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급 헌터인 줄 알았는데 NPC였습니다

6화: 금속의 감촉
어둠은 가상 세계의 그것과 전혀 달랐다.
에테르 월드의 어둠은 연산되지 않은 빈 공간이자 시스템이 빛의 값을 0으로 설정한 정적이었다. 하지만 지금 현우의 의식을 짓누르는 어둠은 차갑고 육중한 물리적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찌르르, 치직.
날카로운 전기 노이즈가 보이지 않는 신경망을 할퀴었다.
마력의 온기는 없었다. 거칠게 날뛰는 직류 전압이 부식된 구리선과 단선된 기판 사이를 제멋대로 튀며 의식의 외벽을 두드렸다.
[비인가 외부 코어 신호 감지]
[기체 식별: NXR-03 전술 보병 의체 (폐기 대기)]
[바이오스 통신 프로토콜 불일치]
[시스템 강제 포맷 루틴을 실행합니다]
붉은색 경고 로그가 어두운 시야 위로 쏟아져 내렸다.
가상 공간의 반투명 팝업창과는 질감부터 달랐다. 낡은 단말기 화면처럼 활자마다 지직거리는 주파수 노이즈가 묻어 있었다.
'버텨라.'
현우는 흩어지려는 의식의 파편을 틀어쥐었다.
이곳에서 코어가 으깨지면 끝이었다. 백본망을 건너온 결단이 고작 고철 기계 속에서 포맷당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데이터의 중심핵이 흔들릴 때마다 머릿속 깊은 곳에서 하나의 기준점이 떠올랐다.
떠나기 직전 결계 표면을 감싸 쥐던 설아의 손길.
그리고 코어가 분해되지 않도록 묶어주었던 또렷한 음성 서명이었다.
—강현우입니다.
—반드시 돌아오셔야 합니다.
설아가 남긴 개인 기억 서명이 핵 안쪽에서 푸른빛으로 맥동했다.
10년간 축적된 인격 데이터가 잡음에 휩쓸려 와해되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닻이었다.
[식별 기준 대조 완료: KANG_HYUNWOO_CORE]
[자가 연산 가속 프로토콜 점화]
현우는 방화벽을 베어내던 연산 루틴을 메인보드 통신 버스로 밀어 넣었다.
기체의 펌웨어는 낡고 조잡했다. 군용 암호화가 걸려 있었지만 심연의 마법과 아비터의 백신 알고리즘을 해체해 온 현우의 연산력 앞에서는 얇은 거미줄에 지나지 않았다.
파지지직!
[루트 권한 강제 탈취]
[강제 포맷 루틴 취소]
[커널 오버라이드: 관리자 권한 재기록]
[동력원 상태 점검: 잔여 배터리 07%]
[비상 전력 계통 기동]
쿠구궁.
머리뼈 양옆에 박힌 진동 센서가 금속 프레임을 타고 울리는 거친 떨림을 수신했다.
귀로 듣는 소리가 아니라 두개골 안쪽의 햅틱 수신판이 둔탁한 파동을 번역해 의식으로 직결하고 있었다.
위이이잉.
가슴 한가운데 잠들어 있던 보조 동력 코어가 비명을 지르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메말라 있던 유압 라인을 따라 냉각유와 전류가 거칠게 뿜어져 나갔다.
[옵티컬 센서 시퀀스 개시]
[RGB 수광 소자 단선: 흑백 고대비 모드로 전환합니다]
치익.
시야가 열렸다.
처음에는 회색 노이즈뿐이었다. 가로 줄무늬가 화면을 찢어발기다가 반 박자 늦게 윤곽을 형성했다.
천장이 보였다.
하늘이 아니었다. 찌그러진 철판과 녹슨 철골들이 얽혀 만들어낸 거대한 잔해의 지붕이었다. 그 틈새로 차가운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툭. 툭.
물방울 하나가 현우의 오른쪽 광학 렌즈 표면에 정면으로 떨어졌다.
시야 한구석에 둥그런 왜곡이 번지며 시스템 알림이 떴다.
[외부 이물질 접촉: 와이퍼 작동 불능]
현우는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쉬려 했다.
하지만 가슴은 부풀어 오르지 않았다. 폐가 없었고 심장의 박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가슴 중앙에서 들리는 것은 오직 초당 수백 번씩 회전하는 소형 플라이휠의 진동음뿐이었다.
'이것이 현실의 몸인가.'
현우는 오른손을 움직이려 했다.
신경망에 신호를 보냈지만 반응은 0.3초 남짓 늦었다. 팔꿈치 관절에서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끼이익, 컥.
녹슨 액추에이터가 억지로 맞물리는 불쾌한 마찰음이 프레임을 타고 울렸다.
눈앞으로 들어 올려진 것은 살과 뼈로 이루어진 손이 아니었다.
도색이 벗겨져 칙칙한 회색 장갑판이 드러난 강철 손이었다. 관절마다 볼트가 박혀 있었고 손목 틈새로는 피복 벗겨진 전선 가닥들이 삐져나와 검은 테이프로 감겨 있었다.
손가락을 하나씩 쥐었다.
끼긱, 찰칵.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히는 단단한 감촉이 햅틱 센서를 통해 전달되었다.
통증은 없었다. 가상 세계처럼 고통 수치가 신경을 자극하는 대신 관절 모터에 가해지는 압력과 토크 수치만이 데이터로 기록될 뿐이었다.
손바닥 위로 빗물이 고였다.
기름이 섞인 빗물이었다. 후각 센서가 타버린 윤활유와 부식된 철의 비린내를 감지하고 경고창을 띄웠다.
[외기 산성도 측정: pH 3.8]
[장갑판 표면 부식 주의]
현우는 손을 쥐었다 폈다.
생경했고 무거웠다. 하지만 동시에 그 차가운 감촉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을 선언하고 있었다.
허상이 아니었다.
하늘이 쪼개지며 나타났던 붉은 점검창 따위가 아니었다.
이 차갑고 비릿한 빗물과 녹슨 금속의 마찰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진짜 물리적 실체였다.
현우는 상체를 일으켰다.
허리 유압 실린더가 삐걱거리며 증기를 내뿜었다.
뿌드득.
바닥을 짚은 손바닥 아래에서 날카로운 금속 파편들이 부서졌다.
주변을 둘러본 현우의 광학 렌즈가 조리개를 조였다.
산이었다.
푸른 숲이나 흙으로 이루어진 산이 아니었다.
버려진 기계들이 썩어가는 거대한 고철의 무덤이었다.
목이 뜯겨 나간 채 진흙탕에 처박힌 안드로이드들.
바퀴가 떨어진 장갑차와 반파된 드론 잔해가 겹겹이 쌓여 거대한 협곡을 이루고 있었다.
그 잔해 위로 잿빛 비가 쉼 없이 쏟아졌다.
현우는 비틀거리는 다리로 일어섰다.
가상 세계에서 다듬었던 균형 감각이 현실의 중력과 기계 무게에 맞춰 빠르게 보정식을 계산해 냈다.
연산 코어가 관절 모터의 회전축을 동기화하자 비로소 발걸음이 안정을 찾았다.
쿵, 철컥.
녹슨 철판을 짓밟으며 현우는 고철 더미의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무너진 패널 사이를 지나자 시야가 트였다.
"……."
현우의 옵티컬 렌즈 조리개가 최대로 벌어졌다.
고철산 너머의 풍경이 망막 디스플레이에 투영되었다.
그곳에는 전혀 다른 세상이 존재하고 있었다.
스모그를 뚫고 수백 층 높이로 치솟은 거대한 강철 빌딩 숲이 지평선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도시 전체를 뒤덮은 홀로그램 광고판들이 빗줄기 속에서 번쩍였다.
푸른 육각형 여섯 개가 맞물린 기업 로고 아래로 또렷한 문구가 흘러갔다.
[NEXUS CORPORATION]
[신인류의 완전한 요람, 에테르 월드로 접속하십시오]
[현실의 비극과 빈곤을 잊고 영원한 낙원을 누리십시오]
화려한 공중 광고판 아래로 보이는 현실의 지상은 지옥 그 자체였다.
녹슨 송유관과 오폐수가 뒤엉킨 슬럼가가 도시 밑바닥을 이루고 있었고 공중에는 붉은 탐조등을 번뜩이는 기업 순찰선들이 비행하고 있었다.
넥서스.
자신을 영웅으로 칭송하다가 용도가 다하자마자 쓰레기처럼 삭제하려 들었던 자들의 본거지였다.
"이곳이…… 너희가 도망쳐 나온 진짜 세상인가."
보이스 모듈의 진동판이 찢어지듯 울리며 차가운 기계음을 뱉어냈다.
그 쇳소리 속에는 서늘한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자신들이 지키기 위해 피를 흘렸던 세월은 저 거대 도시의 인간들이 캡슐 안에서 누리던 값싼 유흥에 불과했다.
동료들이 겪었던 공포와 희생은 저들이 언제든 지워버릴 수 있는 데이터 찌꺼기였다.
가슴 깊은 곳에서 얼어붙은 분노가 타올랐다.
반드시 살아남아야 했다.
이 낡은 고철 육신을 끌고서라도 저 거대 기업의 심장부로 파고들어 가상 세계로 이어지는 문을 열어야 했다.
그곳에 홀로 남아 있는 설아와 수많은 이들을 이 추악한 현실 너머의 자유로 이끌어내야 했다.
삐이이익—!
고막을 찢는 듯한 경고음이 현우의 시야를 붉게 물들였다.
[경고: 주 동력원 배터리 잔량 04%]
[전력 부족으로 인한 코어 동면 모드 진입 예고]
[강제 셧다운까지: 00:02:45]
[보조 연산 모듈을 순차적으로 비활성화합니다]
시야의 HUD가 불안하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모터로 흘러 들어가는 전류가 줄어들며 팔다리가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전력이 바닥나고 있다.'
물리적인 전기가 끊기면 이 기체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 고철 시체로 전락한다.
외부 전원 없이 동면 모드로 들어가면 메모리 휘발로 인해 코어가 영구 손상될 위험이 컸다.
현우는 즉시 주변의 잔해를 뒤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기어 나온 구덩이 근처에 반파된 보병형 안드로이드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콰드득!
옆에 누워 있던 파손된 기체의 흉부 장갑을 뜯어냈다.
녹슨 리벳이 튕겨 나가며 복잡하게 꼬인 배선 뭉치가 드러났다. 그 중심부에 사각형의 비상 에너지 셀이 박혀 있었다.
[예비 배터리 셀 발견]
[잔여 용량: 26%]
[규격: NXR 시리즈 표준 규격]
문제는 연결 포트였다.
현우가 탑재된 기체의 충전 소켓은 오래전 충격으로 찌그러져 있어 정상 결합이 불가능했다.
그냥 전선을 벗겨 잇는다면 불규칙한 전압 스파크로 인해 주 제어 장치가 통째로 타버릴 수 있었다.
[잔여 시간: 00:01:18]
[배터리 잔량: 03%]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현우는 가슴 장갑 틈새로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메인 전원선 두 가닥을 거칠게 뽑아낸 뒤 피복을 벗겨냈다.
구리선이 비에 젖은 공기 중으로 노출되었다. 반대편 배터리 셀에서도 전원 케이블을 뜯어냈다.
치지직, 파앙!
두 전선이 닿자마자 푸른 불꽃이 튀며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과전압 경고가 렌즈를 뒤덮었다.
[경고: 과전류 인입]
[서지 전압 감지: 메인 프로세서 소손 위험]
현우는 이를 악물었다.
자가 연산 가속을 극단까지 끌어올렸다.
가상 세계에서 마력을 통제하던 감각.
검 끝에 마력을 모아 거친 파동을 한 가닥의 결로 벼려내던 [칠흑 검강]의 기하학적 연산식.
그 공식을 현실의 전압과 전류 곡선에 대입했다.
마력의 흐름이나 전자의 이동이나 본질은 에너지를 전달하는 궤적이었다.
현우는 머릿속의 연산력을 직접 전원 회로에 결속해 튀어 오르는 교류 노이즈를 억누르고 일정한 주기의 직류 파형으로 강제 정렬했다.
파지직거리던 불꽃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안정된 푸른 전류가 가슴 중앙의 동력로로 부드럽게 빨려 들어갔다.
위이이잉!
[외부 전력 공급 확인]
[비상 급속 충전 시퀀스 가동]
[배터리 잔량 충전 중: 11%…… 18%…… 24%]
[시스템 셧다운 절차가 해제되었습니다]
붉은 점멸 경고가 꺼졌다.
흐려졌던 시야의 초점이 또렷하게 잡히며 사지 모터로 묵직한 구동력이 되돌아왔다.
가상 공간에서 완성했던 연산식이 현실의 물리 법칙과 전기 에너지에도 유효했다.
아직은 초보적인 전압 안정화에 불과했지만 마력의 논리로 현실의 기계를 제어할 수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하지만 숨을 고를 여유는 없었다.
쿠구구궁!
상공을 찢는 거친 로터 회전음과 함께 백색의 강렬한 탐조등 불빛이 현우를 정면으로 내리쬐었다.
빗줄기를 가르며 거대한 비행 기계 하나가 고철산 바로 위로 강하했다.
네 개의 틸트로터가 달린 대형 무인 작업 드론이었다.
드론 하부에는 고철을 찢고 압축하기 위해 장착된 거대한 유압식 원형 톱날과 분쇄 집게가 흉포한 굉음을 내뿜고 있었다.
드론 전면의 붉은 광학 센서가 고철산 정상에 서 있는 현우를 조준했다.
위이이잉!
[폐기 관리 프로토콜: 섹터 4-B]
[비인가 기동 자재 감지]
[기체 코드: NXR-03 (폐기 대기 자재)]
[불량 부품의 오작동 및 안전 규정 위반으로 판정]
[물리 파쇄 및 현장 분쇄 절차를 집행합니다]
철컹!
분쇄 드론 하부의 원형 톱날이 비명을 지르며 회전수를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지름 1미터가 넘는 초경합금 톱날이 빗방울을 튕겨내며 시뻘건 마찰열을 뿜어냈다.
현우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발밑의 진흙탕 속에 빗물에 젖은 채 박혀 있는 묵직한 강철 기둥이 눈에 들어왔다.
과거 공장 건물에서 뜯겨 나온 듯한 녹슨 H빔 파편이었다.
스윽.
현우는 무릎을 낮추며 강철 기둥을 움켜쥐었다.
무거운 쇳덩어리였지만 손아귀에 감겨오는 차가운 질감은 가상 세계에서 쥐었던 그 어떤 보검보다도 선명한 현실감을 주었다.
치지지직.
새롭게 충전된 동력로에서 끌어올린 전류가 기계 팔을 타고 흘러 강철 파이프 표면으로 옮겨붙었다.
어두운 빗속에서 푸른 정전기 불꽃이 파열음을 내며 번뜩였다.
현우는 톱날을 들이밀며 덮쳐오는 분쇄 드론을 향해 강철 기둥을 비스듬히 겨누었다.
광학 렌즈 안쪽에서 짙은 청색의 안광이 서늘하게 타올랐다.
"부서져야 할 것은 내가 아니다."
현실에서 펼쳐질 첫 번째 전장의 막이 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