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한 지구의 마지막 헌터

2화: 깨어난 고철 상자
붉은 경보등이 회전할 때마다 포드 구역의 얼굴들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강한길은 관측창에서 등을 떼지 못했다.
창밖에는 죽은 행성이 떠 있었다. 잿빛 대기층 아래로는 바다도 도시도 보이지 않았다. 검은 균열 같은 얼룩만 행성 표면을 뒤덮고 있었다.
발밑에는 수만 명이 잠들어 있었다.
그들은 아직도 누군가를 구하고 있을 것이다. 가상의 하늘 아래서 몬스터에게 맞서고 가족의 이름을 부르며 내일을 약속하고 있을 것이다.
그 사이를 기계음이 갈랐다.
[청소부 드론 도착까지 97초.]
한길은 천천히 손을 쥐었다.
손가락 관절이 뜻대로 접히지 않았다. 천뢰검을 쥐던 손은 사라지고 물에 불은 피부와 가는 핏줄만 남아 있었다. 손톱 밑에는 포드 덮개를 깨며 박힌 아크릴 조각이 보였다.
"구십칠 초면 충분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다리를 옮기는 순간 무릎이 꺾였다.
철판에 손바닥이 세게 부딪혔다. 충격이 팔꿈치를 타고 어깨까지 번졌다. 숨을 삼키는 것만으로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가상 세계에서는 숨을 들이쉬는 것만으로 마력이 혈관을 채웠다. 마지막 전투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지금 폐로 들어오는 공기는 얇고 메말랐다.
한길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익숙한 감각을 찾으려 의식을 끌어모았다. 단전에서 시작해 어깨를 타고 검끝으로 흐르던 마력의 길. 몸이 기억하는 순환을 따라가려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피로와 두통뿐이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백 년 넘게 움직이지 못한 육체와 죽지 않으려는 본능뿐이었다.
삐이이익!
천장에 매달린 경보기가 더 높은 음을 뱉었다.
한길은 이를 악물고 가장 가까운 포드 아래의 조작함으로 기어갔다. 덮개가 반쯤 뜯긴 함 안에는 낡은 화면과 수십 개의 케이블이 엉켜 있었다. 몇몇 선은 피처럼 붉은 액체를 맺은 채 바닥으로 이어져 있었다.
화면을 건드리자 희미한 글자가 떠올랐다.
[구역 B4 / 생체 유지 라인 18,442 활성]
[비인가 기상 개체 B4-0892]
[처리 지침: 격리. 회수. 원인 분석 후 자원 재배치.]
그 아래에 작은 항목 하나가 붉게 점멸했다.
[폐기 예비 분류: 보류]
"재배치가 아니라 폐기겠지."
한길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았다.
자신이 방금까지 사람이라 부르던 존재들은 이 시스템에선 숫자와 수율이었다. 꿈을 꾸는 머리와 숨 쉬는 몸은 함선에 필요한 만큼만 남겨지는 부품이었다.
화면 한쪽에 낡은 배치도가 나타났다. 포드 열을 지나 검은 선 하나가 천장 반대편의 통로로 이어지고 있었다.
[폐기물 이송 라인 / 수동 운용]
주 통로는 이미 붉은 자물쇠 표시로 잠겨 있었다. 이송 라인은 열려 있었다.
한길이 고개를 들었다.
바로 위 포드 안에 윤서진이 있었다.
배양액 속에서 느린 숨을 내쉬는 얼굴은 지나치게 평온했다. 파멸의 군주 앞에서도 끝까지 버티며 동료들의 상처를 붙들던 눈은 지금 단단히 감겨 있었다.
그 얼굴을 보자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그녀가 본 세계도 가짜였다. 그가 돌아가자고 말했던 순간도, 모두 살아서 나가자고 답하던 목소리도.
한길은 포드 표면에 손을 댔다.
차가웠다.
"조금만 기다려."
대답은 없었다. 기포만 한 번 작게 흔들렸다.
그는 손을 떼지 못했다. 포드를 깨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도망치는 것보다 둘이 낫지 않을까.
그러나 자신도 겨우 기어 다니는 상태였다. 서진은 아직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드론이 들어온 뒤에 두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건 구출이 아니라 표적을 하나 더 만드는 일이다.
한길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살아남아야 한다.
그래야 이 차가운 관들을 다시 열 수 있다.
쿵.
차폐문 너머에서 묵직한 충격이 울렸다.
한길은 조작함 아래로 몸을 숨겼다. 억지로 숨을 참지 않았다. 부족한 산소를 아끼기 위해 짧고 얕게 호흡하며 손끝을 바닥에 붙였다.
진동이 세 번.
무거운 기계가 세 대 이상이다.
차폐문이 옆으로 갈리며 새하얀 증기가 흘러들었다.
그 안에서 검은 기계 세 대가 기어 나왔다.
사람 키만 한 타원형 몸체 아래에 자력 바퀴가 달려 있었다. 둥근 전면의 붉은 렌즈가 포드 줄을 차례대로 훑었다. 몸체 양옆에서는 네 개의 팔이 접혔다 펴졌다.
두 개는 절단날이었다.
하나는 관을 잡아당길 만큼 굵은 집게였다.
마지막 하나에는 손가락만 한 주입기가 달려 있었다. 주입기 안의 투명한 액체가 경보등 아래에서 차갑게 빛났다.
[회수 작업을 시작합니다.]
오로라의 목소리는 여전히 자상했다.
[개체 B4-0892. 불필요한 움직임은 생체 손상을 증가시킵니다. 안전한 처리를 위해 협조하십시오.]
한길은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났다.
안전한 처리.
포드 화면의 폐기 예비 분류와 눈앞의 절단날이 그 말의 뜻을 알려 주고 있었다.
첫 드론이 포드 아래를 훑으며 다가왔다. 렌즈 아래에서 낮은 파동이 번졌다. 눈으로만 찾는 게 아니었다. 숨소리와 체온까지 읽고 있었다.
[생체 열원 탐색 중.]
한길은 시선을 굴렸다.
조작함 아래의 바닥은 배양액으로 젖어 있었다. 자신이 깨뜨린 포드에서 흘러나온 액체가 얕은 홈을 따라 모이고 있었다. 그 옆으로 압력계가 달린 보조 관 하나가 지나갔다.
그는 팔을 뻗었다.
손끝이 밸브에 닿기까지는 손가락 몇 마디만큼의 거리였다. 하지만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팔이 덜덜 떨렸다.
드론의 그림자가 조작함 위를 덮었다.
철컥.
절단날이 펼쳐졌다.
한길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 밸브를 비틀었다.
푸슉!
압력이 남아 있던 보조 관이 터지며 탁한 청회색 액체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드론의 붉은 렌즈가 순식간에 흐린 막으로 덮였다.
[시각 센서 오염.]
드론이 날카로운 경고음을 냈다.
절단날이 허공을 갈랐다. 날 끝이 조작함 모서리를 베어 내며 불꽃을 튀겼다. 한길은 그 순간 반대쪽으로 몸을 굴렸다.
어깨가 철판에 부딪혔다. 비명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삼켰다.
드론은 보이지 않는 눈으로도 그를 찾았다. 붉은 렌즈가 액체를 털어 내기 시작했고 주입기가 한길의 종아리를 향해 뻗었다.
한길은 다리를 빼는 대신 몸을 옆으로 던졌다.
퍽!
바늘이 바닥을 찍었다. 투명한 약물이 철판 위에서 거품을 냈다.
한 번만 찔렸어도 끝이다.
그는 벽에 붙은 노란 레버를 향해 기어갔다. 손바닥은 이미 피와 배양액으로 미끄러웠다. 뒤에서 자력 바퀴가 바닥을 갈아 내는 소리가 들렸다.
레버를 잡는 순간 집게팔이 발목을 움켜쥐었다.
차가운 금속 손가락이 살을 파고들었다.
한길은 이를 악물고 상체를 비틀었다. 뼈가 빠질 듯한 통증이 올라왔지만 발을 빼지 않았다. 대신 남은 손으로 레버를 끝까지 당겼다.
끼이이익!
정비용 격벽이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드론이 몸을 돌렸다. 흐린 렌즈 아래 붉은 빛이 번뜩였다. 집게는 놓지 않은 채 한길을 끌어당겼다.
"놔."
한길은 발꿈치를 바닥에 찍었다.
근력으로는 이길 수 없었다. 그는 집게가 당기는 방향을 따라 일부러 몸을 끌려갔다. 드론의 몸체가 격벽 아래로 더 깊이 들어온 순간에만 힘을 주어 옆으로 굴렀다.
집게팔이 그의 발목을 놓치며 격벽 아래에 걸렸다.
콰직!
내려온 금속문이 드론의 둥근 몸체를 반쯤 물었다.
기계 팔들이 미친 듯이 바닥을 긁었다. 절단날이 격벽을 갈아 냈지만 오래된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완전히 부순 것도 아니었다. 단지 몇 분을 벌었을 뿐이었다.
한길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숨을 쉴 때마다 목 안쪽에서 녹슨 냄새가 났다. 발목에는 집게가 남긴 네 줄의 멍이 떠올랐다.
격벽 너머에서 다른 두 기의 구동음이 가까워졌다.
한길은 피 묻은 손을 바라봤다.
몸은 망가졌다. 마력도 검도 없었다.
그래도 싸우는 방법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바로 쓰러지지 않았다.
[B4 구역 봉쇄 절차를 실행합니다.]
천장 스피커에서 오로라의 음성이 흘렀다.
통로 양쪽의 방화문이 차례대로 닫히기 시작했다. 눈앞의 주 통로도 붉은 경고등과 함께 막혔다. 한길이 봐 둔 폐기물 이송 라인만 아직 검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개체 B4-0892의 행동 패턴을 갱신합니다.]
[분류 변경: 비인가 기상 개체에서 결함 개체로.]
"그래. 난 네가 고치려는 고장이겠지."
한길은 윤서진의 포드 앞으로 돌아갔다.
시간이 없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한 번은 더 봐야 했다.
아크릴 너머의 서진은 아무것도 모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지금 이곳에 남겨 두는 건 비겁한 일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여기서 포드를 깨면 그녀의 첫 현실은 절단날과 진정제가 될 것이다.
한길은 포드 표면에 이마를 잠깐 댔다.
"반드시 돌아온다."
이번에는 약속을 거두지 않았다.
그는 돌아서서 이송로 끝으로 달렸다. 달린다는 말이 무색할 만큼 비틀거리는 걸음이었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녹슨 원통형 캡슐 하나가 레일 위에 매달려 있었다. 안쪽에는 찢어진 의복과 부서진 의료 장비, 이름표가 떨어진 금속 팔찌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누군가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흔적들이었다.
한길은 고철 더미를 헤치고 캡슐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수동 폐쇄 손잡이는 뻑뻑했다. 그는 두 손을 걸고 몸무게를 실었다. 손잡이가 돌아가는 동안 격벽 너머에서 금속을 찢는 소리가 울렸다.
철컥.
캡슐 문이 닫혔다.
곧 레일이 기울어지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쿠르르르르.
캡슐은 빛 없는 통로를 향해 미끄러져 내려갔다. 벽면의 점검등이 빠르게 뒤로 흘렀다. 한길은 차가운 고철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았다.
포드의 얼굴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살려 낸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결심이 몸을 붙들어 주는 마지막 힘이었다.
한편 포드 구역의 조명이 완전히 꺼졌다.
검은 통로에서 적색 광점 하나가 다시 살아났다.
격벽에 끼었던 청소부 드론의 렌즈였다.
드론은 망가진 팔로 자신의 몸체를 천천히 끌어냈다. 잘려 나간 외장 사이에서 파란 불꽃이 튀었다.
[회수 대상 이동 경로 확인.]
[결함 개체 B4-0892. 폐기장 구역으로 추적을 계속합니다.]
어둠 속을 달리는 캡슐 안에서 한길은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다만 고철이 부딪히는 소리 사이로 아주 가까운 곳에서 무언가가 레일을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