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잡이 펜싱부의 마지막 대진표

1화: 낯선 왼손의 거리
최가은은 마스크를 벗자마자 상대의 팔꿈치를 봤다.
연습 점수판에는 4 대 5가 켜져 있었다. 대학 펜싱부의 첫 대련에서 가은은 네 점을 먼저 땄고, 마지막 한 점만 남겼다. 상대인 강태오는 숨을 몰아쉬면서도 검끝을 내리지 않았다. 그의 오른발 발목에는 검은 보호대가 감겨 있었다.
“한 번 더.” 태오가 말했다.
가은은 장갑을 고쳐 끼웠다. 왼손 손목이 땀에 젖어 검 손잡이가 미끄러웠다. 오른손잡이 상대와 맞설 때 왼손은 분명한 이점이었다. 검끝이 들어오는 각도가 달라 상대의 방어가 늦었다. 하지만 그 이점은 첫 몇 번뿐이었다.
“준비. 시작.”
가은은 곧장 앞으로 들어갔다. 태오가 뒤로 물러나며 방패를 세웠다. 그녀는 빈 몸통을 찌르려다 검끝을 멈췄다. 태오가 먼저 손을 뻗었고, 심판이 공격 우선권을 인정했다. 가은은 패리로 막고 반격해 득점을 노렸지만 검끝은 어깨 바깥으로 밀려났다.
불이 태오 쪽에 켜졌다. 4 대 6.
“거리 너무 빨라.” 주장 윤서윤이 코트 바깥에서 말했다. “가은아, 네가 먼저 들어갈 때는 발이 아니라 손이 시작이야.”
“손부터 내면 태오 선배가 막아요.”
“그래서 발을 멈추라는 게 아니라, 첫 신호를 나눠 쓰라는 거야.”
가은은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녀는 왼발을 앞으로 두고 어깨를 낮췄다. 태오는 오른발을 조금 빼고 검끝을 가은의 몸통에 맞췄다. 상대의 발목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가은은 그 흔들림을 공격 기회로 오해하고 싶지 않았다.
“시작.”
이번엔 한 걸음만 내디뎠다. 태오의 검이 들어왔고 가은은 몸을 옆으로 틀었다. 그가 찌르기를 이어 가기 전에 가은이 손목을 돌려 칼날을 쳐냈다. 그녀는 반격했다. 심판의 불이 켜졌다.
양쪽 불이 동시에 들어왔다.
“우선권은 태오.” 심판이 말했다.
태오는 검을 내리며 숨을 골랐다. “왼손 각도는 어렵네. 그런데 두 번째 공격은 읽었어.”
가은은 마스크 안에서 땀을 삼켰다. 4 대 7. 첫 득점의 기억보다 방금 놓친 타이밍이 선명했다.
서윤은 점수판을 보았다. “교대하자. 수아, 기록해.”
임수아는 태블릿에 경기 시간을 적었다. “가은의 첫 공격은 두 번 성공, 세 번째는 우선권을 뺏겼어요. 태오는 첫 동작에 발목을 피하고 손부터 뻗었고요.”
“나 발목 안 피했어.” 태오가 말했다.
“영상에는 보여요.” 수아는 화면을 돌려 보여 줬다. 태오의 오른발이 미세하게 뒤로 물러났고, 무게가 왼쪽에 쏠렸다.
태오는 화면을 보다가 태블릿을 밀어냈다. “그게 부상 때문이라는 뜻은 아니야.”
서윤이 그를 노려봤다. “부상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일단 단체전 대진표부터 채워야 해.”
가은은 장갑을 벗으며 물었다. “등록 선수가 몇 명인데요?”
“네 명.” 서윤이 대답했다. “단체전은 세 명이 필요하고, 후보까지 있어야 하니까 한 명이 빠지면 끝이야.”
“부원이 더 없어요?”
“지난달에 둘이 나갔어. 학교가 다음 학기까지 팀을 유지할지 심사 중이야. 이번 지역대회 결과가 중요해.”
가은은 물병을 들었다. 목이 말랐지만 한 모금만 마셨다. 아직 경기가 끝나지 않았다. “그러면 저는 주전 후보인가요?”
서윤은 말끝을 흐렸다. “넌 신입이고, 다른 선수보다 경험이 짧아. 하지만 왼손잡이라 상대에게 낯선 건 확실해.”
“낯선 게 점수는 아니죠.”
“맞아. 그래서 거리와 팀 신호를 익혀야 해.”
태오는 자리에 앉아 발목 보호대 끈을 다시 조였다. 가은은 그의 눈길이 닿는 걸 느꼈다. 그는 주전 자리를 빼앗길까 경계하는 동시에, 다친 발을 숨기고 있었다.
서윤은 팀원들을 원형으로 불러 세웠다. “이제 릴레이 훈련할 거야. 각자 3점씩 이어 가. 가은이는 태오의 수비 뒤에 들어가.”
“제가요?”
“넌 각도가 달라서 태오가 만든 틈을 활용할 수 있어.”
“제가 뭘 신호로 알아요?”
“검끝이 두 번 움직이면 안으로, 한 번이면 바깥.” 태오가 말했다.
그는 검을 들어 시범을 보였다. 가은은 신호를 따라 찌르려 했지만, 태오의 검끝이 움직이기 전에 그녀가 먼저 나갔다. 두 검이 부딪혔고, 심판은 태오의 공격을 인정했다.
“방금도 먼저 움직였어.” 서윤이 말했다.
“제가 기다리면 늦어요.”
“네가 먼저 움직이면 팀 신호가 사라져.”
가은은 마스크를 다시 썼다. 귀 안쪽이 울렸다. 코트 바깥의 환풍기 소리와 발끝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한꺼번에 들렸다. 그녀는 태오의 눈을 바라보려 했지만 마스크 그물 너머로는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다시.” 태오가 말했다.
이번엔 가은이 움직이지 않았다. 태오의 검끝이 한 번, 두 번 흔들렸다. 두 번째 움직임에 가은은 안쪽으로 들어갔다. 태오의 공격이 몸통을 향해 들어왔고 그녀의 검이 그의 검을 쳐냈다. 하지만 그녀의 발이 뒤늦게 따라와 균형이 무너졌다. 검끝이 상대의 옆구리에서 빗나갔다.
“신호는 읽었는데 발이 늦어.” 수아가 기록했다.
“발을 먼저 두고 손을 보내.” 서윤이 말했다.
가은은 왼발을 밀어 넣었다. 이번에는 손목을 세우지 않고 몸통의 중심을 따라갔다. 태오의 칼날이 바깥으로 빠졌다. 가은은 빈 틈을 찔렀다. 불이 켜졌다.
“점수.” 수아가 웃었다.
가은은 검을 내렸다. 그녀의 발목은 조금 떨렸다. 태오가 먼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좋았어. 하지만 다음엔 내가 일부러 신호를 바꿀 거야.”
“그럼 다시 읽으면 되죠.”
“읽는 게 아니라 같이 맞춰야 해.”
태오의 말은 도전처럼 들렸다. 그가 내민 손은 악수보다 훈련을 이어 가자는 제안에 가까웠다. 가은은 손을 잡았다.
서윤은 점수판을 껐다.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 주 엔트리는 주말 테스트로 결정할 거야.”
“저도 들어갈 수 있어요?” 가은이 물었다.
“네가 팀 리듬을 지키면.”
태오는 신발을 갈아 신으려다 발목을 감싸 쥐었다. 잠깐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그는 곧 자세를 폈다. 수아만 그 모습을 봤다. 그녀는 태블릿에 무언가 적었다가 화면을 잠갔다.
가은은 체육관을 나서기 전 혼자 점수판을 다시 켰다. 4 대 7은 지워졌지만, 코트 바닥에는 발끝이 미끄러진 하얀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그 자국의 방향을 따라 한 걸음 옮겼다. 태오가 공격을 피한 곳, 자신이 팀 신호보다 먼저 움직인 곳이었다.
복도에서 서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태오야, 네 발목은 괜찮아?”
“괜찮습니다.”
“다음 대련은 쉬어.”
“그럼 대진표는 누가 채웁니까?”
대답이 없었다. 가은은 복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서윤은 태오의 발목 보호대를 바라보고 있었고, 수아는 멀찍이 떨어져 두 사람을 지켜봤다.
“저를 대진표에 넣는 게 무서우세요?” 가은이 물었다.
서윤은 고개를 들었다. “네가 못해서가 아니야. 아직 팀 경기 경험이 없어서.”
“그럼 경험을 쌓게 해 주세요.”
“한 번의 실수로 팀이 탈락할 수도 있어.”
“선배들이 실수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잖아요.”
태오는 보호대를 풀다 말고 가은을 보았다. “주전 자리 달라는 말이야?”
“아뇨. 누가 빠져도 팀에 빈자리가 생기지 않게 훈련하자는 말이에요.”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아.” 태오는 보호대를 다시 조였다. “단체전은 개인전처럼 네 점만 따면 되는 경기가 아니야. 앞 선수가 점수를 잃으면 다음 사람은 그만큼 더 따라잡아야 해.”
“알아요. 그래서 선배 신호를 맞추려고 했어요.”
“맞추는 것만으로는 안 돼. 상대가 신호를 읽으면?”
가은은 답하지 못했다. 태오는 그의 질문이 비난이 아니라 진짜 걱정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럼 새로운 신호를 만들어요. 제가 먼저 움직이는 대신, 선배가 상대의 발을 고정하면 제가 들어갈 수 있게.”
수아가 태블릿을 꺼냈다. “방금 대련에서 태오가 두 번째 공격을 할 때 오른발이 멈췄어요. 가은이가 첫 동작을 늦추면 그 순간에 바깥쪽이 열려요.”
태오는 눈썹을 찌푸렸다. “내 발목을 전술로 쓰겠다는 거야?”
“부상을 이용하자는 게 아니에요. 지금 가능한 움직임과 불가능한 움직임을 알아야 해요.” 가은은 말했다. “선배가 빠져야 하는 순간에도 조합을 유지할 수 있게요.”
서윤은 잠시 태오를 바라봤다. 그가 괜찮다고만 말하며 보호대를 조이는 동안, 주장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다음 주 테스트에는 가은이도 넣자. 태오는 회복 상태를 보고 다시 정한다.”
태오는 불만스러운 듯 입을 열었지만, 이내 보호대를 풀어 테이블 위에 놓았다. “테스트까지만이야. 내가 뛸 수 있으면 내 자리로 돌아간다.”
“네.” 가은은 말했다. “그때 제 실력으로 다시 경쟁할게요.”
태오는 한쪽 발을 조심스럽게 디뎠다. “그럼 다음번엔 신호를 하나 더 만들자. 내가 검끝을 아래로 두 번 내리면 공격이 아니라 후퇴야.”
“그러면 그 신호를 알아본 상대가 따라올 수도 있겠네요.”
“그걸 막는 게 네 연습이지.”
가은은 다시 코트로 돌아가 검을 들었다. 어깨가 무겁고, 손바닥은 땀에 젖어 있었다. 그녀는 혼자 찌르기를 반복하려다 멈췄다. 먼저 태오의 발이 멈추는 거리를 재고, 그다음에 손을 보내는 순서를 머릿속으로 그렸다.
점수판을 꺼도 코트 바닥에는 흰 자국이 남아 있었다. 첫날의 패배는 지워졌지만, 마지막 질문은 아직 경기장에 남아 있었다.
가은은 왼손에 검을 쥐고, 다음 신호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 신호를 기다리는 일도 훈련의 일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