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 메뉴는 두 사람 몫

1화: 첫 배합
조하린은 시제품 컵에 번호를 붙였다. 7번은 볶은 현미와 우유, 8번은 볶은 현미와 염소유, 9번은 현미를 태우지 않고 저온에서 오래 우린 배합이었다. 세 컵의 색은 거의 같았지만 향은 달랐다. 연구실의 시계는 오전 9시 12분. 지역 여름축제 제안서를 제출하기까지 이틀 남았다.
개발팀장 홍민아가 파일을 덮었다.
“축제 쪽은 사진에 잘 나오는 메뉴를 원해. 한눈에 보이는 색, 짧은 이름, 들고 다니기 쉬운 컵.”
“맛이 먼저 아닌가요?”
“맛은 한입 먹으면 알지. 그런데 손님이 멈춰야 한입을 먹어.”
하린은 7번 컵을 들어 향을 맡았다. 너무 고소했다. 아이스크림이라기보다 식은 죽 같았다. 9번은 우유 향이 뒤늦게 올라왔고, 끝에 짠맛이 남았다.
“식품회사 직원이 아이스크림을 죽이라고 설명하면 안 되겠지?” 민아가 물었다.
“준서 씨 앞에선 그렇게 말하지 않을게요.”
“만나기도 전에?”
“가게 이름이 후보에 올라왔어요. 제가 자료를 읽었으니까요.”
하린은 평가표의 ‘가족 레시피 활용’ 칸을 접었다. 백준서의 가게는 오래된 동네 아이스크림 집으로 유명했다. 가족이 남긴 노트를 사용한다는 소개가 있었다. 회사 제안서는 이 가게의 레시피를 축제 메뉴로 재구성하고, 완성 제품의 권리를 회사가 독점하도록 되어 있었다.
“계약 초안은 표준형이야.” 민아가 말했다. “가게에서 동의하지 않으면 다른 업체를 찾으면 돼.”
“그럼 공동 개발이 아니라 납품이죠.”
“회사 입장에선 위험 관리야. 우리가 원료와 품질을 보증하니까.”
“레시피까지 소유할 필요는 없어요.”
민아는 대답을 미뤘다. 하린은 그 침묵이 승낙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가게는 시장 골목 끝에 있었다. 문을 열자 냉동기 돌아가는 낮은 소리가 들렸다. 카운터 뒤의 준서는 실험실에서 온 방문자를 보고 앞치마를 닦았다. 오른쪽 주머니에 얼룩이 남아 있었다.
“회사에서 오셨죠? 메뉴 테스트부터 하시게요?”
“먼저 계약 조건을 설명드리려고요.”
“먹어 보기도 전에 계약부터요?”
“먹어 보고 제안할 겁니다. 다만 레시피 사용 범위는 처음부터 정확히 말씀드려야 해서요.”
준서는 진열대 안에서 작은 컵을 꺼냈다. “그럼 이걸 먼저 드세요. 우리 집 맛이 회사 취향인지부터 봅시다.”
하린은 숟가락을 들었다. 첫 입은 볶은 보리처럼 고소했고, 두 번째 입에는 우유의 단맛이 늦게 왔다. 지나치게 달지 않았다. 녹는 속도가 빨랐지만, 입안에서 남는 맛이 깨끗했다.
“현미가 아니라 보리네요.”
“맛보고 알아챈 게 아니라, 메뉴판을 봤죠?”
하린은 메뉴판을 내려다봤다. ‘보리밭 오후’라고 적혀 있었다.
“조금 씁쓸한 맛이 있어요. 구운 보리 껍질 향이 남습니다.”
“그걸 없애려고 설탕을 더 넣으면 우리 맛이 아니에요.”
“없애자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축제 메뉴는 들고 다녀야 해서 녹는 속도를 봐야 해요.”
“우리 냉동고가 오래돼서 그런 건가요?”
준서는 진열대 안쪽의 온도계를 꺼냈다. 숫자가 영하 13도를 가리켰다. 표준 보관 온도보다 높았다.
“이 온도면 판매를 멈춰야 해요.” 하린이 말했다.
준서의 얼굴이 굳었다. “지금까지 문제 없었습니다.”
“판매 중인 제품을 검사한 게 아니니까 맛에 문제가 있는지 단정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이 온도는 기준에 맞지 않습니다.”
“수리 예약은 잡아 놨어요. 부품이 늦어져서요.”
“그동안 어떻게 보관하죠?”
“밤에 문을 열어 둬서 온도를 낮추고, 낮에는”—그는 말을 멈췄다. “제 방식이 있어요.”
“그 방식은 기록이 있어요?”
“여기선 내가 사장이에요. 내가 책임집니다.”
“그럼 축제 판매 계약은 어렵습니다.”
“우리 가게는 축제에 참여하려고 문 닫는 날도 줄였어요. 회사가 먼저 와서 맛을 물어놓고, 냉동고 하나 보고 돌아가겠다고요?”
“냉동고를 무시하고 계약할 순 없어요.”
“저도 회사 기준을 무시하자는 말은 안 했어요.”
둘 사이에 카운터 유리가 놓여 있었지만, 준서의 목소리는 곧바로 가까이 닿았다. 하린은 어깨를 내렸다. 그녀는 안전 기준을 들이밀고 가게를 비난하고 싶지 않았다.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건 온도 기록을 보고, 수리 전까지 판매를 안전하게 유지할 방법을 같이 찾는 거예요. 판매를 약속할 수는 없고요.”
“그걸 하려고 여기 온 겁니까?”
“네. 계약은 그 다음입니다.”
준서는 잠시 그녀를 쳐다보다가 냉동고의 온도 기록지를 꺼냈다. 종이에는 하루 세 번 온도가 적혀 있었다. 숫자는 날짜마다 들쭉날쭉했지만, 지난주부터 온도가 천천히 올라가는 추세였다.
“이건 적어 둔 겁니다. 기록은 있어요.”
“좋아요. 냉동고를 열고 닫은 시간과 수리 기사 점검표도 있으면 같이 봐요.”
“지금 당장요?”
“판매를 계속할지 판단해야 하니까요.”
준서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하린이 내민 장갑을 받지 않고, 자기 앞치마 주머니에서 새 장갑을 꺼냈다. 냉동고 뚜껑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바닥으로 흘렀다. 안쪽의 작은 온도계는 바깥 것과 다른 숫자를 표시했다. 영하 17도.
“센서가 틀렸네요.”
“그럴 수도 있어요. 측정 위치와 시간을 맞춰 보죠.”
그들은 기기를 각자 다른 높이에 두고 10분을 기다렸다. 준서는 장갑 낀 손으로 아이스크림 통을 하나씩 옮겼다. 하린은 냉동고 문을 닫아야 할 때마다 타이머를 눌렀다. 10분 뒤 안쪽 기기 수치는 영하 16도, 바깥은 영하 13도였다. 차이는 있었지만, 냉동고 전체가 기준을 안정적으로 유지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오늘 판매는 중단해야 합니다.” 하린이 말했다.
준서는 말없이 쇼케이스의 전원을 껐다. 손님이 문 앞에서 멈췄다가 안내문을 보고 돌아섰다. 아이를 데려온 엄마가 “오늘도 안 파나요?”라고 물었다.
“죄송합니다. 냉동고를 점검 중이라 오늘은 판매하지 않겠습니다.” 준서가 답했다.
엄마는 아이에게 다른 가게로 가자고 했다. 아이가 진열대의 보리 아이스크림을 한 번 더 돌아봤다. 준서는 문이 닫힌 뒤에도 한동안 그 자리를 보고 있었다.
하린은 계약 초안을 가방에 다시 넣었다.
“판매 중단이 축제 제안에 영향이 있을 거예요.”
“알아요.”
“오늘은 제품 사진도 찍지 않을게요.”
“고맙다는 말은 못 하겠네요. 손님은 돌아갔으니까.”
“그래도 촬영 동의는 별개예요.”
준서는 처음으로 그녀를 제대로 바라봤다. 차가운 표정이 조금 풀렸다.
“내일 아침 수리 기사 오기로 했어요. 같이 볼래요?”
“작업실 들어가는 건 허락이 필요합니다.”
“허락해요. 단, 레시피 노트는 안 보여 줄 겁니다.”
“괜찮아요.”
그녀는 문 밖에서 장갑을 벗었다. 가게 안쪽에서 타이머가 울렸다. 냉동고는 꺼져 있었고, 통들은 임시 냉장 상자에 옮겨졌다. 준서는 남은 아이스크림을 버려야 할지 고민했다. 하린은 확정할 수 없다고 했다. 검사 없이 먹어도 된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폐기 여부 역시 준서가 기준에 따라 결정해야 했다.
그날 밤, 하린은 회사에 판매 보류를 보고했다. 민아는 전화로 왜 계약도 하기 전에 가게를 멈추게 했느냐고 물었다.
“제가 멈춘 건 계약이 아니라 판매예요. 안전이 확인될 때까지요.”
“그럼 축제 메뉴는 다른 업체에 맡겨야 할 수 있어.”
“그 결정도 이해합니다.”
“하린 씨 프로젝트 평가에는 안 좋을 거야.”
하린은 노트북 화면의 배합표를 닫았다.
“그건 제가 감수할게요.”
준서는 판매를 중단한 뒤 카운터 아래에서 오래된 장부를 꺼냈다. 몇 년 치 재료 구입과 폐기 수량이 날짜별로 적혀 있었다. 아버지가 남긴 글씨는 굵었고, 준서의 글씨는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하린은 장부를 보려 하지 않았다.
“수리비 계산에 필요한 부분만 보여 드릴게요.” 준서가 말했다.
그는 지난달의 우유와 보리 구매량만 종이에 옮겼다. 폐기된 통의 수량은 적지 않았다.
“판매량과 폐기량이 맞지 않아요.” 하린이 말했다.
“손님에게 맛을 바꿔 주느라 일부를 나눠 준 것도 있고, 직원들이 테스트한 것도 있어요.”
“그럼 그 양도 기록해요. 버린 것과 나눠 준 건 다르니까.”
준서는 펜을 들고 빈 칸을 만들었다. “당신은 맛도 숫자로 다루네요.”
“숫자만 보면 놓치는 게 있어서 물어보는 거예요.”
“그럼 이건 숫자로 설명할 수 없어요.” 그는 냉동고 손잡이에 묻은 얼룩을 천으로 닦았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만든 맛을 저는 못 먹었어요. 병원에 있었거든요. 그래서 장부에 있는 배합을 계속 바꾸고 있어요. 기억이 맞는지 확인하려고.”
하린은 바로 위로하지 않았다. “기억을 맞춰야만 하는 건 아니에요.”
“가족 가게잖아요.”
“그게 꼭 같은 맛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니까요.”
준서는 그 말을 오래 생각했다. 그가 보여 준 건 레시피가 아니라 빈칸이었다. 하린은 그 칸에 답을 써 주지 않았다. 대신 장부를 덮어 주고, 새 기록지 한 장을 옆에 놓았다.
“이번 배치부터는 준서 씨가 선택한 맛이라고 표시해요.”
“제 이름을 붙이면 손님이 싫어할 수 있어요.”
“그럼 테스트 전에 물어보면 되죠.”
그녀는 종이에 이름을 적지 않았다. 준서가 직접 썼다. ‘보리밭 오후, 백준서.’ 글씨가 아버지의 장부 글씨와 달랐다. 준서는 그 차이를 지우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가게 냉동고가 켜지지 않았다. 기사 도착은 세 시간 뒤였다. 준서는 문을 열고 플러그를 다시 꽂았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는 하린을 돌아봤다.
“이제 당신 회사가 메뉴를 다른 가게에 맡기겠네요.”
하린은 고장 난 기계를 살폈다. 전원 표시등이 한 번 깜빡였다가 꺼졌다.
“먼저 안에 든 제품을 어떻게 옮길지 정해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