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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천재 발명가는 은퇴하고 싶다7화

조선의 천재 발명가는 은퇴하고 싶다

조선의 천재 발명가는 은퇴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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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죽은 자의 도면

경복궁 편전의 촛불은 자정이 넘도록 꺼질 줄 몰랐다.

서안 위에는 삼남 지방에서 올라온 수해 보고서와 치수 장계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조선의 국왕 이도는 눈두덩을 지그시 누르며 먹물이 마른 붓을 내려놓았다. 붉게 충혈된 눈이었으나 서류를 훑어 내리는 안광만큼은 여전히 서슬 퍼렇게 살아 있었다.

“전하, 삼경이 깊었사옵니다. 옥체를 생각하시어 이만 침소로 드심이…….”

도승지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조아렸으나 세종은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충청도와 경상도 일대에 연이틀 폭우가 쏟아졌다 들었다. 백성들의 전답이 물에 잠기고 제방이 터져 나가는데 과인이 어찌 발을 뻗고 자겠는가. 장계를 마저 가져오라.”

도승지는 속으로 탄식하며 충청 감사 이정연이 올린 봉투를 조심스레 올렸다. 세종은 장계를 펼쳐 빠르게 훑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지방관들이 올리는 장계는 뻔했다. 비가 얼마만큼 내려 제방이 몇 보 허물어졌으며 복구를 위해 군역 인부 몇백 명과 관아의 은전을 얼마나 지원해 달라는 읍소와 탄식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정연의 장계는 첫머리부터 결이 달랐다.

‘……냇가 아래 굽이의 둑이 터질 위기에 처하였으나, 이름 없는 한 시골 연장장이의 기이한 연장과 방책으로 인부 열 명 남짓이 하룻밤 사이에 제방을 완벽히 보강하였나이다. 이에 그 장치가 작동하는 형상과 운용 수칙을 모사하여 올리오니…….’

“호오?”

세종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장계 뒤편에는 감사가 현장에서 베껴 그린 거친 도면과 목판에 새겨졌던 수칙들이 덧붙여져 있었다. 세종의 시선이 도면 위로 떨어졌다. 겉보기에는 장대와 돌추, 나무 발과 받침판으로 이루어진 투박한 지렛대 그림에 불과했다.

그러나 세종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기계와 역학의 원리를 깊이 꿰뚫고 있는 군주였다.

“지렛대의 받침점과 작용점의 비율이 삼 대 일. 돌추의 무게를 통해 모래 포대에 가해지는 하중을 계산하여 균일하게 분산시켰구나. 게다가 둑 안쪽으로 가는 배수 물길을 내어 스며드는 수압을 분산시키는 구조라…….”

세종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단순한 시골 목수나 대장장이가 경험만으로 뚝딱 만들어 낼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무게와 마찰력, 흙의 응집력과 지렛대의 기하학적 비례를 완벽히 이해한 자가 치밀하게 계산하여 내놓은 극도로 효율적인 설계였다.

더욱 기이한 것은 도면 구석에 적힌 치수 표기법과 기호였다.

먹선 끝을 예리하게 꺾어 치수를 끊어 치고 분수를 표기할 때 가로획 대신 점 세 개를 찍어 비율을 나타내는 독특한 방식.

“이것 보아라.”

세종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어디선가 본 듯한, 아주 낯익은 붓끝의 흔적이었다.

“도승지.”

“예, 전하.”

“상의원의 대호군 장영실을 지금 즉시 편전으로 부르라.”

도승지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전하, 지금은 야심한 축시이옵니다. 대호군도 영내에서 취침 중일 텐데…….”

“안다. 그러니 어서 깨워서 데려오너라. 내 손이 근질거려 참을 수가 없구나.”

워커홀릭 군주의 단호한 어명 앞에 도승지는 두말없이 허리를 굽히고 물러났다.


잠결에 불려 나온 장영실은 눈을 비비며 편전 바닥에 엎드렸다. 갓끈도 채 제대로 매지 못한 행색이었으나 세종의 서안 앞에 서자마자 장인 특유의 긴장감이 온몸을 감쌌다.

“대호군, 밤늦게 불러 미안하구나. 허나 네게 급히 확인해야 할 도면이 있다.”

세종이 서안 위의 충청도 장계를 앞으로 밀어주었다. 장영실은 의아한 표정으로 도면을 받아 들었다.

“이것은 충청도 감사 이정연이 올린 수해 방지 장계의 부속 도면이다. 시골의 이름 없는 연장장이가 만들었다는 모래 포대 압착기와 치수 장치인데, 네 눈에는 어찌 보이느냐?”

장영실은 도면을 등불 가까이 가져가 살폈다.

처음에는 그저 지방 관아의 흔한 목조 기구겠거니 여겼다. 그러나 도면의 선 하나, 수치 하나를 훑어 내려갈수록 장영실의 눈빛이 급격하게 변했다. 졸음은 흔적도 없이 달아났다.

“전하…… 이것은 예사 물건이 아닙니다.”

장영실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렛대의 축을 지지하는 나무 발의 접지 면적이 통상적인 목수들의 규격보다 세 배나 넓습니다. 진흙의 침하 압력을 계산하지 않고서는 결코 이런 수치가 나올 수 없습니다. 게다가 포대를 엇갈려 쌓는 각도와 돌추를 세 번 떨어뜨려 공극을 메우는 순서까지 완벽한 역학적 계산 아래 짜여 있습니다.”

“그렇지? 네 눈에도 그리 보이지?”

세종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전하, 신이 놀란 것은 기계의 구조뿐만이 아닙니다.”

장영실의 손가락이 도면 하단의 작은 글씨들과 치수 표기선을 짚었다.

“이 선 긋는 방식을 보십시오. 굵은 먹선으로 윤곽을 잡고 보이지 않는 축의 중심선은 아주 가는 먹선으로 촘촘히 점을 찍어 이었습니다. 마치 비단에 바느질을 하듯 선을 잇는 이 독특한 제도법은…….”

장영실의 말문이 턱 막혔다. 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왜 그러느냐, 대호군?”

“전하…… 혹 상의원 서고에 보관된 천문의기 수리 도면철을 가져와 대조해 보아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허락하마.”

장영실은 곧바로 달려 나가 상의원 서고에서 두툼한 도면철 한 권을 품에 안고 돌아왔다. 도면철을 펼치자 몇 달 전 작성된 정교한 혼천의 수리 도안이 나타났다.

장영실은 충청도에서 올라온 제방 도면과 과거 혼천의 도면을 나란히 놓았다.

그리고 붓끝으로 두 도면의 치수 기입란을 하나하나 비교했다.

선의 굵기, 치수를 적을 때 숫자의 모서리를 둥글리지 않고 칼로 깎아내듯 꺾는 필체, 하중을 표기할 때 쓰는 원 안에 점을 찍는 특유의 기호.

두 도면의 필적과 도면 작성 습관은 다른 사람의 것이라 볼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일치했다.

장영실이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전하…… 믿기지 않사오나 이 도면의 필적과 기하학적 치환 공식은…… 지난봄 과로로 돌연사한 전 상의원 별좌 한소은의 바느질체(제도체)와 한 획의 어긋남도 없이 일치하옵니다.”


편전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세종의 눈이 가늘어졌다.

“한소은이라…….”

세종의 뇌리에 한 사내의 얼굴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서자 출신이었으나 기계 구조와 수리 계산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천재. 물시계의 톱니바퀴부터 혼천의의 동력 전달 축까지 한 번 도면을 잡으면 며칠 밤을 새워서라도 신기루 같은 설계를 뽑아내던 자였다. 세종이 몹시 아끼며 수많은 국책 과제를 연달아 하사했던 충신 중의 충신이었다.

그런데 그 한소은이 몇 달 전, 상의원에서 3일 연속 밤샘 근무를 하던 중 돌연 피를 토하고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는 보고가 올라왔었다. 세종은 너무도 원통하고 안타까워 친히 관직을 추증하고 장례 비용까지 넉넉히 내렸었다.

그런데 그 죽은 자의 도면이 충청도 산골 냇가 마을에서 버젓이 살아서 올라온 것이다.

“그 도면철을 내게 다오.”

세종이 장영실이 가져온 도면철과 충청도 장계를 직접 쥐었다.

세종은 꼼꼼하게 두 문서를 살폈다. 혼천의 도면 구석에 적힌 치수와 이번 모래 포대 압착기 도면의 치수.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다른 사람의 모방이 아니었다. 손에 익은 버릇이 그대로 묻어난 진품이었다.

세종의 입술이 천천히 호를 그렸다.

처음에는 어이없음이었고 다음에는 기가 차다는 헛웃음이었으며 마지막에는 형언할 수 없는 희열이었다.

“돌연사라…….”

세종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상의원에서 사흘 밤을 새우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더니. 가사의 비약이라도 삼키고 죽은 척을 한 게로구나.”

장영실이 당황하여 몸을 떨었다.

“전하, 한 별좌가 설마…… 전하를 속이고 가짜로 죽음을 꾸몄단 말씀이옵니까? 어명을 기만하고 위장 사망을 한 것은 대역죄에 해당하옵니다!”

“대역죄?”

세종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편전의 기둥이 울릴 만큼 호탕하면서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웃음소리였다.

“대역죄는 무슨 대역죄냐. 내 야근 명령이 사약보다 무서워 꾀병을 부리고 시골로 튄 게지!”

세종은 무릎을 탁 쳤다.

“내 그놈을 잘 알지. 일 하나는 귀신같이 해내면서도 틈만 나면 ‘신은 재주가 미천하여 고향으로 내려가 낚시나 하고 싶사옵니다’ 하고 징징거리던 놈이었어. 내가 좀 심하게 부려먹긴 했다만…… 감히 임금을 상대로 죽음을 위장해? 그리고 충청도 산골 냇가에 숨어서 연장 공방이나 차리고 유유자적 살고 있어?”

세종의 눈빛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배신자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잃어버린 최고의 부품, 조선에서 가장 완벽하게 굴러가던 노동력을 되찾았다는 워커홀릭 군주의 탐욕스러운 집념이었다.

“장영실.”

“예, 전하.”

“상의원의 물시계 자동 개폐 장치 도면, 아직 미완성이지?”

“예…… 한 별좌가 떠난 뒤로 진척이 더디옵니다.”

“서운관의 간의대 자동 회전축 설계도 멈춰 있지?”

“그렇사옵니다…….”

“팔도의 수차 보급 계획도 적당한 설계자가 없어 표류 중이고?”

“예, 전하…….”

세종이 서안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그 모든 일거리가 주인을 잃고 울고 있었는데 그 주인이 산골에서 낮잠을 자며 낚싯대나 드리우고 있었단 말이구나.”

세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승지!”

도승지가 황급히 엎드렸다.

“예, 전하!”

“충청도 관찰사에게 은밀히 밀지를 보내라. 그 연장장이의 공방 위치를 파악하되 절대로 관아의 포졸을 보내거나 건드리지 말라 일러라.”

“전하, 그렇다면 어찌 조치하시려 하옵니까?”

세종이 도포 자락을 펄럭이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어찌하긴. 과인이 직접 가야지.”

“예?! 전하, 친히 잠행을 가신단 말씀이옵니까? 옥체가 상하시옵니다!”

“시끄럽다. 충청도 일대의 수해 현장을 시찰한다는 명분으로 어가를 꾸려라. 호위는 최소한으로 줄이고 과인은 평복으로 갈아입고 그 냇가 공방으로 들이닥칠 것이다.”

세종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감히 내 손아귀를 벗어나 은퇴를 꿈꿔? 내 그놈을 기필코 찾아내어 조선의 모든 기계 도면을 다 그리게 만들고야 말 것이다. 사흘 밤샘이 힘들다 했으니 이번에는 닷새 밤샘을 시켜 주마.”

장영실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속으로 먼 충청도 산골에 있을 옛 동료를 향해 묵념을 올렸다.


같은 시각, 충청도 산골 냇가의 ‘소은의 연장 공방’.

맑게 갠 오후의 햇살이 냇물 위에 반짝이고 있었다. 콸콸 돌아가는 물레방아 소리와 시원한 바람이 마당을 채웠다.

소은은 공방 앞 평상에 대자로 누워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제방 공사가 성공적으로 끝난 뒤 마을 사람들은 소은이 적어준 나무패의 수칙대로 둑을 스스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양수기도 농부들이 조를 짜서 순번대로 물을 대고 있었기에 공방에는 며칠째 번거로운 손님이 찾아오지 않았다.

“아아…… 이것이 인생이지.”

소은은 길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궁궐 상의원에서 촛불을 켜고 새벽까지 먹줄을 튕기던 지옥 같은 나날들이 아득한 전생처럼 느껴졌다. 임금의 잔소리도 없고 끝없는 도면 독촉도 없는 완벽한 은퇴 생활이었다.

그때, 설향이 마루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사기그릇을 들고 평상으로 다가왔다.

“장인, 볕이 좋다 하여 맨바닥에 오래 누워 계시면 몸이 굳습니다. 생강과 감초를 달인 따뜻한 약초차를 가져왔으니 한 모금 드시지요.”

“고맙소, 설향 낭자.”

소은이 몸을 일으켜 찻잔을 받으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화악―!

갑자기 목덜미 뒤쪽으로 얼음물을 끼얹은 듯 서늘하고 섬뜩한 한기가 왈칵 들이닥쳤다.

“에취―! 에에에취!”

소은은 연속으로 거세게 재채기를 터뜨렸다. 평상 전체가 들썩일 정도였다. 낚싯대를 쥐고 있던 손이 덜덜 떨렸다.

“장인? 어디 편찮으십니까? 감기 기운이라도 드신 것입니까?”

설향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소은은 찻잔을 든 채 멍하니 북쪽, 한양 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맑게 개인 푸른 하늘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먹구름 수만 개가 몰려오는 듯한 흉흉한 살기가 느껴졌다.

“아니…… 감기는 아닌데…….”

소은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목덜미를 문질렀다.

“이상하게…… 등골이 오싹하고 누군가 내 목덜미를 잡고 벼루에 먹을 갈라고 윽박지르는 듯한 환청이 들리오.”

“예? 벼루요?”

설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겠소. 전생의 악연인지, 아니면 저승사자가 길을 잘못 들었는지…….”

소은은 따뜻한 약초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가슴속은 따뜻해졌지만 등 뒤에 달라붙은 불길한 예감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그는 애써 불안을 털어내며 낚싯대를 고쳐 잡았다.

“설마 무슨 일이 있겠어. 난 이미 죽은 사람인데.”

소은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평상에 다시 등을 기댔다.

그러나 냇가 너머 산등성이 아래로, 한양에서 출발한 비밀스러운 말발굽 소리가 소은의 평화로운 공방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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