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은 대화로 나눕니다

2화: 장부에 없는 밤
미란은 여관 장부를 조정실에 가져왔다. 매달 적힌 금액은 객실 번호가 아니라 이름과 날짜로 나뉘어 있었다. 오래 머문 손님들은 병원 통원 날짜와 함께 표시됐다. 해인은 장부를 바로 현우에게 건네지 않았다. 미란에게 먼저 어떤 범위까지 공유해도 되는지 물었다.
“금액이랑 기간은 공개할게요. 손님 이름은 가려 주세요.”
현우가 불만을 표했다. “임대료를 받았는지 확인해야 하잖아.”
“그래서 금액을 보여 주는 거예요. 그 사람들한테 연락하지는 말아 주세요.”
해인은 객실 번호와 입금 내역을 복사하고 이름을 가렸다. 여관 세 객실에서 들어온 돈은 4년간 2천8백만 원이었다. 미란은 그중 상당액을 보일러 교체와 어머니의 식사비, 병원 왕복 택시에 썼다고 말했다. 현우의 대출 계좌에서는 같은 기간 3천1백만 원이 빠져나갔다. 하지만 그 계좌는 현우의 건설업체 계좌와 섞여 있었다.
“내가 여관에 넣은 돈이 얼마인지 나도 정확히 몰라.” 현우가 인정했다. “현장 대금이 밀린 달에는 여관 대출이 내 업체 운영비로 갔고, 다음 달에 다시 채워 넣었어.”
미란은 의자를 밀었다. “그러면 네가 냈다는 이자가 전부 엄마를 위한 건 아니었네.”
“그래서 계좌를 열어 보자고 하는 거야. 숨기려는 게 아니라 구분이 안 돼서 그래.”
“그때는 구분이 됐어? 엄마가 병원에 갈 때마다 네가 돈을 보낸 건 아니잖아.”
현우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계좌 거래내역에서 여관 관련 항목을 표시해 왔다. 공사 자재비와 병원비, 업체 인건비가 같은 계좌에서 나갔다. 해인은 지출 내역을 임의로 여관 비용으로 분류하지 않았다. 현우가 지정한 항목을 다시 확인했고, 미란이 영수증을 찾을 수 있는 것은 다음 회기까지 비교하기로 했다.
서준은 회의 중간에 여관 재개장 계획을 꺼냈다. 그는 지역 여행사와 통화한 기록, 예약 사이트 수수료, 객실 수리 견적을 준비했다. 계획서는 보기 좋았지만 아직 자금 조달이 없었다. “파트너가 7천만 원을 넣을 수 있다고 했어요. 대신 여관 이름을 바꾸고 2층을 장기 임대로 돌리자는 조건입니다.”
“어머니 이름을 지우겠다는 거야?” 미란이 물었다.
“브랜드를 새로 하자는 거예요. 그게 매출에 낫대요.”
“방 세 개를 장기 임대로 돌리면 강 할머니가 나가야 하잖아.”
서준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돌아와 어머니의 여관을 살리겠다고 했지만, 사업 파트너에게는 손님을 내보내도 된다고 말한 상태였다. “계약은 아직 안 했어요. 조건을 바꾸면 됩니다.”
해인은 서준에게 파트너 이름과 투자 조건을 서류로 가져오라고 했다. “현재 제안은 여관을 살리는 안이 아니라, 수익 조건을 협상하는 안입니다. 임차인에게 미치는 영향도 적어야 합니다.”
서준은 처음으로 누나를 보지 않고 해인을 바라봤다. “저는 형처럼 대출만 내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어요. 서울에서 10년 일했는데,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거의 못 왔습니다. 여관을 새로 열면 지금이라도 뭔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미란의 얼굴이 굳었다. “네가 돌아오면 엄마가 살아나는 건 아니야.”
“알아.”
“그런데 너는 계획서만 들고 와서 우리가 미뤄 둔 걸 다 고칠 수 있다고 말해.”
서준은 계획서를 접었다. “누나가 더 잘했어. 그래도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있잖아.”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먼저 말해. 엄마 방을 세 달 동안 비우지 않는 거? 강 할머니 보일러를 고치는 거? 나 대신 예약 전화를 받는 거?”
서준은 대답을 찾지 못했다. 잠시 뒤 그는 “오늘 여관에 가서 보일러부터 보겠다”고 말했다. 미란은 허락하지 않았다. “혼자 들어오지 마. 손님들이 불편해해.”
해인은 그 요구를 받아 적었다. 서준이 현장에 가려면 미란과 함께 방문 시간을 정하고, 손님 방에 들어가지 않는 조건을 지키기로 했다. 단순한 절차처럼 보였지만, 미란은 여관의 운영권을 빼앗기지 않고 현우와 서준은 실제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점심시간에 세 남매는 조정실을 나와 여관으로 갔다. 해인은 조정인으로서 동행하지 않았다. 당사자들이 합의한 현장 확인은 그들끼리 진행할 일이었다. 현우는 보일러실에서 교체 견적을 확인했고, 서준은 강 할머니 객실의 온도계를 살폈다. 미란은 카운터에서 전화 예약을 받으며 두 사람이 손님을 부르지 않도록 지켜봤다.
객실에서 강 할머니가 내려왔다. 그는 미란의 앞치마를 보고 “내가 낸 돈을 간병비로 쓴 건 아니지?”라고 물었다. 미란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 “일부는 병원 왕복 택시에 썼어. 그런데 할머니 돈을 어머니 병원비로 쓰겠다고 한 적은 없어.”
“나는 방값으로 냈어. 어머님이 매달 적어 주셨잖아. 그 돈이 형제 싸움 자료가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현우는 손에 든 견적서를 접었다. “그럴 생각은 없었습니다.”
강 할머니는 그를 곧바로 믿지 않았다. “그럼 여관 팔기 전에 우리한테 언제까지 있어도 되는지 알려 줘요.”
세 남매는 대답할 수 없었다. 미란이 먼저 말했다. “오늘은 방을 비우실 일 없어요. 결정 나면 미리 말씀드릴게요.”
해인은 없었지만, 그녀가 조정실에서 분리해 둔 ‘손님 계약’과 ‘상속분’이 같은 테이블로 다시 올라왔다. 가족의 합의는 당사자 셋에게만 영향을 주지 않았다.
보일러는 순환 펌프가 멈추기 직전이었다. 수리비는 180만 원. 현우가 견적서를 보자 미란이 말했다. “내가 지난주에 부품 바꾸자고 했어요.”
“이 견적이 그때 받았던 거야?”
“응. 네가 여관에 돈을 더 넣기 어렵다고 해서 미뤘어.”
현우는 반박하려다 말을 멈췄다. 그는 수리를 미루면 겨울 장기 투숙객이 떠날 걸 알고 있었다. “내가 반을 낼게. 나머지는 장부에서 빼자.”
“그걸 지금 합의한 건 아니야.” 미란이 말했다.
“그럼 반이라도 먼저 넣고 다음 조정 때 정산하자.”
서준은 자기 통장을 열어 보였다. 당장 보낼 수 있는 돈은 60만 원뿐이었다. “이 돈으로 부품은 살 수 있어요. 설치는 제가 할게요.”
현우가 물었다. “전기 설비도 볼 줄 알아?”
“학교에서 배관은 했지만 보일러는 다릅니다. 기사 부르고, 저는 객실 수리할게요.”
미란은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서준의 계획서가 아니라 손을 봤다. “그럼 오늘 객실 문 손잡이부터 고쳐. 자꾸 걸려.”
서준은 공구함을 가져왔다. 간단한 수리였지만 미란은 그가 끝낼 때까지 카운터에서 기다렸다. 나사를 조인 뒤 문이 부드럽게 닫혔다. “이건 네가 할 수 있네.”
서준은 웃으려다 그만뒀다. “이런 거라도 매일 할게.”
미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객실 열쇠 세 개를 다시 정리했다. 현우는 보일러 견적서에 서명하지 않은 채 가져갔다. 비용을 누가 부담할지는 여전히 합의되지 않았다.
조정실로 돌아온 뒤 해인은 각자가 원하는 조건을 한 문장으로 적어 보게 했다. 현우는 ‘대출 상환 부담을 더 지지 않는다’고 썼고, 미란은 ‘현재 손님이 갑자기 방을 잃지 않는다’고 썼다. 서준은 ‘여관을 운영할 기회가 한 번은 있다’고 썼다. 세 문장은 서로 부딪혔다.
“현우 씨 조건에는 매각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해인이 말했다. “부담을 줄이려는 것이지, 꼭 팔고 싶은 건가요?”
현우는 종이를 내려다봤다. “팔고 싶다기보다, 빚이 늘어나는 게 겁납니다. 제가 낸 돈이 돌아오지 않을까 봐요.”
“미란 씨는 운영을 계속하고 싶습니까?”
“손님들이 나갈 때까지는요. 그 뒤에는 생각해 볼 수 있어요.”
서준은 ‘기회’라는 단어 옆에 투자 조건을 적었다. 이름 변경, 객실 장기 임대, 수리비 분담. 미란은 그 조건에 바로 동의하지 않았다. 해인은 서준에게 파트너의 공식 제안서를 가져오라고 했다. 제안서가 오기 전에는 그 계획을 가족 합의안처럼 다루지 않기로 했다.
회의가 끝난 뒤 현우는 해인에게 따로 말했다. “저는 엄마 병원비를 냈는데, 동생들은 그게 집안일이라고 해요.”
“현우 씨가 원하는 건 돈을 돌려받는 것입니까, 고생을 인정받는 것입니까?”
그는 답하지 않았다. “둘 다겠죠.”
해인은 그 질문에 금액을 붙이지 않았다. “다음 회기 전까지 계좌에서 여관 비용과 사업 운영비를 구분해 오세요. 미란 씨도 장부와 영수증을 정리하고, 서준 씨는 파트너 조건과 수리 계획을 제출해 주세요. 그 결과를 보고 각자 원하는 합의안을 다시 쓰겠습니다. 현우는 “그럼 우리는 한 주 동안 아무 결정도 못 하는 겁니까?”라고 물었다. 해인은 “보일러는 안전 문제라 즉시 수리하셔도 됩니다. 그 비용을 누가 최종 부담할지는 별도 합의로 남기죠”라고 답했다. 미란은 고개를 끄덕였고, 현우는 처음으로 견적서를 접지 않았다.”
다음 주까지는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강 할머니는 보일러가 꺼진 방에서 지낼 수 없었다. 미란은 현우에게 먼저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 현우도 먼저 돈을 보내지 않았다. 서준은 공구함을 챙겨 여관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 미란은 어머니가 남긴 서랍에서 얇은 봉투 하나를 찾았다. 봉투 겉면에는 자기 이름이 아니라 ‘2층 손님들’이라고 적혀 있었다. 안에는 강 할머니가 낸 돈의 일부를 돌려주라는 메모와, 여관 수익으로 갚아야 할 사업 대출 내역이 함께 들어 있었다. 미란은 봉투를 덮었다. 이제 가족이 나눠야 할 것은 건물뿐 아니라, 어머니가 숨긴 빚의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