프에 불이 들어왔다.

도윤은 페이더를 올리고 마이크에 입을 가져갔다.

"어둠이 가장 깊어지는 시간, 하루의 끝과 시작이 엇갈리는 자정입니다. 이곳은 〈0시의 사연함〉, 저는 진행을 맡은 한도윤입니다."

도윤의 낮고 차분한 중저음이 전파를 타고 고요한 도시의 밤으로 흘러나갔다.

"오늘 밤, 여러분은 어떤 길을 지나 집으로 돌아가고 계신가요. 가로등 불빛 아래 혼자 걷는 골목길일 수도 있고 불 꺼진 아파트의 긴 복도일 수도 있겠죠. 늦은 밤 익명 게시판에는 유독 차갑고 서늘한 사연 하나가 도착해 있습니다."

도윤은 태블릿에 띄워진 익명 사연을 한 줄씩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감정을 과장하지 않고 묵묵히 활자를 전달하는 목소리는 묘한 흡인력을 자아냈다. 배경으로 깔리는 쓸쓸한 피아노 선율 사이로 사연자의 공포가 스튜디오 안을 천천히 잠식해 들어갔다.

"……지금 현관문 앞에서 등 뒤의 어둠을 견디고 계신 분. 장난이든 진심이든 이 방송을 듣고 계신다면 부디 무사히 문을 열고 들어가셨기를 바랍니다."

도윤이 멘트를 맺으며 다음 곡으로 전환하려던 찰나였다.

조정실 데스크 한구석에 놓인 3번 직통 전화 인터페이스에 새빨간 불이 들어오며 요란하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유진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인터콤 버튼을 눌렀다.

"PD님! 3번 라인 콜 들어왔어요! 발신자 표시 제한인데 방금 그 사연 작성자라고 통화 연결을 요구해요!"

"뭐?"

"어떻게 할까요? 바로 자를까요?"

평소라면 심야 방송의 돌발 연결은 철저히 사전 검증을 거쳐야 했다. 장난 전화나 방송 사고의 위험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윤은 태블릿 화면 속 11층 복도 사연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귓가에 씌워진 헤드폰 너머로 정체불명의 미세한 전기 노이즈가 찌르르 울리고 있었다.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다. 소리 속에서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기 직전의 숨 가쁜 기압 차 같은 것이 느껴졌다.

"……연결해 줘."

"네? PD님, 생방송이에요! 무슨 소리를 할 줄 알고요!"

"7초 딜레이 걸어두고 이상한 소리 나오면 내가 바로 페이더 내릴게. 연결해."

도윤의 단호한 눈빛에 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콘솔의 폰 패치를 올렸다.

치이익- 하는 거친 회선 접속음과 함께 스튜디오 안으로 낯선 공간의 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여보세요."

도윤이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0시의 사연함〉 생방송 중입니다. 말씀 들리시나요?"

수화기 너머에서는 한동안 헐떡이는 가쁜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마치 얼음물 속에 빠진 사람이 필사적으로 들이켜는 것 같은 날카롭고 젖은 호흡이었다.

이윽고 앳된 여학생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며 터져 나왔다.

  • 흐으…… 들려요. 라디오…… 듣고 있어요.

"사연을 보내주신 분이 맞나요? 지금 어디 계신가요?"

  • 저…… 아파트 복도예요. 11층이요. 복도 끝 센서등이 방금 나갔어요.

여학생의 말소리 뒤편으로 차가운 시멘트 벽면에 부딪히는 바람 소리가 스산하게 섞여 들었다.

  • 저 진짜 미치겠어요. 장난 아니에요. 거짓말 아니라고요.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제가 통화했던 목소리가…… 저기 어둠 속에서 계속 반복돼요.

"진정하세요. 당황하지 마시고 제 목소리에 집중해 주세요. 뒤를 돌아보지 마시고 앞쪽 현관 도어락만 바라보세요."

도윤은 목소리에 힘을 실어 차분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순간 도윤의 귓바퀴를 타고 낯선 감각이 파고들었다.

전화선 너머에서 들려오는 여학생의 울음소리 틈새로 미세하게 찌그러진 잡음이 섞여 있었다.

단순한 통신 장애가 아니었다. 무언가 사실이 아닌 것, 숨기고 있는 이야기의 공백이 삐걱거리는 불협화음처럼 도윤의 청각을 긁어댔다.

도윤은 직관적으로 물었다.

"학생,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정말 엄마랑 통화한 게 맞습니까?"

그 질문에 수화기 너머의 흐느낌이 뚝 멎었다.

조정실의 유진도 놀란 눈으로 유리창을 바라보았다.

  • ……어떻게 아셨어요?

여학생이 울컥 눈물을 쏟아내며 작게 속삭였다.

  • 엄마한테는…… 독서실에서 늦게까지 공부하다 간다고 거짓말했어요. 사실은 친구들이랑 코인노래방 갔다가 늦은 건데 혼날까 봐…… 엘리베이터 안에서 엄마한테 거짓말로 둘러댔어요. 그런데……

치지지직!

갑자기 전화선 너머에서 찢어지는 듯한 고주파 노이즈가 폭발했다.

그리고 그 노이즈 밑바닥에서 기괴할 정도로 늘어지고 짓이겨진 목소리가 기어 나왔다.

여학생의 목소리와 똑같은 음색이었지만 감정이 완전히 거세된 차갑고 축축한 음성이었다.

  • [엄마…… 나 이제 집에 들어가…… 독서실 끝나고…… 이제 들어가…….]

스튜디오 모니터 스피커가 비명을 지르듯 진동했다.

조정실의 유진이 기겁하며 페이더를 내리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도윤이 번쩍 손을 들어 유진을 제지했다.

도윤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스피커를 타고 울리는 저 괴이한 목소리는 기계적인 에코가 아니었다.

어두운 복도 구석에서 서서히 사연자의 등 뒤를 향해 기어오고 있는 실체적인 '무언가'였다.

  • 꺄악! 소리가…… 소리가 바로 등 뒤까지 왔어요! 문이 안 열려요! 비밀번호를 누르는데 손이 굳어서……!

여학생의 절규가 터져 나왔다.

도윤은 마이크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이대로 전화를 끊으면 저 아이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는 무시무시한 공포가 심장을 조여왔다.

"듣고 있죠? 내 말 들려요?"

도윤의 목소리가 스튜디오의 정적을 강하게 내리쳤다.

"지금 당신 등 뒤에 있는 건 당신의 목소리가 아닙니다. 거짓말로 숨기려 했던 두려움이 어둠 속에 고인 것뿐이에요. 뒤돌아보지 마세요. 확인하려 하지 마세요."

  • 흐흑…… 무서워요, 아저씨……!

"숨을 들이쉬세요. 그리고 당신 진짜 목소리로 문을 향해 말하세요. 엄마, 나 왔어. 늦어서 미안해. 거짓말해서 미안해, 라고요."

도윤은 한 글자 한 글자에 온 힘을 담아 멘트를 쏟아냈다.

"두려움에 숨지 말고 당신의 진짜 목소리를 내세요. 그리고 손잡이를 내리세요. 지금 당장!"

그 순간이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여학생이 목이 터져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 엄마! 나 왔어! 늦어서 미안해!

삐빅, 삐비비빅- 철컥!

도어락이 풀리는 맑은 전자음과 함께 현관문이 거칠게 열리고 쾅 닫히는 소리가 스튜디오를 뒤흔들었다.

동시에 전화선 너머 복도에서 맴돌던 기괴한 목소리가 허공으로 흩어지듯 뚝 끊어졌다.

  • 헉…… 헉…… 들어왔어요. 집 안이에요…… 엄마가 나왔어요…… 살았어요……!

안도감에 젖은 사연자의 울음소리를 끝으로 전화가 툭 끊어졌다.

스튜디오 안에는 거친 숨을 몰아쉬는 도윤의 숨소리만이 남았다.

그러나 이상한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지이잉-!

스튜디오 B의 노후된 믹싱 콘솔 전체가 강렬한 공진을 일으키며 푸르르 떨기 시작했다.

조정실 유리창 너머의 유진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벽면을 가리켰다.

도윤이 고개를 들었다.

스튜디오 벽면에 매달려 붉게 타오르던 낡은 ON AIR 램프.

그 붉은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탈색되더니 칠흑 같은 어둠을 꿰뚫는 시리도록 순수한 청백색, 눈부신 ‘푸른빛’으로 강렬하게 발광하고 있었다.

"……어?"

도윤의 입에서 멍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스튜디오를 가득 채운 푸른 잔광 속에서 멈춰 있던 콘솔의 오디오 레벨 메터 바늘들이 일제히 최고치를 향해 솟구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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