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원짜리 아이템으로 세계 제패

9화: 천 원짜리 무기고
덜컹거리는 시내버스 창밖으로 붉은 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진태성은 좌석 등받이에 몸을 묻은 채 스마트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화면 중앙의 은행 잔고 창에는 낯선 숫자가 선명하게 떠 있었다.
[잔액: 5,003,200원]
대한헌터협회 아티팩트 관리국에서 입금한 공식 지원금 500만 원이었다.
5년 동안 던전 바닥을 기며 피와 오물을 뒤집어써도 한 달에 백만 원 남짓을 쥐던 짐꾼이었다. 그런데 계약서에 서명하자마자 통장에 거금이 꽂혔다.
보통의 C급이나 D급 헌터라면 이 돈을 들고 곧장 헌터 무기 상가로 달려가 합금 흉갑이나 부적을 샀을 것이다.
하지만 태성은 버스 하차 벨을 눌렀다. 그가 내린 곳은 화려한 무기 백화점이 아닌 서울 변두리의 오래된 전통 시장 입구였다.
‘비싼 장비를 사봤자 나한테는 아무 쓸모가 없어.’
태성은 주머니 속 [마력 포획의 손]과 [강철 울음 식칼]을 만지작거렸다.
머릿속에 떠오른 시스템의 안내 문구는 명확했다.
[가성비의 영주 (Passive)]
- 연성에 들어간 베이스 물품의 실제 화폐 가치가 낮을수록 아티팩트의 추가 스탯 부여율과 잠재 보정치가 비약적으로 상승함.
수백만 원짜리 공방제 무기는 이미 인위적인 마력 가공이 덧씌워져 있어 개념 합성 시 반발이 컸다. 가격이 비쌀수록 가성비 보정치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반대로 대량생산된 천 원짜리 공산품은 사물의 본래 용도가 명확하고 단순했다.
긁어내는 효자손이나 자르는 식칼처럼 개념이 직관적일수록 마수 부산물의 힘을 온전히 빨아들였다.
‘내 무기고는 시장바닥에 있어.’
태성은 츄리닝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왁자지껄한 시장 골목으로 들어섰다.
기름 냄새와 생선 비린내가 뒤섞인 골목 안에서 태성은 시스템의 고유 권능을 끌어올렸다.
[연금술사의 분해 및 재조합 (EX)]
시야가 푸르스름하게 일렁이며 매대에 진열된 온갖 잡화 위로 정보 창들이 떠올랐다.
태성의 발길이 멈춘 곳은 시장 안쪽의 ‘대성철물’ 앞이었다. 낡은 함석지붕 아래 온갖 생활잡화가 쌓여 있는 만물상이었다.
평상 한편에 꽂힌 초록색 플라스틱 파리채가 눈에 들어왔다.
[플라스틱 파리채]
- 화폐 가치: 1,000원
- 핵심 개념: [고속 타격 / 면적 압축 / 비행체 요격]
- 가성비 감응도: 88%
오직 날아다니는 벌레를 때려잡기 위해 단순화된 형태였다. 여기에 고속 타격 속성의 마수 부산물이 결합한다면 엄청난 위력이 나올 터였다.
태성은 파리채 세 개를 집어 들었다. 그 옆에 놓인 주황색 고무 뚫어뻥도 시선을 사로잡았다.
[압축 고무 뚫어뻥]
- 화폐 가치: 1,500원
- 핵심 개념: [강력 부압 / 역류 해소 / 이물질 강제 흡입]
- 가성비 감응도: 91%
상대의 마력을 강제로 빨아들이거나 틀어막힌 마력 선을 뚫어내는 용도로 제격이었다.
평상 안쪽에서 신문을 보던 철물점 노인이 안경을 내리며 쳐다보았다.
“총각, 헌터 복장을 하고 와서는 웬 파리채랑 뚫어뻥을 그렇게 골라?”
“집에 날파리도 많고 변기도 자주 막혀서요. 사장님, 여기 물건들 아주 짱짱하네요.”
“공장에서 갓 떼어온 거니까. 파리채 천 원, 뚫어뻥 천오백 원이다.”
태성이 지갑을 열려던 찰나 구석 신문지 더미 아래 처박힌 찌그러진 상자가 눈에 밟혔다. 먼지가 하얗게 내려앉은 상자 위로 푸른빛 문구가 깜빡였다.
“사장님, 저 구석에 처박힌 건 뭡니까?”
“저거? 작년 여름에 들여왔다가 안 팔려서 처박아둔 재고들이야. 쓰레기차 오면 버리려던 참인데.”
태성은 쪼그려 앉아 상자 속 먼지를 털어냈다.
빛바랜 대나무 합죽선 부채 하나와 노란색 플라스틱 뿅망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재고 대나무 합죽선 부채]
- 화폐 가치: 0원 (폐기 예정 재고)
- 핵심 개념: [기류 증폭 / 열기 분산 / 바람의 인도]
[플라스틱 뿅망치]
- 화폐 가치: 0원 (폐기 예정 재고)
- 핵심 개념: [진동 타격 / 경타 / 탄성 반발]
폐기 예정 물품이라는 것은 구매 가격을 거저로 책정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태성이 태연하게 부채와 뿅망치를 꺼내 들었다.
“사장님, 이것들도 같이 사갈게요. 묶어서 천 원에 주시죠.”
노인이 혀를 끌끌 찼다.
“버리려던 쓰레기를 왜 돈 주고 사? 그냥 천 원 내고 다 가져가라.”
“감사합니다, 사장님!”
태성이 천 원짜리 지폐를 건네며 물건들을 쥐는 순간 경쾌한 알림음이 울렸다.
띠링!
[시스템: 초저가 떨이 보정 감지!]
[실제 취득 가격: 1,000원 (정가 대비 90% 이상 감가)]
[가성비의 영주 특성 발동: 해당 물품군의 잠재 스탯 보너스 감응도가 +150% 증폭됩니다!]
단돈 몇천 원으로 확보한 파리채와 뚫어뻥, 그리고 150% 가성비 증폭이 걸린 대나무 부채와 뿅망치까지.
태성은 튼튼한 타포린 장바구니 하나를 추가로 사서 물건들을 쓸어 담았다. 쇼핑에 들어간 총비용은 채 2만 원이 되지 않았다.
서울 변두리의 낡은 옥탑방.
방바닥에 장바구니를 털어놓자 형형색색의 플라스틱 살림살이들이 쏟아져 내렸다. 남들이 보기엔 고물상 수거함 같겠지만 태성의 눈에는 보물창고였다.
태성은 겉옷을 벗고 거울 앞에 섰다.
남부 감정소와 관리국 면담을 거치는 동안 억눌렀던 피로가 밀려왔다. 갈비뼈 부근에는 멍이 남아 있었고 왼팔은 뻣뻣했다.
사흘 뒤에는 C급 게이트 실전이었다. 관리국 팀장 강이현이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는 시험대였다.
태성은 약국에서 사 온 하급 마력 순환 포션과 근육 이완제를 마셨다. 시원한 기운이 돌며 굳었던 근육이 부드럽게 풀렸다.
갈비뼈와 팔에 파스를 붙인 태성은 방바닥에 앉아 협회 단말기를 켰다.
[게이트 식별 번호: C-0419]
- 분류: 서식형 환경 게이트
- 주요 출현 마수: 화염 도마뱀 (Flame Lizard)
- 환경 특성: 내부 평균 기온 45도, 화산 암반 지대, 고열 가스 분출
‘화염 도마뱀.’
몸길이 3미터에 달하는 마수로 달궈진 암석 같은 갑피를 둘렀다. 꼬리를 휘둘러 바위를 부수고 입에서는 수백 도의 화염 브레스를 뿜어낸다.
‘지금 가진 [강철 울음 식칼]은 C급 갑피의 이음새를 자르는 데 특화되어 있어.’
식칼의 절단력은 확실하지만 사거리가 너무 짧았다. 도마뱀들이 불을 뿜으며 몰려드는 상황에서 식칼만 들고 돌진했다가는 숯덩이가 될 게 뻔했다.
원거리에서 열기를 밀어내거나 흩뿌려줄 방어 수단이 절실했다.
태성의 시선이 방바닥의 [재고 대나무 합죽선 부채]에 닿았다.
그는 부채를 가볍게 펼쳤다. 대나무 살이 펴지며 방 안에 서늘한 바람이 일었다.
태성이 손을 얹자 머릿속에서 연금 도면이 회전했다.
[개념 분석: 대나무 합죽선 부채]
- 베이스 개념: [기류 형성 및 바람의 증폭]
- 확장 가능성: 화염 속성 촉매와 결합 시 [열기 역류 / 폭염 방출 / 열풍 제어] 계열로 전이 가능.
- 예상 합성 성공률: 94% (화염 마수 부산물 사용 시)
‘역시 맞아떨어졌어.’
부채는 본래 바람을 일으켜 열을 식히는 도구다. 하지만 마력과 화염 촉매가 결합한다면 적의 불길을 되돌려치는 무기가 될 수 있었다.
그러려면 현장에서 신선한 화염 도마뱀의 부산물을 손에 넣어야 했다.
태성은 부채를 접어 품에 넣었다.
남은 사흘 동안 그는 마력 회복제를 마시며 제어 훈련에 매진했다. [마력 포획의 손] 감각을 끌어올렸고 식칼을 휘두르는 궤적을 거듭 다듬었다.
갈비뼈의 통증은 가라앉았고 왼팔 감각도 온전히 돌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사흘의 시간이 흘렀다.
경기도 외곽, 인적이 끊긴 폐공장 부지.
공장 한가운데 솟구친 붉은 게이트의 균열이 허공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틈새로 뿜어져 나오는 붉은 아지랑이가 주변 대기를 뜨겁게 달구었다.
게이트 입구 바리케이드 주변으로 중무장한 헌터 8명이 장비를 점검하고 있었다. 이번 공략을 맡은 ‘불사조’ 길드의 C급 정예 공격대원들이었다.
“오늘 게이트는 열기가 심하니까 방염 코팅 확실히 점검해.”
공격대장 최철호가 대검을 바닥에 꽂으며 대원들을 다그쳤다. 그의 몸에는 은빛으로 번쩍이는 미스릴 코팅 흉갑이 입혀져 있었다.
그때 입구 쪽에서 바스락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저기 봐라.”
방패를 든 대원이 턱짓으로 입구를 가리켰다.
대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남자를 향했다. 남자는 회색 트레이닝복 바지에 낡은 방수 점퍼를 걸치고 있었다.
대원들의 눈을 의심케 한 것은 그의 어깨에 걸린 커다란 타포린 장바구니였다.
가방 입구 밖으로 초록색 플라스틱 파리채 자루와 고무 뚫어뻥의 나무 손잡이가 깃발처럼 비죽 솟아 있었다.
“……저거 뭐냐?”
최철호의 입에서 멍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원들 사이에서 어이없다는 폭소가 터졌다.
“푸하하! 야, 저 짐꾼 뭐야? 장바구니를 메고 왔어?”
“파리채에 뚫어뻥? 게이트에 변기 뚫으러 가냐?”
노골적인 조소와 비아냥이 쏟아졌다. 헌터들의 눈에 태성의 차림새는 소풍 나온 구경꾼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태성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장바구니 끈을 고쳐 멨다.
그때 공터 입구로 검은색 세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차 문이 열리고 남색 정장을 차려입은 강이현 팀장이 내렸다.
강이현이 다가오자 비웃던 헌터들이 황급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강이현 팀장님 오셨습니까.”
최철호가 고개를 숙였다.
강이현은 가볍게 목례를 건넨 뒤 곧장 태성 앞으로 걸어왔다. 그녀의 시선이 태성의 장바구니와 그 안에서 튀어나온 파리채, 뚫어뻥에 닿았다.
순간 강이현의 단정한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진태성 씨.”
“예, 팀장님. 시간 맞춰 왔습니다.”
태성이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강이현이 관자놀이를 짚으며 물었다.
“설마 그 장바구니에 든 잡동사니들이 당신이 말한 ‘고대 연금술 장비’입니까?”
“잡동사니라뇨. 다 현장에서 생사를 가를 핵심 장비들입니다.”
태성이 씩 웃으며 장바구니를 툭 쳤다.
“팀장님, 실전에서는 폼 잡는 것보다 가성비가 최고입니다. 수천만 원짜리 번쩍이는 갑옷보다 이 천 원짜리들이 일을 더 깔끔하게 끝낼 수도 있거든요.”
강이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흘 전 면담실에서 보여주었던 태성의 흔들림 없는 눈빛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저 남자는 허세를 부리는 게 아니야.’
강이현은 숨을 들이쉬며 서류철을 다잡았다.
“좋습니다. 결과로 증명하겠다고 했으니 지켜보죠. 단, 당신 장비들이 쓸모없다는 게 밝혀지는 순간 즉시 퇴출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눈 크게 뜨고 지켜보시기만 하면 됩니다.”
태성이 대답하는 순간 게이트 통제관의 호각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삐익!
“차단벽 개방합니다! C-0419 게이트 진입 10초 전!”
육중한 철문이 열리며 붉은 소용돌이가 대지를 집어삼킬 듯 회전하기 시작했다. 뜨거운 열풍이 헌터들의 뺨을 후려쳤다.
최철호가 대검을 뽑아 들며 외쳤다.
“공격대 진입한다!”
헌터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붉은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었다.
태성은 장바구니를 어깨에 둘러메고 품속의 대나무 부채를 살짝 매만졌다.
‘화염 도마뱀 놈들아, 기다려라.’
그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태성은 주저 없이 붉은 화염의 소용돌이 속으로 성큼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