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으로
조선의 천재 발명가는 은퇴하고 싶다6화

조선의 천재 발명가는 은퇴하고 싶다

조선의 천재 발명가는 은퇴하고 싶다

AD
스폰서 광고

6화: 둑은 공짜로 쌓이지 않는다

말발굽 소리는 한 번 멎은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사립문 밖에서 누군가 젖은 도포 자락을 털었다. 소은은 망치 손잡이를 쥔 채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검은 갓을 쓴 사내 하나와 푸른 도포의 아전 둘이 서 있었다.

“소은의 연장 공방이 맞소?”

사내가 먼저 물었다. 낮은 목소리였으나 뒤에 선 아전들이 곧게 허리를 세운 모습이 답이었다.

“맞습니다.”

“나는 감사 이정연이오. 비가 오기 전부터 이 고을과 아래 고을의 둑 공사를 살피고 있었소. 관아 뒤 토굴을 고친 장인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여기라는 말을 들었지.”

소은은 문을 반쯤만 열어 둔 채 대답했다.

“토굴은 약초꾼들이 고쳤습니다. 저는 관을 하나 보고 말았을 뿐입니다.”

“그 관 하나가 인삼값을 살렸다더군.”

감사의 시선이 마당의 새 표지로 향했다. 설향은 약초 보자리를 정리하다 말고 조용히 손을 모았다.

“그 여인이 관기 설향인가?”

소은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제 조수입니다. 약초를 다듬고 손님을 대접합니다.”

설향의 눈이 작게 흔들렸다. 어젯밤부터 공방에 머물 수 있게 되었어도 관아 사람이 이 앞에 서면 다시 떠나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얼굴이었다. 소은은 그쪽을 보지 않았다. 공방의 문턱 안에 둔 사람을 굳이 숨길 이유도 없었다.

최 서리라는 아전이 앞으로 나왔다.

“감사 나리께서 제방 공사를 맡으셨다. 물이 불기 전에 둑을 마쳐야 하니 장인께서 관아 일을 맡아 주시면 된다. 사람과 재료는 관아에서 대고 은전도 넉넉히 치르겠다.”

소은은 고개를 저었다.

“관아 주문은 받지 않습니다.”

“지금 거절할 때가 아니오. 둑이 터지면 아래 밭이 잠긴다.”

“그래서 더더욱 계약부터 쓰지 않겠습니다. 장치는 빌려주지도 않습니다.”

“감사 나리께서 사람을 쓰겠다는데 무슨 말이 그리 많소? 장인이 둑을 한 번 잘 쌓아 놓으면 관아가 다른 고을에도 같은 일을 시킬 터. 그만한 일거리가 어디 있단 말이오.”

소은은 아전의 젖은 버선을 내려다봤다. 제방을 고치는 일보다 제방을 고친 사람을 묶는 일이 먼저인 목소리였다.

“그만한 일이 있으니 더 받지 않는 겁니다. 일을 받아 놓으면 낚싯대 잡을 손이 없어집니다.”

감사는 웃지 않았다. 대신 공방 안을 천천히 훑었다.

“공짜로 일하라는 뜻은 아니오. 허나 재주 있는 자가 백성의 급한 일을 외면한다면 그 재주도 편치 못할 텐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돌쇠가 냇가 쪽에서 뛰어왔다. 숨이 너무 차서 사립문 기둥을 붙들고 한참이나 말하지 못했다.

“박 어르신이 보냈습니다. 아래 굽이 둑이 물을 먹고 무너진답니다. 논물이 벌써 발목까지 찼답니다!”

소은의 시선이 감사에게서 돌쇠에게 옮겨 갔다. 계약서보다 먼저 물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는 공방 안으로 들어가 통나무 자투리와 밧줄 그리고 낡은 수레 판자를 챙겼다. 설향이 곧바로 두꺼운 기름종이와 마른 삼베를 보자기에 넣었다.

“저도 가겠습니다.”

“약초는요?”

“비를 맞아도 약초는 도망가지 않습니다. 사람과 둑은 도망갈 수 있습니다.”

소은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내하십시오.”

그가 돌쇠에게 말했다. 그리고 감사에게는 더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공사는 맡지 않습니다. 내가 말하는 순서를 마을 사람들이 익힐 겁니다. 그 조건이면 갑니다.”

감사는 잠시 그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냇가 아래 굽이에는 모래 포대가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비를 머금은 포대는 제각각 부풀었고 그 사이로 갈색 물이 실처럼 새어 나왔다. 둑 바깥으로 넘어간 물은 낮은 밭고랑을 찾아 번지고 있었다.

박 노인은 허리춤을 짚은 채 포대 옆에 서 있었다.

“사람 열 명이 저녁 내내 올렸네. 올리면 옆이 꺼지고 옆을 막으면 밑으로 샜어.”

소은은 포대 하나를 발로 눌렀다. 물이 옆 틈으로 배어 나왔다. 포대를 높이만 올렸지 서로 물린 자리가 없었다. 포대 아래의 진흙은 물러서 발끝이 반 뼘쯤 파고들었다.

“위로만 쌓았군요. 이렇게 세우면 물이 한 포대씩 밀어냅니다.”

“아랫줄부터 벽돌처럼 물려야 합니다. 포대는 반씩 어긋나게 놓고 눌러서 납작하게 만들어야 해요.”

최 서리가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설명은 나중에 하고 사람을 부리시오. 비가 더 옵니다.”

“사람을 부리는 게 아닙니다. 같은 일을 하게 만드는 겁니다.”

소은은 짧은 통나무 두 개를 바닥에 평행하게 놓았다. 통나무 위에는 넓은 수레 판자를 얹고 그 위로 긴 장대를 걸쳤다. 장대 한쪽에는 널판을 덧댄 나무 발을 달고 다른 쪽에는 돌추를 밧줄로 매달았다.

장대가 움직일 때마다 돌추가 오르내리는 단순한 지렛대였다. 맨발보다 넓고 일정한 힘으로 모래를 다질 수 있었다.

“포대를 반씩 어긋나게 놓습니다. 세 사람이 이쪽을 내리면 나무 발이 포대를 누릅니다. 다시 놓으면 돌추가 내려앉죠. 같은 자리를 세 번 누르세요.”

“세 번이나요?”

한 농부가 물었다.

“한 번은 모래를 펴고 두 번은 옆 틈을 채웁니다. 세 번째에야 포대가 제 자리를 잡습니다.”

설향이 포대 옆에 섰다.

“포대는 제가 맞추겠습니다. 입구가 바깥을 향하지 않게 묶어 두겠습니다.”

“박 어르신은 포대가 놓일 자리를 보십시오. 물이 새는 데부터 메우고 너무 높은 곳은 낮추세요.”

박 노인은 젖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물은 높은 데를 좋아하는 게 아니지. 약한 데를 좋아하는 거지.”

첫 번째 돌추가 떨어졌다.

쿵.

장치의 다리가 진흙에 푹 박혔다. 나무 발은 포대 끝을 비껴 눌렀고 물은 더 세게 솟았다. 포대 하나가 뒤로 밀리며 사람들의 발목에 갈색 물을 튀겼다.

최 서리가 혀를 찼다.

“이럴 줄 알았습니다. 그냥 사람을 더 불러 포대를 던지지요.”

소은은 장대를 멈추게 했다. 실패를 숨길 겨를이 없었다. 그는 무너진 다리와 물러진 흙을 내려다보다가 수레 판자를 집어 들었다.

“받침이 좁았습니다. 진흙을 누르려 하지 말고 넓게 받아야 합니다.”

그는 인부들에게 자갈과 잔가지를 가져오게 했다. 널판 밑에 자갈을 펴고 잔가지를 엇갈려 깔아 물러진 흙 위에 넓은 발을 만들었다. 둑 안쪽으로는 삽 하나 너비의 얕은 물길도 냈다.

“여긴 왜 팝니까? 물을 막아야지 물길을 내면 어쩝니까?”

최 서리가 다시 물었다.

“고인 물이 둑 속으로 스며들면 안쪽부터 무너집니다. 이 물길은 둑을 비우는 길이에요. 막을 곳과 보낼 곳을 나누지 않으면 밤새 포대만 버립니다.”

감사는 처음으로 포대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새로 낸 가는 물길을 말없이 내려다봤다.

두 번째 압착기는 달랐다. 넓은 받침판 위에서 장대가 흔들리지 않았다. 세 농부가 장대를 내리자 나무 발이 포대 한가운데를 눌렀다. 돌추가 내려앉으며 모래가 옆 틈까지 밀려 들어갔다.

“한 번 더.”

쿵.

“한 번 더.”

쿵.

포대의 모양이 낮고 넓게 퍼졌다. 설향은 그 위에 다음 포대를 엇갈리게 올렸다. 포대 입구는 둑 안쪽으로 돌리고 묶인 자리는 손바닥으로 눌러 확인했다. 박 노인은 물이 새는 틈을 손가락으로 짚어 다음 자리를 알려 주었다.

“저기 두 줄은 낮추게. 물이 저쪽으로 몰린다.”

“알겠습니다.”

소은은 최 서리에게 말했다.

“사람을 둘로 나누십시오. 한쪽은 모래를 채우고 한쪽은 누릅니다. 줄이 끊기면 멈추고 새 밧줄을 겁니다. 아무나 장대를 혼자 올리려 하지 마세요.”

최 서리는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밀려오는 물살을 보고 관아 인부들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들었지 않느냐. 모래 채울 놈은 이쪽이다. 장대는 셋이 맞춰 움직여라!”

비는 밤까지 내렸다. 압착기는 한 칸을 누르고 옮겨졌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는 장대의 박자를 놓쳤다. 설향이 젖은 손을 마주쳐 셋을 세자 곧 힘을 맞춰 갔다.

“하나, 둘, 셋.”

쿵.

“하나, 둘, 셋.”

쿵.

소은은 비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누군가에게 명령을 내리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일은 상의원의 밤처럼 끝없는 종이 더미가 아니었다. 둑 한 칸이 다져지면 다음 칸으로 옮기면 됐다. 눈앞에 끝이 있었다.

설향이 빈 포대 더미 옆에서 그를 불렀다.

“장인, 이쪽은 포대가 모자랍니다.”

소은은 물길을 한 번 훑어보고 답했다.

“모래만 담지 말고 아래쪽 포대에는 자갈을 조금 섞으세요. 너무 무거우면 사람이 못 옮기니 반 바가지씩만 넣고 입구를 단단히 묶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농부들에게 지시를 옮겼다. 소은은 잠시 그 모습을 보았다. 설향은 기계를 만든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기계가 사람을 누르지 않게 만드는 쪽은 누구보다 빨리 익혔다.

새벽 무렵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갈색 물은 새로 낸 물길을 따라 천천히 빠졌고 둑 바깥의 누수도 실처럼 가늘어졌다. 박 노인은 지렛대 끝에 기대어 둑을 한참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발뒤꿈치로 포대 가장자리를 눌렀다. 포대는 더는 밀리지 않았다.

“버티는구먼.”

그 한마디에 사람들의 어깨가 내려앉았다. 누군가는 진흙 묻은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고 누군가는 그대로 둑 위에 주저앉았다. 그래도 압착기를 치우자는 사람은 없었다. 다음 비가 오기 전에 포대 두 줄을 더 눌러야 한다는 말을 서로 먼저 꺼냈다.

감사는 젖은 갓을 벗어 손에 들었다.

“장인. 이 기계와 설계를 관아에 넘기시오. 제방마다 쓰게 하겠다. 상주할 집도 마련해 주지.”

소은은 장대에 묻은 진흙을 닦았다.

“관아 전용으로는 만들지 않습니다.”

“은전이 모자랍니까?”

“값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걸 빌려주면 다루는 사람이 책임을 놓습니다. 오늘 여기 사람들은 자기 둑을 고칠 줄 배웠습니다.”

그는 나무패 하나를 꺼내 짧게 새겼다. 포대는 엇갈리게 놓을 것. 세 번 누를 것. 비 뒤에는 물길을 살필 것. 밧줄이 닳으면 멈출 것.

“이건 박 어르신께 맡깁니다. 고치고 싶으면 와서 배우십시오. 관아가 가져가 장부에 묶지는 마세요.”

박 노인은 나무패를 받아 들고 깊이 허리를 숙였다.

“다음 비에는 내가 먼저 포대를 맞춰 두겠네.”

“혼자 하지 마십시오. 장대는 꼭 셋이 잡아야 합니다.”

“그건 동네 사람들 귀에 박히게 하겠네.”

감사는 소은을 오래 바라봤다.

“이름은 끝내 말하지 않겠소?”

“소은입니다. 연장장입니다.”

“그보다 더 있을 것 같군.”

“없습니다.”

감사는 더 묻지 않았다. 그는 돌아서며 최 서리에게 낮게 말했다.

“오늘 본 것을 적어 두게. 한양에도 이런 장인이 있다는 말은 들려야 할 테니. 다만 이름은 함부로 붙이지 말게.”

소은의 손이 나무패 위에서 멎었다.

설향이 곁으로 다가와 젖은 보자기에서 찻주전자를 꺼냈다.

“불은 꺼졌지만 차는 아직 미지근합니다.”

소은은 한 모금 마셨다. 생강 향은 비 냄새 사이에서도 분명했다.

“다음부터는 비 오는 날 묵은 만들지 마십시오.”

“장인께서 낚시할 날을 지키려면 체력부터 지켜야 합니다.”

설향의 대답에 소은은 피곤한 웃음을 흘렸다.

멀어지는 말발굽 소리가 젖은 길을 두드렸다. 둑은 버텼다. 그러나 그 소리는 냇가 마을 밖으로 소은의 이름 없는 재주를 실어 나가고 있었다.

AD
스폰서 광고
YOU MAY ALSO LIKE

이런 작품은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