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현장의 마지막 1분을 재생합니다

39화: 돌아온 사람의 수첩
지후는 도윤을 보자 오른손을 조금 들었다.
"전화 깨졌어. 연락 못 해서."
관자 옆에는 흰 거즈가 붙어 있었다. 왼팔은 침상 위에 놓여 있었고 무릎 아래로 바지 한쪽이 걷혀 있었다. 도윤은 지후의 입이 움직이는 것을 보다가 침상 앞에서 멈췄다.
"왜 거기 서 있어."
목소리가 조금 쉬어 있었다. 그래도 지후의 목소리였다. 도윤은 의자를 당기려다 다리를 발로 건드렸다. 드르륵 소리가 나자 옆 침상의 커튼이 흔들렸다.
"직원은요?"
"안 다쳤대. 방금 연락받았어."
지후는 해진 쪽을 보고 인사를 했다. 괜찮다는 말을 덧붙이려다가 입술을 축였다.
"물 좀 주실래요? 마셔도 된다고 했는데 뚜껑이……."
도윤이 병을 집었다. 돌려 연 뚜껑을 자기 손에 둔 채 병을 건넸다. 지후는 오른손으로 받아 두 모금 마셨다. 목울대가 움직였다. 도윤은 그제야 의자에 앉았다.
"번호 준 건 저였습니다."
지후가 물병을 내렸다.
"주소도 관할에서 확인했어. 같이 들어갔고."
"알고 있습니다."
"그럼 그다음도 알아 둬. 때린 사람이 잘못한 거야."
도윤은 손안의 뚜껑을 봤다. 홈이 손가락에 눌려 있었다. 번호를 주지 않았으면 안 갔을 거라는 말이 또 올라왔다. 지후가 팔을 움직이다 눈썹을 찌푸리자 그 말은 나오지 않았다.
"어디가 제일 아픕니까?"
"지금은 팔. 나머지는 나중에 따로 항의할 것 같고."
도윤은 웃지 못했다. 그래도 지후가 더 말해 줬으면 했다.
검사 결과를 설명하러 온 담당 의사는 팔과 무릎에 골절은 보이지 않으며 머리 검사에서도 입원이 필요한 급성 이상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관자 부근의 상처는 처치를 마쳤고 타박상은 며칠 아플 수 있다고 했다. 몇 시간 더 경과를 본 뒤 귀가 여부를 정하기로 했다.
해진은 안내문을 받아 지후 곁에 놓았다. 통증이 심해지거나 구토 같은 변화가 있으면 다시 와야 한다는 설명을 셋이 함께 들었다.
"퇴원하고 자료실은 안 갑니다. 박 형사도 오늘은 쉬세요."
"상자는요?"
"현장 담당자가 확인 중입니다. 아직 내용 보고는 없어요. 이도겸 씨 면담도 담당자에게 맡겼습니다. 두 분이 지금 할 일은 없습니다."
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해진을 다시 불렀다.
"내일 드릴 자료가 있습니다. 아버지 수첩입니다."
도윤의 손에서 뚜껑이 멎었다.
"집에 있어요. 오늘은 위치만 확인하고 내일 가져오겠습니다."
해진은 잠시 지후를 봤다.
"무슨 자료인지 먼저 말씀하세요."
"세포라 랩 이름이 나옵니다. 검은 유리도요."
저녁이 되어 퇴원 수속을 마쳤다. 귀가해도 된다는 설명을 들은 뒤에도 도윤은 안내문을 한 번 더 읽었다.
도윤이 몸을 숙이자 지후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어깨만 빌려줘."
지후의 손이 도윤 어깨에 얹혔다. 그 무게를 받치는 동안 도윤은 바닥을 봤다. 두 짝의 신발이 벗겨지고 손이 떨어졌다. 도윤은 바로 몸을 펴지 않았다.
거실 불을 켠 지후가 해진에게 도착 연락을 했다. 도윤의 전화였다. 돌아오는 길에 처방받은 약을 챙겼고 동행한 해진이 두 사람을 현관 앞까지 데려다준 뒤였다.
지후는 소파에 앉아 왼팔 아래 쿠션을 끼웠다. 도윤은 식탁 위에 약 봉투와 안내문을 놓았다. 손이 자꾸 할 일을 찾았다. 식탁을 닦고 이미 똑바른 컵을 돌렸다.
"아까 왜 그렇게 봤어?"
도윤이 멈췄다.
"말을 하는데 못 들은 것처럼 봤잖아."
"들었습니다."
"그럼 됐어. 지금도 들리지?"
도윤은 젖은 행주를 접었다. 지후가 기다렸다.
"대답이 없으면 다시는 못 들을 것 같았습니다."
말하고 나니 행주 끝에서 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도윤은 그것을 다시 닦지 않았다.
지후는 깨진 전화기를 식탁 끝에 놓았다. 액정에 난 금이 천장 불을 받아 희게 보였다.
"그래서 아버지 수첩 얘기를 했어."
도윤이 고개를 들었다.
"내가 못 돌아왔으면 서랍에 그대로 있었겠더라. 갖고 있는 사람이 말 안 하면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
지후는 TV 아래 낮은 서랍장을 가리켰다. 오른쪽 두 번째 칸. 도윤이 열자 오래된 보증서와 종이 봉투가 있었다. 봉투 위에는 박성우라고 적혀 있었다.
"그겁니다."
지후의 말투가 바뀌었다. 도윤은 봉투 입구로 손을 넣지 않고 식탁에 옮겼다.
"언제 찾았습니까?"
"아버지 유품 정리할 때. 오래됐어."
"연구소 이름도 그때 봤습니까?"
지후가 입술을 눌렀다.
"그때는 몇 장만 봤어. 어디에 쓸지도 모르겠는 메모들이라 넣어 뒀고. 세포라 랩을 확인하고 다시 꺼내 봤어."
도윤은 서랍에 남은 빈자리를 봤다. 자기는 며칠이나 이 집에서 잤다. 가까운 곳에 모르는 종이가 있었다는 생각보다 지후가 그 종이를 보고도 함께 출근했다는 사실이 먼저 걸렸다.
도윤은 지후의 쿠션 위 팔을 보고 질문을 삼켰다. 지후가 먼저 고개를 들었을 때에야 물었다.
"아버지가 뭘 했는지 먼저 알고 싶었어."
"혼자요?"
지후는 대답하지 않았다. 쿠션 밖으로 나온 손가락이 구부러졌다가 통증 때문에 펴졌다.
도윤은 봉투를 식탁 안쪽에 밀어 두었다. 지금 열면 자기에게 필요한 문장부터 찾을 것 같았다.
"내일 팀장님 앞에서 같이 봅시다."
지후가 그러자고 했다. 도윤은 그제야 저녁을 데우러 갔다. 두 사람 몫의 그릇을 꺼내는 손길이 평소보다 느렸다.
다음 날 지후는 외투 왼쪽 소매에 팔을 넣는 데 시간이 걸렸다.
해진은 자료 제출 때문에 잠시 들르는 것으로 하자고 했다. 현장 복귀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해진이 보낸 차를 타고 자료실로 왔다. 지후가 의자에 앉는 동안 도윤은 맞은편 자리를 비워 뒀다.
봉투에서 나온 것은 손바닥보다 조금 큰 검은 수첩이었다. 모서리의 겉감이 벗겨져 갈색 속지가 보였다. 첫 장에 박성우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버지 글씨입니다."
지후가 말했다.
해진은 수첩 대신 빈 종이를 먼저 밀었다.
"언제 어디서 받았고 어디에 보관했는지 적어 주세요. 기억나는 범위만요."
지후는 오른손으로 펜을 잡았다. 아버지 유품을 정리하며 집으로 가져왔고 같은 서랍에 보관했다는 설명을 적었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남겼다.
"그동안 다른 사람에게 보여 준 적은요?"
"없습니다. 이 수첩은요."
해진이 마지막 말을 바라봤다. 지후는 펜을 멈췄다.
"아버지 얘기하고 구분하려고 한 말입니다. 수첩 내용을 보여 준 사람은 없습니다."
"최근에 다시 읽은 때도 적으세요."
지후는 연구소 이름을 확인한 뒤 꺼냈다는 말을 적었다. 그 아래에서 한참 멈췄다.
"그제 밤에 해당 부분을 다시 읽었습니다. 아침에 말씀드리려고 들었다가 두고 나왔어요."
도윤은 그제 밤이라는 말을 들었다. 함께 들어와 이불을 폈던 밤이었다. 지후가 방으로 간 뒤 자기는 정우석의 확인서 사진을 생각하고 있었다.
"혹시 관련 없는 메모면……."
지후가 말을 끊었다. 펜 끝을 종이에서 뗐다가 다시 댔다.
"아닙니다. 관련 없을 거라고 제가 먼저 말하고 싶었습니다."
해진은 그가 쓰는 동안 기다렸다.
"이 자료는 서윤 사건 담당자에게 인수 경위를 남겨 넘기겠습니다. 박 형사는 발견하고 보관한 사람으로 설명하세요. 아버지 행적을 확인하는 일은 다른 사람이 맡을 겁니다."
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진은 담당자에게 연락해 유품 수첩이 제출될 예정임을 알리고 인수를 요청했다. 출처가 박성우 형사의 개인 기록이라는 설명도 했다.
도윤은 이름이 보이는 첫 장을 봤다. 자기가 내는 자료라면 가족이 기억하는 필적과 작성자 확인을 구별해 달라고 했을 것이다. 입 밖으로 꺼내려니 지후가 먼저 말했다.
"제 눈에 아버지 글씨라는 겁니다. 그것도 확인해 주세요."
해진이 알겠다고 답했다. 도윤은 수첩 가운데에 걸린 낡은 가름끈으로 시선을 옮겼다.
지후는 오른손으로 가름끈이 든 곳을 펼쳤다.
위쪽에 세포라 랩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아래 두 줄은 잉크가 번졌지만 다음 줄의 글자는 선명했다.
검은 유리 시편. 차광 상태 동일.
도윤은 의자 등받이에서 몸을 뗐다.
작은 표가 있었다. 접촉 있음과 접촉 없음. 두 칸 아래로 각각 반응이라는 글자가 이어졌고 끝에는 물음표가 붙어 있었다. 숫자나 사람 이름은 없었다. 표 바깥에 실험 설명 청취라고 적혀 있었다.
"만져 보고 차이를 적은 겁니까?"
도윤의 질문에 지후가 아래를 가리켰다.
시연 못 봄. 원기록 확인 필요.
도윤은 펼친 면에서 손을 물렸다. 표를 그린 사람과 실험한 사람이 같은지는 이 수첩에 쓰여 있지 않았다.
"아버지가 했다는 뜻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들었다는 줄은 여기 있고요."
지후가 말했다.
해진은 해당 면과 앞뒤 위치를 확인하고 별지에 적었다. 글이 번진 부분을 빈칸으로 남긴 뒤 수첩을 언제 작성했는지 확인할 자료가 있는지도 물었다. 지후는 모른다고 답했다.
도윤은 검은 유리라는 네 글자를 다시 봤다. 우편함으로 온 조각과 현장에서 사라진 물건이 떠올랐다. 이름은 같았다. 이 종이에는 성분도 조각의 사진도 없었다.
"세포라 랩 항목 아래 실험 설명을 들었다는 메모는 있습니다. 실제 시행한 내용은 따로 찾아야 합니다."
해진이 말했다.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응이라고 적힌 칸이 자꾸 눈에 걸렸다.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싶었지만 그 뒤에 붙은 물음표를 지울 답은 아직 없었다.
"설명한 사람 이름은 없습니까?"
"이 면에는 없습니다."
지후의 대답이 짧아졌다.
해진은 화재 사건철에서 이런 원기록의 존재가 확인되는지 담당자에게 대조를 부탁하겠다고 했다. 책임연구원이 이도겸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알았다. 하지만 그 이름을 빈칸에 써 넣지는 않았다.
도윤은 수첩을 건넨 손을 봤다. 어제는 물병을 받던 손이었다. 그 손이 내민 것을 고맙다는 말 하나로 받을 수가 없었다.
"제가 여기서 자는 동안에도 알고 계셨군요."
지후가 도윤을 봤다.
"응."
지후는 눈을 마주치려다 자기 팔로 시선을 내렸다. 이유를 덧붙이지 않는 대답이었다. 도윤은 잠깐 고개를 숙였다. 물병 뚜껑을 열어 주던 때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 뒤에 들은 말은 없앨 수 없었다.
"지금 내놓으면 아버지한테 불리한 내용도 다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 주세요."
지후는 한동안 수첩 아래쪽을 누르고 있었다. 펼친 면이 저절로 덮이지 않게 잡은 것인지 놓기 싫은 것인지 도윤은 구별할 수 없었다.
도윤이 손을 내밀었다.
"이제부터는 제가 읽겠습니다."
지후가 수첩을 돌려 놓았다. 도윤 쪽에서 글자가 바로 보였다. 아버지의 이름도 연구소의 이름도 더는 거꾸로 놓여 있지 않았다.
도윤은 아직 넘기지 않은 종이의 두께를 엄지로 받쳤다. 지후가 뒤표지에서 손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