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은 대화로 나눕니다

3화: 남겨 둔 방
미란은 밤새 봉투를 열어 두지 못했다. 어머니가 적은 메모에는 투숙객에게 돌려줄 돈, 여관 계좌에서 빌린 금액, 현우에게 보내야 할 이자 날짜가 서로 다른 필체로 적혀 있었다. 맨 아래에는 “서준 사업비는 여관에서 빌린 것으로 하고, 여관이 다시 열리면 갚는다”고 쓰여 있었다.
서준은 어머니의 메모를 보자마자 얼굴이 굳었다. “내가 빌려 간 돈은 1천만 원이야. 엄마가 주신 거라고 했어.”
현우가 장부를 펼쳤다. “이 날짜에 여관 통장에서 1천만 원이 빠졌어. 네 가게 창업 때였네.”
“엄마가 먼저 주셨다고 했어.”
“그럼 왜 여관에 갚겠다는 문장이 있어?”
미란이 봉투를 움켜쥐었다. “엄마가 쓰셨으니 이제 갚으라고 할 거야? 그 돈은 네 가게가 망한 뒤에도 어머니가 한 번도 말하지 않았어.”
서준은 시선을 내렸다. “가게는 망했지만 돈을 갚으려고 했어. 엄마가 받지 않아서 못 갚았어.”
“그럼 네가 여관을 인수하겠다는 돈은 어디 있어?” 현우가 물었다.
서준은 파트너가 보낸 제안서를 꺼냈다. 초기 투자금 7천만 원 중 3천만 원은 대출, 나머지는 매출에 따라 상환하는 조건이었다. 파트너는 여관 이름을 바꾸고 객실 세 개를 월세로 전환하길 원했다. 서준은 간판 시안에 적힌 ‘백조’ 글자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이대로면 이름은 남길 수 있어. 대신 손님 세 팀은 다른 데로 옮겨야 해.”
미란은 강 할머니 방을 생각했다. “그 조건으로는 못 해.”
“나도 알아. 그래서 바꾸고 싶어.”
“파트너가 계약을 바꿔 줄까?”
“모르겠어.”
서준이 모른다고 말하자 현우는 비웃지 않았다. 대신 대출 표를 꺼냈다. “나도 여관에 넣었다고 생각한 돈 중 일부가 내 업체 운영비로 갔어. 엄마 병원비라고만 말해 왔는데 정확하지 않아. 계좌를 정리해서 진짜 여관에 쓴 돈만 계산할게.”
미란은 그를 바라봤다. “왜 그동안 숨겼어?”
“돈을 빌린 건 나였고, 말하면 여관을 내세워 사업을 한 것처럼 보일까 봐. 내가 낸 이자가 전부 여관 돈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어.”
그는 말끝을 흐렸다. 현우의 장부도 완전하지 않았다. 그는 그 사실을 가족 앞에서 처음 인정했다. 미란은 봉투에서 장기 투숙객에게 돌려줄 돈을 분리했다. 그 금액은 여관 공동재산으로 계산할 수 없었다. 투숙객에게 받을 방값과 갚을 보증금은 가족 상속과 다른 관계였다.
해인은 조정실에서 세 사람을 기다렸다. 그들은 이번에는 각자 다른 서류가 아니라 어머니의 봉투를 가운데 놓았다. 해인은 먼저 봉투를 열지 않고 누가 내용 공개를 동의하는지 물었다. 미란은 자신이 찾아온 메모이며, 가족 모두에게 보여 주고 싶다고 했다. 서준은 동의했고 현우는 모든 항목을 읽을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럼 지금은 한 장씩 읽고, 확인된 숫자와 해석을 나눠 적겠습니다.” 해인이 말했다.
미란은 메모를 읽었다. 서준이 빌린 1천만 원은 여관에서 빌린 돈으로 기록돼 있었다. 현우의 대출 이자는 일부 여관 계좌에서 자동이체됐지만, 그 돈이 현우의 사업 계좌로 되돌아간 기록도 있었다. 어머니는 두 흐름을 알고도 한 장의 장부에 합쳐 적었다. 그녀는 자녀들에게 각각 다른 말을 한 셈이었다.
현우는 “어머니가 우리 모두를 속였다는 뜻이야?”라고 물었다.
해인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이 메모만으로 어머니의 의도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기록한 시기와 다른 장부가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미란은 눈가를 훔치지 않았다. “엄마가 누구한테도 빚을 지우고 싶지 않아서 그랬을 수도 있어. 아니면 나한테만 말해 놓고 잊었을 수도 있고.”
“네가 그렇게 믿으면 네 몫을 줄일 수 있어?” 현우가 물었다.
“아니. 어머니가 한 일과 내가 간병한 건 다른 문제야.”
해인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구분이 오늘 합의에서 중요합니다. 간병 기여를 인정하되, 공동재산의 채무를 별도로 정산할 수 있어요. 서준 씨 대여금도 증여로 볼지 상환할지 세 분이 합의해야 합니다.”
서준은 어머니의 문장을 다시 읽었다. “이 돈은 갚을게. 내가 여관을 인수하지 못해도.”
현우가 물었다. “언제?”
“내가 운영하겠다는 파트너 조건을 다시 바꾸고, 월 매출에서 일정액을 갚을게. 그게 안 되면 별도 일을 해도 매달 갚아.”
미란은 “약속만 쓰지 말고 금액과 기간을 적어”라고 했다. 서준은 3년 동안 매달 30만 원을 갚겠다고 제안했다. 현우는 금액이 적다고 했지만, 더 큰 액수를 쓰면 다시 못 지킬 수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미란은 원금 외에 이자는 받지 않겠다고 했다. 서준은 그 조건을 그대로 적었다.
그날 조정은 채무 합의 한 건만 성립했다. 여관의 매각 여부와 지분은 정하지 못했다. 해인은 서준이 갚아야 할 돈을 상속 지분에서 자동 공제하지 않는다고 문서에 명시했다. 형제들이 자발적으로 합의한 대여금 상환 약속이었다. 그 차이를 이해했는지 각자에게 다시 물었다.
현우는 여관 대출을 정리해 다시 가져오겠다고 했다. 사업 계좌로 나간 돈을 여관에 쓴 것으로 계산하지 않기로 했다. 미란은 간병 기간과 객실 수입을 정리하되, 강 할머니의 이름과 사정은 가렸다. 서준은 파트너에게 임차인 퇴거 조건을 바꿀 수 있는지 물어보겠다고 했다.
“그럼 여관을 팔지 않는다는 건 아직 합의가 아니죠?” 현우가 확인했다.
“맞습니다. 오늘 합의는 서준 씨의 대여금 반환뿐입니다.” 해인은 합의서의 범위를 읽어 줬다. “여관 매각, 운영권, 간병 기여는 다음 조정에서 계속 다룹니다.”
미란은 펜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나는 간병비를 받고 싶은지 아직 모르겠어요. 돈을 받으면 엄마와 보낸 시간이 거래처럼 느껴질까 봐.”
현우가 말했다. “나는 네 시간이 공짜였다고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그걸 어디까지 돈으로 정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
그는 미란을 보며 말을 덧붙였다. “이제 와서 이런 말 하는 게 늦었지.”
미란은 “늦었어”라고 답했다. “그래도 다음에는 먼저 말해.”
조정실 밖에서 미란은 여관 장기 투숙객 강 할머니에게 전화했다. “수리하는 동안 객실 문을 하루 닫을 수 있어요. 다른 방으로 옮겨 드릴게요.” 할머니는 잠시 생각한 뒤 “방을 옮기면 창문으로 바다가 안 보여”라고 말했다. 미란은 2층 복도 끝 객실을 고쳐 그 방을 내주기로 했다. 서준은 공구를 가져오겠다고 했고, 현우는 보일러 수리 비용을 선지급하겠다고 했다. 그 돈을 최종 분담으로 볼지는 다음 조정에서 정하기로 했다.
세 남매는 여관으로 함께 갔다. 객실의 창문 틈으로 비가 들이쳤고, 낡은 문틀이 부풀어 있었다. 서준은 경첩을 풀고 새 나사를 끼웠다. 미란은 강 할머니가 머물 방을 치우고, 현우는 자재비 영수증을 챙겼다. 아무도 어머니가 이걸 보고 기뻐했을 거라고 말하지 않았다.
경첩을 다 고친 뒤 세 남매는 복도 바닥에 앉아 공구를 정리했다. 미란은 어머니가 임종 직전까지 여관 문을 닫지 말라고 했다고 말했다. 현우는 어머니가 “너희끼리 싸우지 말라”고 했던 기억을 꺼냈다. 서준은 어머니가 자기가 돌아오면 방 하나를 내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했다.
“엄마가 같은 날 세 사람에게 다른 말을 했을 수도 있어.” 현우가 말했다. “아니면 우리가 듣고 싶은 말만 기억할 수도 있고.”
미란은 장부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그 말이 다 진짜여도, 여관이 빚을 갚아 주진 않아.”
“맞아.” 서준은 나사를 통에 담았다. “그래도 내가 돌아오겠다고 한 건 어머니 말 때문만은 아니야. 내가 안 와서 누나한테 다 맡긴 게 미안했어.”
미란은 그를 바라봤다. “미안하다고 해서 방을 다시 받을 수 있는 건 아니야.”
“알아. 나는 그걸 요구하지 않을 거야.”
현우는 그 말을 듣고도 위로하지 않았다. 대신 공구함을 닫았다. “다음번에는 수리비부터 정하자.”
세 사람은 어머니가 무슨 말을 했는지 결론 내리지 않았다. 그들은 손님방의 걸쇠를 고쳤고, 다음 날 강 할머니가 다시 바다를 볼 수 있게 창문도 닦기로 했다.
문이 닫히자 강 할머니는 안에서 걸쇠를 잠갔다. “이제 바람 안 들어오네. 미란아, 네 엄마한테 고맙다고 해 줘.”
미란은 “엄마는 여기 없어요”라고 말한 뒤, 잠시 망설였다. “그래도 전해 드릴게요.”
그날 밤 해인은 다음 회기 일정을 잡았다. 남매의 채무 일부는 정리됐지만, 여관의 미래는 남아 있었다. 해인의 전화에는 언니의 부재중 전화가 한 통 떠 있었다. 아버지 간병을 미뤄 둔 뒤 언니가 처음 건 전화였다. 해인은 다시 전화를 걸지 못하고 화면을 껐다.
여관 2층에서 현우는 담보 상환표를 다시 펼쳤다. 미란은 간병 달력에서 날짜를 지우지 않았다. 서준은 파트너에게 계약 조건을 수정해 달라는 메일을 썼다. 마지막 문장에는 “현재 투숙객을 내보내는 안은 받지 않겠습니다”라고 적었다. 전송 버튼을 누르기 전, 그는 누나에게 보여 줬다.
미란은 화면을 읽었다. “이건 내가 대신 결정할 일이 아니야.”
“그래서 보내기 전에 보여 주는 거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준은 메일을 보냈다. 조정은 가족에게 답을 주지 않았지만, 그들은 처음으로 각자 어떤 조건을 지킬지 스스로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때 서준의 휴대전화에 파트너의 답장이 도착했다. “투숙객 유지 조건이면 투자 철회하겠습니다.” 서준은 화면을 형제에게 보여 줬다. 이번에는 누구도 대신 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