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해가는 영지의 도서관장이 되었습니다

6화: 지워진 기록과 푸른 싹
바닥 아래에서 울린 쇠소리가 서가 사이의 침묵을 깼다.
탁자 위에 놓인 촛불이 가늘게 떨렸다. 마르타는 쥐고 있던 깃펜을 내려놓으며 마룻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나무 틈새로 묵직한 냉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가씨, 방금 밑에서 분명 쇠가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어요.”
“네, 들었습니다.”
에블린은 목록대 모서리에 손을 얹은 채 책상 위의 종이를 살폈다. 마르타가 정리한 대조표에는 낮에 압류 대리인이 들이민 서류의 모순이 적혀 있었다. 창고 자루 칠십삼 번의 중복 배급 기록과 두 번 적힌 보관품 백열두 번이었다.
“마르타 아주머니.”
“네, 아가씨.”
“보고 들은 것을 빠뜨리지 않고 적는 사람만이 장부의 빈틈을 밝힐 수 있습니다. 아주머니는 오늘 아주 중요한 일을 해내셨어요.”
에블린이 목록대에서 얇은 가죽 장부를 펼쳤다. 하르트 고대 도서관의 임시 대출증이었다.
“이제 아주머니께 정식으로 책을 맡기려 합니다.”
마르타가 깜짝 놀라며 두 손을 모았다.
“제가요? 아가씨, 저는 그저 하녀예요. 한스처럼 손재주가 좋지도 않고 오스카 영감처럼 곡식을 다뤄 보지도 못했습니다. 글자도 겨우 읽는데요.”
“장부는 화려한 문장으로 쓰는 게 아니에요. 더하거나 빼지 않는 정직함으로 지키는 겁니다. 목록대도 이미 아주머니를 ‘장부를 읽는 눈’으로 인정했어요.”
에블린은 깃펜을 들어 임시 대출증에 글씨를 적었다.
대출자 마르타. 서명 에블린 폰 하르트.
대출 목적 오래된 가문 장부의 지워진 기록 복원 및 채무 항목 검증.
반납 기한 이틀 뒤 해 질 무렵.
펜 끝이 떨어지자 서가 깊은 곳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번졌다. 서가 틈에서 얇은 양장본 한 권이 미끄러져 나왔다.
《기록 보존과 채무 장부 검증의 기초》.
에블린이 책을 두 손으로 받아 마르타에게 건넸다.
“기한은 이틀입니다. 책장을 뜯거나 적셔선 안 돼요. 책이 알려 주는 대로 차근차근 따라가세요.”
마르타가 떨리는 손으로 책을 받았다. 가죽 표지에 닿은 손가락 끝에서 룬 문자가 떨리더니 익숙한 제국어로 바뀌었다.
“글자가…… 저한테 읽혀요.”
“첫 장을 넘겨 보세요.”
마르타가 마른침을 삼키며 책장을 열었다. 푸른빛이 그녀의 눈동자에 어렸다.
‘먹은 긁어낼 수 있어도 종이에 가해진 압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감춘 글자를 보려거든 불빛을 눕히고 눌린 결을 따라 시선을 흘려라.’
마르타의 눈빛에서 두려움이 가시고 숫자를 헤아릴 때의 침착함이 돌아왔다.
“불빛을 눕히라고요?”
“네. 아주머니가 읽은 그대로 해 보세요.”
마르타는 촛대를 들어 오래된 가문 재산 목록의 마지막 장에 비스듬히 비췄다. 비스듬한 촛불 아래에서 검게 지워졌던 ‘지하’라는 단어 주변으로 희미한 굴곡이 드러났다. 종이를 짓눌렀던 펜촉 자국이 선명한 요철을 만들었다.
“보입니다!”
마르타가 손가락으로 파인 자국을 짚었다.
“‘지하 보관소 열쇠 및 초석 관리 대장’…… 그 앞에 백열두 번이라는 번호가 있어요!”
에블린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낮에 압류 대리인이 가져온 서류에 두 번 적혀 있던 바로 그 번호군요.”
마르타가 책장을 넘겼다. 책 속의 문장이 푸른 잔상을 그리며 지식을 건넸다.
‘설립 인가에 속한 정초석과 관리 대장은 영구 비매각 보존품이다. 이는 가문의 어떠한 사적 채무에도 담보로 제공될 수 없으며 압류 대상에서 영구히 제외된다.’
마르타가 벌떡 일어났다.
“아가씨, 백열두 번은 담보가 될 수 없는 물건이에요! 가문이 생길 때 황실 칙령으로 지정된 보존 대장입니다. 저들이 멋대로 담보 목록에 끼워 넣은 거예요!”
그 순간 목록대가 환한 빛을 뿜었다.
[기록되지 않은 진실이 복원되었습니다.]
[지하 보관소의 정초석 봉인을 해제합니다.]
쿠구구궁.
목록대 앞 바닥에서 무거운 돌 긁히는 소리가 났다. 마룻바닥 세 칸이 아래로 꺼지며 석조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늘한 공기가 훅 끼쳤다.
“에블린! 마르타!”
문이 열리며 루카스가 램프를 든 채 뛰어들어왔다. 그는 바닥에 열린 석단을 보고 굳어 버렸다.
“바닥이 왜……!”
“오라버니, 조용히 하세요.”
에블린이 낮게 말했다.
“저들이 내일 가져가려던 보관품 백열두 번의 진짜 자리가 열렸어요.”
셋은 석단을 밟고 내려갔다. 루카스가 램프를 높이 들었다.
거친 화강암으로 둘러싸인 작은 석실 한가운데에 석함 하나와 거대한 검은 정초석이 놓여 있었다.
석함 위에는 하르트 가문의 문장과 고대 제국의 독수리 인장이 새겨져 있었다.
뚜껑을 열자 양피지 묶음과 청동으로 주조된 칙령 현판이 드러났다.
마르타가 양피지를 살폈다.
“‘크로노스 제국 건국 칙령에 따른 도서 보존소 지정서’. 하르트 남작가는 제국의 지식을 보존하는 대가로 이 터를 하사받았고 도서관과 정초석은 어떤 사적 채무로도 몰수할 수 없다고 적혀 있어요.”
루카스가 현판의 금빛 글귀를 내려다보았다.
“그럼 자작부인은 이 사실을 알고도 도서관을 빼앗으려 목록을 조작했단 말인가?”
“그렇죠. 백열두 번을 일반 보관품처럼 꾸며서 도서관 전체를 넘기려 한 겁니다.”
에블린이 양피지 원본을 갈무리했다.
“우리에겐 확실한 방패가 생겼어요. 황실 칙령을 어기고 도서관을 압류할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루카스가 주먹을 쥐었다. 젊은 영주의 눈에 단단한 기백이 어렸다.
“내일 정오가 기다려지는군.”
지하에서 올라와 서류를 정리했을 때는 창밖이 푸르스름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그때 도서관 문밖에서 숨찬 외침이 들렸다.
“영주님! 아가씨!”
문이 벌컥 열리며 한스가 나타났다. 바지는 진흙투성이였고 두 손은 얼음물에 젖어 붉게 얼어 있었다.
“한스? 밭에 또 얼음이 얼었나?”
“아닙니다, 영주님! 밭이…… 남쪽 밭이요!”
한스가 떨리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손바닥 위에 차가운 흙덩이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검은 흙 한가운데에서 선명한 푸른 싹이 돋아나 있었다.
겨울 서리를 뚫고 나온 줄기는 굵고 단단했으며 잎 끝에는 은은한 금빛 이슬이 맺혀 있었다.
“싹이 텄습니다!”
한스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어제 잎이 누렇게 변했던 자리입니다! 새벽에 나가 보니 눈이 녹아내리면서 온 밭고랑마다 이 새싹들이 땅을 뚫고 올라왔습니다! 밭 전체가 살아났습니다!”
에블린이 일어섰다.
“밭으로 가 봐요.”
일행은 남쪽 밭으로 달렸다.
언덕을 넘어 보리밭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모두가 걸음을 멈추었다.
한스가 열어 둔 물길을 따라 밭 전체의 얼음이 풀려 있었고 그 위로 손가락 두 마디 크기의 푸른 보리 새싹들이 빽빽하게 솟아 있었다.
아침 햇살 아래에서 푸른 싹들이 바람을 맞으며 금빛 물결을 그렸다.
모여든 영지민들이 무릎을 꿇고 흙을 만지며 울먹였다.
“보리가 살았어.”
루카스는 밭두렁에 주저앉아 흙을 한 줌 쥐었다. 흙은 얼지 않고 봄날처럼 부드러웠다.
“살았구나. 우리 영지가…… 정말 숨을 쉬기 시작했어.”
루카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에블린은 한스 곁으로 다가갔다. 한스는 품에서 꺼낸 책을 보였다.
[토양의 냉기를 몰아내고 지열의 맥을 잇다. 첫 번째 순환 완료.]
“한스 씨가 매일 흙을 살피고 물길을 지켜 준 덕분이에요.”
“아가씨, 책이 아니었다면 저는 진작 밭을 버렸을 겁니다.”
그때 저택 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정오를 알리는 괘종시계가 울리기 시작했다.
어제의 압류 대리인들이었다. 그들은 거만한 얼굴로 현관 앞에 마차를 세웠다.
루카스가 눈물을 닦고 일어섰다.
“가자. 우리 것을 지키러.”
저택 마당에는 확인관이 서류 뭉치를 든 채 서 있었다. 뒤에는 용병 둘이 쇠사슬과 밀랍 통을 들고 버텼다.
“약속한 정오다, 루카스 남작.”
확인관이 턱을 치켜들었다.
“보관품 백열두 번을 내놓지 못한다면 도서관을 봉인하겠다. 창고의 남은 보리 마흔두 자루도 지금 압류한다.”
루카스가 마주 섰다.
“도서관의 문은 닫히지 않는다. 곡식 한 톨도 넘겨줄 수 없다.”
“자작부인과의 계약을 어기겠다는 건가? 영지의 압류를 방해하면 황실 법정에 고발하겠다!”
“황실 법정이라니 마침 잘됐군요.”
에블린이 걸어 나왔다. 마르타가 지하에서 가져온 청동 현판과 칙령 사본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묵직한 소리가 마당을 울렸다.
확인관의 시선이 흔들렸다.
“이게…… 무슨 짓이지?”
마르타가 《기록 보존과 채무 장부 검증의 기초》를 펼치며 똑똑히 말했다.
“제국 건국 칙령 제사십칠 조. 하르트 도서관의 정초석과 관리 대장은 영구 비매각 보존품으로 지정되어 있다.”
마르타는 종이를 확인관 눈앞에 내밀었다.
“조작된 목록의 백열두 번은 정초석 관리 대장의 고유 번호입니다. 법적으로 담보 설정이 불가능한 황실 지정 보존물을 사적 채무에 끼워 넣은 행위는 공문서 위조 및 황실 모독에 해당합니다.”
확인관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에블린이 덧붙였다.
“우리는 당장 황실 감찰관에게 이 문서를 보낼 수 있습니다. 헬레나 자작부인이 위조 장부를 어떻게 설명할지 궁금하네요.”
확인관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용병들도 슬금슬금 물러섰다.
“이, 이건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다. 돌아가서 다시 확인하겠다.”
“착오가 아니라 사기였겠지요.”
루카스가 검자루를 잡으며 서늘하게 말했다.
“다시 올 때는 정당한 서류를 들고 와라. 거짓 번호가 하나라도 섞여 있다면 영주로서 네놈들을 옥에 가둘 것이다.”
확인관은 서류를 챙겨 마차로 뛰어 들어갔다. 마차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아났다.
마당에 모인 영민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마르타가 비틀거리자 에블린이 그녀의 팔을 부축했다.
“잘하셨어요, 마르타 아주머니.”
“제가…… 정말 해낸 건가요 아가씨?”
“그럼요. 아주머니가 찾아낸 기록이 우리를 구했습니다.”
마르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때 도서관 모퉁이에서 조심스러운 인기척이 났다. 대장간에서 일하는 소년 레온이 기둥 뒤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레온은 손에 쥔 부러진 쇠망치를 만지작거리며 에블린을 바라보았다.
“저기…… 아가씨. 한스 아저씨가 그러는데…… 도서관에 가면 부러진 쇠를 고치는 책도 빌릴 수 있나요?”
에블린의 입가에 맑은 미소가 떠올랐다.
도서관의 서가가 또 다른 손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