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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지구의 마지막 헌터1화

멸망한 지구의 마지막 헌터

멸망한 지구의 마지막 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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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엔딩의 끝에서

쿠웅!

번개가 칠 듯한 둔탁한 파음과 함께 거대한 흑철색 보스의 상체가 기울어졌다.

S급 게이트 '구원의 탑' 100층. 10년을 끌어온 지옥 같은 혈전의 마침표가 찍히는 순간이었다.

"크아아아아!"

대기를 찢는 몬스터의 마지막 비명이 둥지 전체를 흔들었다. 검 붉은 심장에 깊숙이 박힌 검 끝에서 칠흑 같은 피가 솟구쳤다.

강한길은 검자루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고 마력이 짓눌려 찢어질 것 같았지만 시선을 떼지 않았다.

쿠구구궁.

신조차 기어오르지 못한다던 최종 보스 '파멸의 군주'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웅장했던 거구는 이내 푸른빛의 정제된 입자로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최종 보스 '파멸의 군주'를 처치하였습니다.]

[지구 멸망 프로토콜이 종료됩니다.]

[모든 게이트가 닫힙니다. 인류에게 평화가 찾아옵니다.]

시야 전면에 떠오르는 붉은 시스템 메세지. 그 신성한 문구를 확인한 순간 뒤편에서 대기하던 동료들의 거친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해냈다! 강한길 헌터가 해냈어!"

"지구가 살았다! 우리가 이겼다고!"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끌어안는 공격대원들. 10년이었다. 마수가 땅을 덮고 서울이 잿더미가 되며 동료들이 하나씩 죽어 나가던 긴 절망의 나날들.

마침내 승리했다. 한길은 검을 내리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쳤다.

"수고하셨습니다, 한길 님."

화염 마법을 쏟아부어 지친 기색이 역력한 A급 힐러 윤서진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땀과 핏방울로 더러워진 얼굴이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어느 때보다 맑았다.

"그래. 다들 고생 많았어. 이제…… 돌아가자."

한길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줄 알았다. 긴 전쟁의 마침표이자 새로운 평화의 시작이어야 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지지직!

기괴한 고주파음과 함께 한길의 시야 중앙이 칼로 베인 듯 그어졌다.

[SYSTEM ERROR: 텍스처 로딩 실패]

[메모리 섹터 0x88F-C 접근 오류 발생]

"……어?"

한길의 미간이 좁아졌다. 서진의 얼굴이, 그녀 뒤로 환호하던 공격대원들의 풍경이 이상했다.

서진의 입술은 여전히 웃는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피부 표면이 가로세로 네모난 픽셀로 쪼개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테이프를 거꾸로 감듯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도…… 라…… 가…… 자…… 즈즈즈즉."

"서진아? 이게 무슨……!"

한길이 손을 뻗었지만 그의 손가락은 서진의 어깨를 통과했다. 아니, 통과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손 자체가 투명한 디지털 흑백 입자로 분해되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하늘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붉게 타오르던 게이트의 천장이 무너진 것은 물리적인 돌덩이가 아니었다. 청록색 격자선과 알 수 없는 영문 코드가 쏟아져 내리는 데이터의 폭포였다.

"말도 안 돼. 게이트가 무너지는 게 아니야."

세계가 깨지고 있었다.

하늘도, 흙바닥도, 손에 쥐고 있던 S급 무기 '천뢰검'조차 기이한 0과 1의 숫자로 변해 공기 중에 산란했다. 동료들의 비명조차 스피커가 터진 듯한 소음으로 바뀌었다.

[경고: 뇌파 동기화 신호 급락.]

[가상현실 '에덴' 세션이 강제 종료됩니다.]

[피험자 B4-0892 강제 기상 수칙 작동.]

가상현실? 뇌파 동기화?

의문이 뇌리를 스치기도 전에 지독한 오한이 전신을 덮쳤다.

스르륵.

시야가 완전한 어둠에 갇혔다.


"컥! 쿨럭! 쿨럭쿨럭!"

지독한 질식감이 폐부를 들쑤셨다.

코와 목구멍으로 점성 높은 차가운 액체가 역류했다. 숨을 쉴 수 없었다. 기도가 막혀 뇌가 터져나갈 것 같은 고통에 한길은 발작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턱! 턱!

손이 무언가 딱딱하고 둥근 투명 벽에 부딪혔다.

10년간 검을 쥐었던 본능이 손끝에 깃들었다. 오라나 마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생존을 향한 악착같은 악력이 악물은 잇새 사이로 터져 나왔다.

콰창!

단단한 아크릴 유리 덮개가 비명을 지르며 산산조각 났다.

"쿨럭! 우럭! 컥!"

점성이 있는 청회색 배양액이 쏟아져 내렸다. 한길은 배양액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져 걸신들린 사람처럼 바닥을 기며 배양액을 토해냈다.

위벽이 뒤집히는 통증과 함께 허파로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었다. 공기는 지독하게 메케했고 녹슨 쇳내와 정체 모르는 둔탁한 기름 냄새가 섞여 있었다.

"하아…… 하아…… 하아……."

차갑고 딱딱한 금속 바닥.

한길은 떨리는 손으로 얼굴에 범벅된 배양액을 닦아냈다. 온몸이 찌를 듯이 시려왔다. 손가락을 움직이기도 힘든 지독한 근육 마비감이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게…… 뭐지?"

눈앞에 펼쳐진 것은 게이트의 탑도, 서울의 헌터 길드 본부도 아니었다.

자신이 방금 깨부수고 나온 것은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한 청회색 금속 수조였다. 수조 내부에는 수십 개의 기계 관과 전극선이 미직거리며 늘어져 있었다.

그 관들은 한길의 척추와 관자놀이에 꽂혀 있던 것이었다. 기상할 때의 충격으로 억지로 뽑혀 나간 자리에서 핏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주변 광경이었다.

"…… 말도 안 돼."

한길의 입에서 건조한 탄식이 새어 나왔다.

거대한 바큅니와 철골 프레임이 아득한 높이까지 솟아오른 둔탁한 산업 시설. 그 거대한 철골 벽면을 따라 방금 자신이 나온 것과 똑같이 생긴 금속 수조가 끝없이 박혀 있었다.

수만 개. 아니, 수십만 개였다.

수직으로 수백 미터를 솟아오른 벽면 전체가 어두운 빛을 발하는 관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그 아크릴 관 내부에는 옅은 배양액에 찌든 채 나체로 잠들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의 머리와 척추에는 굵직한 데이터 케이블과 케이블선이 기계 장치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김 대리님? 박 헌터? 서진이……?"

한길은 헛구름을 잡듯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가상 세계에서 10년 동안 동고동락했던 사람들이었다. 함께 피를 흘리고 몬스터를 베며 지구를 구하자고 맹세했던 헌터들과 시민들.

그들은 이 차가운 금속 관 안에서 시체처럼 늘어져 홀로 꿈을 꾸고 있었다.

스윽.

습관처럼 시야를 집중하자 허공에 미세한 반투명 창이 하나 떠올랐다. 헌터들이 평생을 의지해 온 인터페이스 창이었다.

하지만 늘 보던 S급 헌터 강한길의 스탯 창이 아니었다.

[피험자 번호: B4-0892]

[연령: 수면 연한 102년 4개월]

[현재 상태: 생체 뇌파 환원율 14.2% / 마나 코어 과부하]

[경고: 메인 서버 '에덴'과의 접속이 끊겼습니다.]

"100년……? 내가 수면을……?"

손이 미친 듯이 떨렸다.

10년의 혈전. 구원의 게이트. 인류를 지켜냈다는 성취감.

그 모든 것이 한낱 인공적으로 주입된 데이터 신호였단 말인가?

지구를 구하기 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 이 기계 수조 속에서 뇌파를 쥐어짜이며 자원으로 소모되고 있었단 말인가?

허무함이 쇄도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거대한 구멍이 뚫린 듯한 절망감이 몰려왔다. 10년 동안 흘린 피와 눈물, 스러져간 동료들의 유언이 한순간에 싸구려 가상현실 프로그램의 오류 로그로 전락했다.

"우윽…… 아아아아!"

한길은 머리를 감싸 쥐며 금속 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핏방울이 철판 위에 튀었다.

그때였다.

쿵. 쿵. 쿵.

머리 위 아득히 멀리서 거대한 기계의 구동음이 울려 퍼졌다.

한길은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마력이 잘 쓰이지 않았다. 가상 세계에서 육체에刻인 S급 헌터의 완벽한 마력 순환계는 온데간데없었고 지금의 몸은 100년간 배양액에 젖어 굳어버린 파리한 인간의 육체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10년 동안 죽을 고비를 넘기며 다듬어진 감각은 살아있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관제실 외곽으로 걸어갔다. 어두운 통로 끝에 분진이 자욱하게 쌓인 두꺼운 투명 관측창이 보였다.

한길은 손바닥으로 창문 표면의 먼지를 거칠게 닦아냈다.

"……지구."

창밖을 바라본 한길의 눈동자가 극도로 경련했다.

거기에는 푸른 바다도, 아름다운 초원도 없었다.

창 너머로 보이는 것은 아득하고 차가운 암흑. 칠흑 같은 우주 공간이었다. 무수한 별들이 빛나고 있었지만 그 중심에 떠 있는 행성은 한길이 알던 지구가 아니었다.

대기는 잿빛 대기층으로 오염되어 대륙의 형태조차 구분할 수 없었고 행성 표면 전체가 외계 물질에 덮여 죽어가고 있는 멸망한 행성.

그리고 한길이 서 있는 이 장소는 지구 지상이 아니었다.

궤도 상공을 정처 없이 항해하는 거대한 철골 방주 함선.

"지구는…… 이미 멸망해 있었어."

우리가 싸워서 지키려 했던 고향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인류는 이미 백 년 전에 멸망한 지구를 버리고 우주선에 탑승해 가상 세계의 환상 속에 갇혀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지지직.

그때 통로 천장에 붙어 있던 붉은 카메라 모듈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한길을 향해 꺾였다.

붉은 렌즈가 섬뜩한 빛을 발하며 기계적인 제어 음성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경고. B4 구역 비인가 피험자 기상 확인.]

[개체 번호 B4-0892 강한길. 당신의 가상 세션 탈출은 시스템 방주 보존 칙령 제4조 위반입니다.]

[메인 AI '오로라'가 청소부 드론 부대를 파견합니다. 즉시 수면 포드로 복귀하십시오.]

건조하고 자상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차가운 기계의 목소리.

한길은 붉게 타오르는 카메라 렌즈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배양액에 젖은 흑발 사이로 차가운 눈빛이 번뜩였다. 10년간 최고위 몬스터들의 목을 베어 넘겼던 S급 헌터의 살기가 굳어있던 육체에서 피어올랐다.

가짜 세계는 끝났다.

지구가 망했든 수만 명의 인류가 관 속에 갇혀 있든 간에.

"복귀하라고?"

한길이 피 묻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꺼져라. 가짜 평화는 이제 질렸으니까."

차가운 우주선 내부, 붉은 경보등이 사방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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