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계 유일의 24시 마트 영주님

10화: 황녀님의 특별한 한 끼
폭풍처럼 휘몰아치던 1+1 폭탄 세일의 열기가 잦아들자 심연의 아가리 앞 공터에는 모처럼 나른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준비했던 핫나인 일흔두 캔은 단 한 캔도 남지 않고 깨끗하게 팔려 나갔다. 협곡 검문소에 은화 두 닢을 던져두고 달려왔던 모험가들은 양손에 파란 철통을 든 채 던전 입구로 향하거나 야영지로 흩어졌다.
카운터 안쪽에서 짤랑거리는 맑은 금속음이 울렸다. 리아가 나무 상자 가득 찬 은화를 세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도련님, 백팔십 닢입니다. 하나를 덤으로 얹어주었는데도 은화 백팔십 닢이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손님이 손해 볼까 두려워할 때 압도적인 혜택을 쥐여주면 판세는 뒤집히는 법이지.”
진우는 행주로 카운터의 물기를 훔쳐냈다.
로델 영주가 놓았던 옹졸한 통행세 덫은 완벽하게 부서졌다. 오히려 AZA 24의 명성은 협곡 너머 제국 통상로까지 들불처럼 번져나가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진우의 시야에 반투명한 청록색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띠링!]
[영지 인지도 D단계 도달 특수 알림]
[특수 관찰자(제국 고위층)의 매장 접근이 감지되었습니다.]
[보유 시스템 포인트: 480P]
[특수 신규 카테고리 '즉석 보급 및 프리미엄 식음료'가 개방됩니다.]
- 제육불고기 정식 도시락: 갓 지은 쌀밥과 매콤달콤한 불고기, 계란말이, 볶음김치로 구성된 온기 보존형 완성식.
- 드립백 원두커피(다크 로스팅): 엄선된 원두를 분쇄해 질소 포장한 드립백. 끓는 물을 부어 즉석 추출.
- 부속 설비 지원: 간이 온수 디스펜서 및 마도 보온 쇼케이스.
진우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고위층이라. 아까 언덕길 마차에서 망원경을 들고 있던 손님이 직접 오시는군.’
큰 행사를 마치고 나면 반드시 거물 고객이나 경쟁 상권의 눈동자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거친 모험가용 휴대식만으로는 그들의 입맛을 붙잡을 수 없다. 때맞춰 즉석 조리 식음료 코너가 열린 것은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진우는 곧바로 포인트를 집행했다.
[시스템 포인트 150P를 소모합니다.]
[제육불고기 정식 도시락 10개, 드립백 원두커피 20세트, 보온 쇼케이스 및 온수 디스펜서 입고 완료.]
[남은 시스템 포인트: 330P]
카운터 옆 빈자리에 은은한 붉은빛을 머금은 유리 장식장과 매끄러운 금속 온수기가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쇼케이스 안에는 정갈하게 밀봉된 사각 도시락들이 따뜻한 열기를 뿜으며 정렬되었고 온수기 밸브 위로는 맑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도련님, 이 상자는 또 뭡니까? 안에서 기분 좋은 온기가 흘러나옵니다.”
“장거리 여행에 지친 귀한 손님을 맞이할 비장의 무기지. 리아, 자세 바로잡아. 손님 오신다.”
공터 너머에서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앞장서 걸어오는 여인은 먼지가 살짝 묻은 감색 여행자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깊게 눌러쓴 후드 틈으로 짙푸른 보석 같은 머리칼과 잡티 하나 없는 백옥 같은 턱선이 엿보였다. 수수한 옷차림이었으나 곧게 뻗은 걸음걸이와 주위를 살피는 눈길에는 숨길 수 없는 제국 황족 특유의 위엄이 서려 있었다.
그녀의 반 걸음 뒤를 따르는 호위 기사는 단단한 체구에 날카로운 눈매를 지니고 있었다. 평범한 용병 가죽 갑옷을 입었으나 검자루에 얹은 손가락의 각도와 살기 어린 경계 태세는 황실 근위대 최정예의 기백이었다.
호위 기사 빅터는 1평 남짓한 철제 컨테이너 매장과 소매를 걷은 채 행주를 든 진우를 훑어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따위 조잡한 오두막에서 로델 가문의 검문소를 무력화했단 말인가? 저 자가 버려졌다는 서자 카일 폰 그라트?’
진우는 빅터의 날카로운 시선에도 태연했다. 편의점 점장 시절 온갖 취객과 악성 고객을 겪어본 그에게 기사 한 명의 살기 따위는 대수롭지 않았다.
여인이 카운터 앞에 멈춰 서며 후드를 가볍게 젖혔다.
우아한 콧날과 맑고 차가운 청안이 드러났다. 그녀는 나직하면서도 기품 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곳이 소문의 그 잡화점인가요?”
“잡화점이라기보다는 24시 편의점 AZA 24입니다, 손님. 어서 오십시오.”
진우가 서비스직 특유의 정중하고 매끄러운 미소를 건넸다.
여인은 진우의 여유로운 태도에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저는 제도에서 상단 물류를 시찰하러 나온 여행 상인 엘이라고 해요. 협곡 검문소를 뒤흔들었다는 그 푸른 캔 음료를 맛보고 싶군요.”
말투는 상인을 자처했으나 어휘와 몸가짐은 감출 수 없었다. 진우는 그녀가 제국의 최상류층 인물임을 단박에 꿰뚫어 보았다.
하지만 장사의 원칙은 엄격했다. 진우는 손바닥을 가볍게 펼쳐 보였다.
“손님, 안타깝지만 핫나인은 방금 전량 완판되었습니다. 오늘 준비한 물량이 십 분 만에 바닥났거든요.”
빅터가 즉시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서슬 퍼런 목소리로 다그쳤다.
“무례하다! 감히 이분의 청을 거절하겠다는 것이냐? 뒤편 창고에 숨겨둔 재고라도 당장 내오지 못할까!”
리아의 손이 번개처럼 허리춤의 검자루에 닿았다. 팽팽한 살기가 공간을 메웠다.
진우는 차분하게 손을 들어 리아를 말리고 빅터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손님, 우리 매장의 제1원칙은 선착순 공정 판매입니다. 제국의 대귀족이 오시든 황제 폐하가 오시든 없는 재고를 만들어낼 수는 없죠. 헛걸음하신 건 유감입니다만 소리를 지른다고 빈 진열대가 채워지진 않습니다.”
“네놈이 정녕…!”
“빅터, 물러서요.”
여인이 단호하게 호위를 제지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 짙은 흥미가 어렸다.
‘권력자의 위압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군. 몰락 서자라는 소문과 달리 자신의 영역에서 완벽한 주도권을 쥐고 있어.’
여인은 오히려 진우의 꼿꼿한 원칙에 호감을 느꼈다.
“호위가 결례를 범했군요. 규칙을 엄수하는 상인의 태도는 흠잡을 데가 없어요. 하지만 빈손으로 돌아서기엔 발걸음이 아쉬운데 다른 추천할 물건은 없나요?”
진우의 입가에 기다렸다는 듯 영업용 미소가 번졌다.
“당연히 있습니다. 장거리 여행으로 출출하실 텐데 방금 막 도착한 기가 막힌 온기가 있거든요.”
진우는 몸을 돌려 보온 쇼케이스의 문을 열었다.
쇼케이스가 열리자 그윽한 숯불 향과 갓 지은 쌀밥의 구수한 내음이 매장 밖으로 화사하게 쏟아져 나왔다.
진우는 정갈한 사각 용기에 담긴 제육불고기 도시락을 꺼내 카운터에 올렸다.
투명한 뚜껑 안쪽으로 뽀얀 김이 서려 있었다. 고슬고슬 윤기 나는 흰 쌀밥 곁으로 매콤달콤한 붉은 양념이 자작하게 밴 돼지고기 불고기가 푸짐하게 담겨 있었다. 노란 계란말이 두 조각과 윤기 흐르는 볶음김치가 단정하게 곁들여져 있었다.
동시에 진우는 도자기 머그잔 위에 펄프 재질의 드립백을 걸쳤다.
온수 디스펜서 밸브를 열어 팔팔 끓는 뜨거운 물을 가늘고 둥글게 천천히 부었다.
치이익―.
원두 가루가 뜨거운 물을 머금고 부풀어 올랐다. 짙은 갈색의 커피 원액이 똑똑 떨어져 내리며 메마른 흙먼지 냄새를 순식간에 지워냈다.
쌉싸름하면서도 고소하고 깊은 초콜릿 향과 은은한 과일 산미가 어우러진 매혹적인 아로마가 여인과 빅터의 코끝을 찔렀다.
빅터가 흠칫 숨을 들이켰다.
‘이게 무슨 향이지? 제국 남부 최고급 카파 열매 향보다 훨씬 깊고 맑다!’
여인 역시 짙은 커피 향에 시선을 빼앗겼다. 황궁 살롱의 최고급 원두조차 이토록 순수하고 농밀한 향을 내뿜지는 못했다. 게다가 네모난 상자 속 요리는 갓 주방에서 불을 때어 차려낸 것처럼 뜨거운 김을 품고 있었다.
“이것은… 요리인가요?”
“제육불고기 정식 도시락과 갓 내린 드립 원두커피입니다. 야외에서 찬 빵을 씹는 건 고역이죠. 여기 앉아서 따뜻할 때 드셔보십시오.”
빅터가 여인의 귓가에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아가씨, 출처를 알 수 없는 음식입니다. 변방 영지에서 이런 이질적인 요리가 나온다는 것 자체가 기괴합니다. 제가 먼저 기미를…”
“필요 없어요, 빅터. 이토록 품격 있는 향을 내는 자가 독을 섞을 리 없어요. 내 눈앞에서 물을 부어 내린 음료이기도 하고요.”
여인은 망토 자락을 정돈하고 간이 테이블에 앉았다.
그녀는 진우가 건넨 나무젓가락을 쥐었다. 손에 닿는 촉감이 낯설었으나 진우의 가벼운 시범을 눈여겨보더니 이내 우아하게 젓가락을 놀렸다.
뚜껑을 열자 매콤한 불향이 폭포처럼 터져 나왔다.
여인은 윤기 흐르는 불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고기가 닿는 순간 은은한 불향과 함께 부드러운 육질이 씹혔다. 첫맛은 감칠맛 도는 단맛이었으나 곧이어 기분 좋은 알싸함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잡내 없이 육즙이 풍성하게 살아 있었다.
“……!”
여인의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커졌다.
그녀는 곧바로 고슬고슬한 쌀밥을 한 숟가락 떠 넣었다.
밥알의 은은한 단맛과 제육불고기의 매콤한 양념이 혀끝에서 완벽하게 맞물렸다. 거친 귀리 빵과 퍽퍽한 고기 파이에 길든 이세계의 식문화에서는 경험해 보지 못한 폭발적인 조화였다.
부드러운 계란말이가 매운맛을 다독였고 아삭한 볶음김치가 개운한 산미로 뒷맛을 깔끔하게 잡아주었다. 치밀하게 계산된 한 끼의 완벽한 궤적이었다.
어느새 도시락 바닥이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여인은 입가를 닦아낸 뒤 진우가 내민 따뜻한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검은 액체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들이켰다.
묵직한 바디감과 함께 쌉싸름한 맛이 혀를 누르더니 산뜻한 산미와 견과류의 고소한 여운이 목을 타고 매끄럽게 넘어갔다.
‘머리가… 맑아진다.’
장거리 이동과 제국의 정쟁으로 짓눌렸던 머릿속 피로가 깨끗이 씻겨 내려갔다. 마나를 억지로 들쑤시는 포션과 달리 신경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품격 높은 각성이었다.
여인은 잔을 내려놓으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황궁 요리장들이 내놓는 코스 요리도 이토록 완벽한 온기와 조화를 주지는 못했어요.”
“만족하셨다니 다행입니다. 도시락은 은화 두 닢, 드립커피는 은화 세 닢이지만 세트 할인으로 은화 네 닢만 받겠습니다.”
여인은 카운터 위에 맑은 은화 네 닢을 단정하게 올려놓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이미 단순한 손님의 시선을 넘어서 있었다.
여인은 보온 쇼케이스와 온수 디스펜서, 그리고 규격화된 도시락 용기를 예리하게 훑었다.
“카일 폰 그라트 영주님.”
여인이 그의 진짜 신분을 입에 올렸다. 리아가 긴장하며 어깨를 굳혔으나 진우는 묵묵히 미소를 유지했다.
“단순히 맛있어서 감탄한 게 아니에요. 제가 보고 있는 건 이 방식의 거대함입니다.”
“방식이요?”
“황실 요리는 수십 명의 요리사가 반나절을 매달려야 해요. 하지만 이곳에서는 단 몇 초 만에 갓 지은 밥과 고기가 손에 쥐어졌죠. 포장은 규격화되어 있고 끓는 물만 있으면 최고급 각성 음료가 완성돼요.”
여인의 청안이 예리하게 빛났다.
“이동하는 군대의 군량, 대륙을 건너는 상단의 보급망, 던전을 개척하는 원정대… 그 모든 물류와 전쟁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혁신이에요.”
진우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제1황녀라더니 과연 통찰력이 보통이 아니군.’
편의점 도시락과 드립커피의 본질은 단순한 끼니가 아니다. 철저한 규격 생산과 보급망, 어디서든 동일한 품질을 즉시 제공하는 물류 시스템이다. 여인은 단 한 번의 식사로 그 핵심을 꿰뚫어 보았다.
진우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글쎄요. 저는 그저 손님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팔았을 뿐입니다. 거창한 물류 혁명은 장사가 더 커진 뒤에 고민해 보죠.”
여인은 피식 웃으며 후드를 다시 깊게 눌러썼다.
“발뺌하지 마세요. 당신은 이미 자신이 무엇을 쥐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어요. 로델 같은 자의 좁은 시야로는 결코 당신을 담아내지 못할 겁니다.”
그녀는 공터를 향해 돌아서며 나직한 여운을 남겼다.
“머지않아 제도에서도 이 향기를 다시 맡을 수 있기를 기대하겠어요, 카일 영주님.”
빅터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뒤 여인의 뒤를 바짝 따랐다. 두 사람의 그림자는 언덕길 너머 흑단 마차 속으로 조용히 사라졌다.
진우가 은화 네 닢을 손안에서 가볍게 튕겼다.
시야에 황금빛 시스템 알림이 떠올랐다.
[띠링!]
[특수 퀘스트: 황실 유력 인사와의 성공적인 조우]
[제1황녀 엘레나에게 규격 보급과 식음료 물류의 가치를 각인시켰습니다.]
[황실 통상망 및 제도 진출 연계 단초 확보]
[시스템 포인트 +200P 적립 / 현재 보유 포인트: 530P]
리아가 멍한 표정으로 마차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도련님… 방금 그 여인, 평범한 상인이 아니었습니다. 혹시 황실의…?”
“알면 머리만 아파. 은화 넉 닢 기분 좋게 내고 간 고마운 단골이라고 생각하자고.”
진우가 은화를 상자에 넣고 웃었다.
그때 서쪽 바위산 너머로 해가 저물며 던전 입구에 짙푸른 어둠이 깔렸다.
“크윽… 젠장! 던전 안이 완전히 암흑천지야!”
피투성이가 된 모험가들이 심연의 아가리에서 비틀거리며 쏟아져 나왔다. 맨 앞의 바드가 부러진 횃불 자루를 땅에 내던지며 거친 숨을 토해냈다.
“점장 양반… 해가 지면 던전 안은 칠흑 같은 지옥이오. 불을 켜면 마물이 몰려오고 불을 끄면 함정에 걸려 죽소! 밤에는 도저히 공략할 수가 없소!”
어둠 속에서 깜빡이는 모험가들의 피로한 눈빛들이 AZA 24의 불빛을 향해 모여들었다.
진우의 시선이 던전의 깊은 어둠과 시스템 목록으로 향했다.
그의 눈동자가 장사꾼의 예리한 호기심으로 빛났다.
“밤이라고 손가락 빨고 있을 수는 없지. 어두울수록 장사는 더 잘되는 법이야.”
차가운 밤바람 속에서 진우는 야간 공략을 위한 새로운 진열대를 구상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