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급제한 학사가 무림을 통제함

2화: 사흘의 황표
황제의 목소리가 묵향당의 서늘한 공기를 갈랐다.
"서문진. 네가 이 썩어 빠진 금의위의 총사령관이 되어 강호의 칼날들을 황실의 법 아래 무릎 꿇려 보겠느냐?"
서안 위에 놓인 흑철패는 차가운 쇳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선황 시절 천하의 문파와 탐관오리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권표. 하지만 지금은 조정 대신들의 비웃음을 사고 강호의 무인들에게 조롱받는 빈 껍데기였다.
서문진은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단전에 남은 미약한 기운으로 식도의 남은 화기(火氣)를 다스리며 황제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젊은 군주의 눈동자 속에는 조급함과 함께 상대를 떠보려는 날카로운 시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황제가 피식 웃었다.
"두려운 것이냐? 막상 칼을 쥐여 주겠다 하니 과거 시험장의 호기가 꺾인 게로군."
"두려운 것이 아니라 계산을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계산?"
서문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 전 독을 토해 낸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명료했다.
"폐하께서 신에게 쥐여 주시려는 것은 무림을 벨 칼이 아니라 폐하를 대신해 화살을 맞을 방패막이입니다."
옆에 서 있던 내관 조필의 숨이 턱 막혔다. 황제의 면전에서 그 속내를 이토록 가차 없이 발가벗긴 신하는 일찍이 없었다.
그러나 서문진은 멈추지 않았다.
행정고시를 거쳐 재난대책본부에서 온갖 정치적 타협과 책임 떠넘기기를 목격했던 윤도현의 감각이 차갑게 작동하고 있었다.
"현재 금의위는 이름만 남은 폐허입니다. 유능한 무관들은 문파의 호위나 표국으로 흩어졌고 남아 있는 자들은 뇌물에 찌든 서리와 늙은 군졸뿐이지요. 이런 조직의 패를 장원 학사에게 던져 주신다는 것은 조정을 향해 미끼를 던진 것에 불과합니다."
황제의 눈빛이 굳어졌다.
"미끼라 하였느냐?"
"그렇습니다. 독살에서 살아남은 학사를 총사령관에 앉혀 권신들과 문파의 시선을 한곳으로 모으고 그들이 신을 물어뜯는 틈을 타 폐하께서는 숨을 고르시려는 계산이 아니십니까."
묵향당 안이 지독한 정적에 잠겼다.
촛불이 파르르 떨리며 벽면의 서책 위로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황제 이도겸은 서문진을 말없이 응시하더니 이내 가슴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실소를 터뜨렸다.
"하하…… 과인이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구나. 참으로 지독한 놈이다."
황제의 웃음소리가 잦아들자 서늘한 살기가 그 자리를 채웠다.
"네 말이 맞다. 금의위는 껍데기다. 조정의 대신들은 과인의 수족을 묶어 두었고 강호의 문파들은 성벽 밖에서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과인은 쓸 수 있는 말이 없다. 장원을 차지한 네놈의 목숨값이라도 걸지 않으면 판을 흔들 수가 없단 말이다."
황제는 서안 아래의 비밀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서 붉은 비단에 싸인 두루마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비단을 벗겨내자 선명한 주홍빛 어새가 찍힌 공문서가 나타났다.
황표(皇票).
금의위가 황명의 이름으로 어떤 세도가나 문파라도 강제로 수색하고 체포할 수 있는 초법적 영장이었다.
"이것이 네가 원하던 무기다. 하지만 조정의 반발을 억누르며 과인이 허락할 수 있는 기한은 길지 않다."
황제가 서문진을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사흘이다."
"사흘……."
"사흘 안에 저들이 반박하지 못할 증거를 잡아 오너라. 문파와 결탁한 자들의 숨통을 쥐든 도성을 좀먹는 밀수망을 터뜨리든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 한다. 만약 사흘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다면 과인은 이 황표를 회수할 것이며 너는 관직을 사칭해 소요를 일으킨 대역죄인으로 저잣거리에 효수될 것이다."
벼랑 끝으로 떠미는 명령이었다.
죽음의 함정이나 다름없는 조건이었으나 서문진의 눈빛은 오히려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위기관리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모호한 기한과 책임 소재다. 기한이 명확하다면 전략을 세울 수 있었다.
"받겠습니다."
서문진의 망설임 없는 답변에 황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두렵지 않다는 말이냐?"
"조건이 있습니다."
서문진이 고개를 들었다.
"신이 사흘의 목숨값을 거는 대가로 폐하께 두 가지를 청합니다. 첫째 수사의 대상에 어떠한 성역도 두지 마십시오. 상대가 황실의 종친이든 조정의 일품 대신이든 단서가 나온다면 황표의 집행을 막지 않으셔야 합니다."
"좋다. 둘째는 무엇이냐?"
"사흘 동안 금의위 내부의 인사와 처벌에 관한 전권을 신에게 일임해 주십시오. 썩은 환부를 먼저 도려내지 않고서는 칼자루조차 쥘 수 없습니다."
황제는 서문진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파리한 안색의 서생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백은 노련한 장수보다 더 무겁고 단단했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아는 자의 확신이었다.
황제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윤허한다. 가서 증명해 보여라."
서문진은 서안 앞으로 다가가 흑철패와 붉은 황표를 품에 갈무리했다.
차가운 쇠와 비단의 감촉이 가슴팍에 닿는 순간 새로운 관료로서의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실감했다.
"명을 받듭니다."
서문진이 깊이 읍하고 돌아서서 묵향당을 나섰다.
궁궐 밖으로 나오자 짙은 새벽안개가 옷자락을 적셨다.
내관 조필이 등불을 들고 마차 앞까지 서문진을 수행했다. 조필의 목소리에는 두려움과 함께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
"총사령관 나으리. 어찌 그 험악한 자리를 스스로 청하셨습니까. 금의위영은 지금 귀신이나 드나드는 흉가입니다. 역대 사령관들이 의문의 죽음을 맞거나 폐인이 되어 실려 나갔습니다."
서문진은 마차에 발을 올리며 담담히 답했다.
"귀신이 드나든다면 청소하여 사람이 살 수 있게 만들면 될 일입니다."
"예?"
"어둠을 피한다고 해서 어둠이 사라지지는 않소. 마차를 몰아 금의위영으로 가시오."
마차는 새벽의 적막을 가르며 천경 동남쪽 외곽을 향해 달렸다.
도성 중심부와 달리 낡은 창고와 거친 빈민가가 밀집한 지역이었다. 마차가 멈춰 선 곳은 거대한 석조 담벼락 앞이었다.
서문진은 마차에서 내려 청사를 올려다보았다.
한때 황실의 절대적인 위엄을 상징했던 금의위영.
하지만 지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참담했다.
외벽 곳곳은 허물어져 잡초가 무성했고 거대한 정문 위에는 붉은 칠이 벗겨진 현판이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삐걱거리는 쇳소리가 음산하게 울렸다.
정문 앞 초소에는 두 명의 위사가 기대어 서 있었다.
제식 무기인 당파창은 벽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고 바닥에는 깨진 술병 조각들이 뒹굴고 있었다. 위사들은 새로 부임한 총사령관이 도착했음에도 술 냄새를 풍기며 곯아떨어져 있었다.
'보초의 음주 근무와 탈영에 준하는 기강 해이로군.'
현대 공직 사회였다면 즉각적인 직무 정지와 감사 대상이었다. 서문진은 취객들을 깨우지 않고 묵묵히 정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섰다.
연무장은 더욱 황량했다.
바닥의 박석은 깨져 흙탕물이 고여 있었고 훈련용 목검과 방패는 썩어 문드러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
황제가 말한 '껍데기'라는 표현조차 과분했다. 군율은 무너졌고 남은 것은 나태와 부패의 찌꺼기뿐이었다.
서문진의 시선이 본청 중심에 우뚝 솟은 전각으로 향했다.
백호당(白虎堂).
역대 금의위 총사령관들이 천하의 감찰 보고를 받고 명령을 내리던 최고 집무실이었다.
서문진은 망설임 없이 백호당의 문을 밀었다.
끼이익.
오랫동안 기름칠을 하지 않은 문쩌귀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자욱한 먼지와 함께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호롱불 하나가 흔들리고 있었다.
백호당 안쪽 당직실에는 기름진 얼굴의 중년 사내가 흐트러진 관복 차림으로 서안에 다리를 올린 채 육포를 씹고 있었다.
당직 서리 주도선(朱道善).
사령관 자리가 비어 있는 틈을 타 금의위의 온갖 서류와 보급을 주무르며 사리사욕을 챙겨 온 자였다.
주도선은 문이 열리며 낯선 청년이 들어서자 귀찮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어떤 놈이 야심한 새벽에 남의 단잠을 깨우는가? 길을 잃은 서생 놈이면 날 밝을 때까지 마구간에 처박혀 있거라."
서문진은 대꾸하지 않고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차분하고 서늘한 발걸음에 주도선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는지 서안에서 슬그머니 다리를 내렸다.
"네놈은 누구냐? 관복도 입지 않은 자가 감히 백호당에 함부로……."
탁.
서문진이 품에서 꺼낸 흑철패를 서안 위에 내려놓았다.
묵직한 쇠소리가 당직실 안에 낮게 울렸다.
매의 형상과 붉은 인장이 촛불 아래에서 번뜩였다.
주도선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이 이건…… 총사령관패?!"
주도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당혹감도 잠시 그의 교활한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갔다. 장원 급제한 햇병아리 학사가 금의위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는 풍문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칼자루 한번 쥐어보지 못한 풋내기가 어찌 이곳으로 왔단 말인가?'
상대가 무공을 모르는 유학자라는 사실을 확인하자 주도선의 얼굴에 비열한 여유가 감돌았다. 그는 허리를 대충 숙이며 건성으로 포권을 취했다.
"아이고 새로 부임하신 서문 사령관 나으리셨습니까. 소인이 눈이 어두워 존귀하신 분을 몰라뵈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저희 금의위가 몇 해째 조정의 예산을 받지 못해 이 꼴입니다. 인력도 없고 물자도 부족하여 영내가 누추하니 혜량하여 주십시오."
공손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상대를 비웃는 태도였다.
서문진은 주도선의 연극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감사 현장에서 수없이 마주쳤던 비리 공직자들의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이런 자들에게는 호통이나 도덕적 훈계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오직 숫자가 적힌 장부로 숨통을 틀어막아야 했다.
서문진이 서늘하게 입을 열었다.
"당직 일지와 출납 장부를 가져오시오."
"예? 장부 말씀이십니까? 워낙 오래 방치되어 정리가……."
"지금 당장 가져오시오."
서문진의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없었으나 거역할 수 없는 위압감이 실려 있었다.
주도선은 혀를 차며 벽장 구석에서 먼지 쌓인 장부 세 권을 꺼내 서안 위에 툭 올려놓았다.
'서책이나 읽던 샌님이 군영 장부의 셈법을 알 리가 없지. 몇 줄 읽다가 골머리를 썩여 보아라.'
하지만 그의 비웃음은 불과 일각도 지나지 않아 산산조각이 났다.
서문진은 자리에 앉아 눈으로 장부를 빠르게 훑어 내렸다. 종이를 넘기는 손길은 망설임이 없었고 그의 시선은 허수(虛數)가 숨어 있는 급소만을 정확히 짚어냈다.
수천억의 재난 기금과 예산 결산서를 털어내던 현대 행정의 감사 기술이었다.
장부를 넘기던 서문진의 손이 멈췄다.
"주도선 서리."
"예 나으리."
"당직 일지에는 어젯밤 정문을 지킨 위사가 열두 명이라 기록되어 있소. 그런데 내가 들어올 때 문을 지키던 자는 술에 취해 뻗어 있던 둘뿐이었지. 나머지 열 명은 어디로 갔소?"
주도선의 안색이 굳었다.
"야간 순찰을 나간 것으로 압니다만……."
"순찰 대장에는 서명이 없소. 또한 지난 열흘간 수령한 군량미 삼십 석 중 대원들에게 지급된 것은 열 석에 불과하군. 나머지 스무 석은 창고 입고 대장에 공란으로 비어 있소."
서문진이 장부를 탕 소리 나게 덮었다.
그리고 주도선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하지만 가장 흥미로운 것은 이 장부요."
서문진이 손가락으로 짚은 곳은 무기고 출납 장부의 마지막 장이었다.
"어제 자정 흑철단검 스무 자루가 순찰 소모품 명목으로 반출되었소. 황실 제식 무기인 흑철단검이 어찌 하룻밤 사이에 반납 확인도 없이 사라졌단 말이오?"
주도선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흑철단검 스무 자루.
어젯밤 청룡문의 하수인에게 은자 백 냥을 받고 몰래 넘긴 황실 제식 무기였다. 장부가 엉망이라 새로 부임한 학사가 이런 구체적인 품목과 숫자를 단번에 찾아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것은…… 훈련 중에 파손되어 폐기 처분을……."
"군율에 따르면 황실 무기의 파손은 반드시 잔해를 제출하고 사령관의 직인을 받아야 하오. 잔해가 어디 있소?"
"나 나으리……!"
"황실의 무기를 빼돌려 저잣거리의 무림인들에게 팔아넘긴 죄는 군율에 따라 참형(斬刑)이오. 또한 그 대금을 착복한 자는 삼족을 멸해도 할 말이 없지."
서문진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주도선은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단순한 학사가 아니었다. 장부의 숫자 하나로 사람의 목을 죄어오는 지독한 악귀였다.
"살 살려주십시오! 나으리!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주도선이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울부짖었다.
서문진은 엎드려 떠는 주도선을 내려다보며 품속에서 또 다른 물건을 꺼냈다.
붉은 비단에 싸인 두루마리.
그것을 서안 위에 펼치자 선명한 황제의 붉은 옥새가 드러났다.
"이것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주도선이 떨리는 눈으로 황표를 올려다보았다. 황제의 직인이 찍힌 붉은 영장을 확인하는 순간 그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황…… 황표?!"
"폐하께서 내게 금의위 내부의 인사와 처벌에 관한 전권을 위임하셨다. 네 목을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베어 효수해도 조정의 어느 누구도 나를 탓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서문진이 일어서서 주도선의 턱밑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네 목숨을 사흘 유예해 주겠다."
"사흘이다. 오늘 해가 뜨는 즉시 금의위에 적을 둔 모든 대원을 연무장으로 소집해라. 병을 핑계 대거나 정오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자는 탈영으로 간주하여 황표의 권능으로 즉결 처형하겠다. 또한 네놈이 청룡문에 팔아넘긴 흑철단검의 행방과 은자를 건넨 자의 이름을 낱낱이 적어 정오까지 내 서안에 올려놓아라."
주도선은 덜덜 떨며 고개를 조아렸다.
"받 받들겠습니다! 시키시는 대로 모두 다 적겠습니다!"
"물러가라."
주도선이 비틀거리며 당직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소란스러웠던 집무실에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서문진은 책상 위에 펼쳐진 황표와 흑철패를 내려다보았다.
황제가 준 시간은 사흘.
부패의 고리를 끊어내고 흩어진 병력을 수습하며 도성을 장악한 문파의 목덜미를 낚아채야 하는 사투의 시간이었다.
그때였다.
스산한 새벽바람과 함께 백호당 지붕 위쪽에서 미세한 기와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극도로 절제된 경공의 기척이었다.
서문진의 등 뒤로 서늘한 살기 어린 시선이 꽂혔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
단순한 도둑의 기척이 아니었다.
금의위영 내부 깊숙한 곳에서 오랫동안 발톱을 숨겨 온 자의 날카로운 적의였다.
서문진은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창살 틈으로 비쳐 드는 희미한 여명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쥐새끼들이든 칼을 든 자들이든 상관없다. 썩은 환부부터 하나씩 도려낼 뿐이다."
동쪽 지평선 너머로 태양이 솟아오르며 천경 도성의 거대한 윤곽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황실의 법봉이 강호의 칼날들을 향해 첫 발걸음을 떼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