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최후의 헌터 쇼퍼: B급이 구매한 S급 보상

6화: 요리용 칼로 보스를 베다
폐정수장 게이트 출구 바리케이드 너머로 흙먼지가 가라앉았다.
유미란은 손에 쥔 관제 태블릿을 노려보며 숨을 헐떡였다. 화면에는 방금 종료된 던전 데이터가 붉은 경고등과 함께 깜빡이고 있었다.
[제3구역 폐정수장 게이트]
[공략 상태: 완전 토벌 및 마력 소멸]
[총 소요 시간: 13분 12초]
[수거된 마수 전리품: 0건]
상식을 아득히 벗어난 지표였다.
E급 헌터 네 명이 들어가도 마흔다섯 분은 족히 걸리는 험지였다. 발목까지 차오르는 강산성 오염수와 두꺼운 외골격을 두른 마수들이 득실거리는 곳이었다.
그런 지옥 같은 현장에 보급 검 한 자루 빌리지 않은 E급 헌터가 홀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십삼 분 만에 모든 생체 반응을 지우고 걸어 나왔다.
흙탕물 한 방울 튀지 않은 멀쩡한 차림새였다.
"산책이요?"
미란의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강현우 씨. 지금 협회 직원을 바보로 아십니까? 무기도 없이 맨몸으로 들어가 십삼 분 만에 보스까지 쓸어버린 게 산책이라고요?"
현우는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진짜라니까요. 안쪽에 들어가자마자 천장 배관이 무너져서 마수들끼리 진흙탕 속에서 물어뜯고 난리가 났습니다. 전 그냥 구석에 웅크리고 있다가 조용해진 뒤 걸어 나온 것뿐입니다."
"그딴 우연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미란이 참지 못하고 다가섰다.
"마수들이 자멸했다고 쳐요. 그럼 사체는요? 마나스톤은요? 천연 마나스톤은 아무리 무너져도 현장에 고스란히 남아 있어야 정상입니다. 마력 수치가 통째로 영이 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글쎄요. 산성수가 독해서 뼈까지 다 녹았나 보죠."
"장난치지 마세요!"
미란이 태블릿 모서리를 꽉 쥐었다.
"폐물류센터에서도 보스 사체가 감쪽같이 증발했어요. 어제 폐지하역장에서 나온 비늘등개 가죽은 레이저로 자른 것처럼 매끄러웠고요. 오늘 아침엔 협회 로비에서 D급 헌터의 진검 공격을 맨몸으로 튕겨 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십삼 분 단독 클리어라고요?"
미란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현우의 배낭을 훑었다.
"당신 대체 정체가 뭡니까? 등급을 속인 고위 각성자예요? 아니면 협회 미등록 불법 장비 밀수업자입니까?"
현우는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포인트를 벌 생각에 너무 서둘렀던 게 화근이었다. 당장 눈앞의 집요한 직원을 어떻게 떼어놓을지 고민하던 찰나였다.
위이이이잉-!
정수장 부지 뒤편 콘크리트 방벽 너머에서 찢어지는 사이렌이 터져 나왔다.
바리케이드 주변을 지키던 경비 요원들의 무전기에서 다급한 비명이 쏟아졌다.
치직! 긴급 상황! 제3구역 배수 암거 지하 통로에서 마력 폭주 감지!
단순 D급이 아닙니다! 침전조 심층부와 공명하면서 돌발 변이가 발생했습니다!
C급 변종 출현! 콰아앙! 방어선이 밀린다…… 꺄아악!
비명과 함께 무전이 끊겼다.
미란의 안색이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했다.
"C급 변종……? 배수 암거 게이트는 분명 D급 저위험군이었는데!"
게이트 공명 현상이었다.
인접한 던전의 마력이 간섭을 일으켜 내부에 갇혀 있던 마수가 돌연변이를 일으킨 채 지상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C급 변종이라면 일반적인 D급 헌터 서너 명으로는 뼈도 못 추릴 위협이었다.
"현장 요원 전원 전투 태세! 통제선 뒤로 물러나지 말고 일반 대피로부터 확보해요!"
미란은 현우를 추궁하던 것도 잊은 채 소리치며 달려 나갔다. 허리춤에서 권총형 마나건을 뽑아 드는 손길이 다급했다.
홀로 남겨진 현우는 통제선 그늘 아래에서 턱을 쓰다듬었다.
"C급 변종이라."
보통의 E급 헌터라면 당장 방공호로 튀어야 마땅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현우의 머릿속에서는 주판알이 바쁘게 튕겨 나갔다.
방금 잡은 폐정수장 E급 보스가 205 HP였다. 그렇다면 지상으로 기어 나온 C급 변종 보스는 과연 몇 포인트나 줄 것인가.
최소 400 HP 이상은 가뿐할 터였다. 잘만 하면 오늘 안에 골드 회원 승급 조건에 단숨에 닿을 수도 있었다.
문제는 장비였다.
현우는 가방 안쪽에 든 노란색 초진동 분자 커터칼을 만졌다.
절삭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날의 길이는 고작 손가락 한 마디 남짓이었다. 거대한 C급 변종을 상대하기에는 사거리가 너무 짧았다.
더 길고 묵직한 날붙이가 필요했다.
현우는 폐자재 창고와 컨테이너 사이 한적한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시선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허공을 향해 손끝을 튕겼다.
[셀레스티얼 헌터 복지몰]
[보유 포인트: 317 HP]
[회원 등급: 실버 (골드 회원 사전 심사 진행 중)]
현우는 사전 심사 대상자에게 열린 신규 카테고리를 터치했다.
[주방 설비 / 골드 사전 심사 전용]
[당신의 사냥을 조리할 준비가 되었습니까?]
창이 넘어가며 최상단에 붉은색 특가 딱지가 붙은 물품이 눈에 들어왔다.
[다차원 분자 분해 식도 (가정용 / 육류·조수류 손질용)]
카테고리: 주방 설비 / 조리 칼
정상가: 450 HP -> 골드 사전 심사 특가: 260 HP
설명: 외계 거대 가축 및 맹수의 두꺼운 가죽, 질긴 근막, 석회화된 척추골을 0.01밀리미터 오차 없이 깔끔하게 해체하기 위해 제작된 다목적 가정용 조리 도구.
칼날 표면의 분자 분해 진동막이 접촉 대상의 유기 결합을 순간적으로 이완시켜 힘을 들이지 않고도 정밀한 절삭이 가능합니다.
주의사항: 식자재가 아닌 생체에 직접 사용할 경우 절단면이 극도로 매끄러워 자연 지혈이 지연될 수 있습니다.
"가정용 조리 도구라더니 설명이 참 살벌하네."
가축과 맹수의 척추골을 오차 없이 분해하는 부엌칼.
외계 기준으로는 주방 서랍의 식도일지 몰라도 지구 기준으로는 신화 속 명검과 다를 바 없었다.
가격은 260 HP.
결제하고 나면 남는 포인트는 57 HP뿐이었다. 하지만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장비에 과감히 투자해야 더 큰 포인트를 안전하게 쓸어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배웠기 때문이다.
현우는 결제 버튼을 눌렀다.
[260 HP를 사용합니다.]
[결제가 정상적으로 완료되었습니다.]
[잔여 포인트: 57 HP]
[차원 퀵배송 프로토콜 가동. 머리 위 공간을 비워 주십시오.]
지직.
머리 위 허공이 일렁이더니 새끼손가락만 한 검은 균열이 열렸다.
툭.
손바닥 두 뼘 길이의 길쭉한 은색 상자가 현우의 양손 위로 떨어졌다.
상자를 열자 짙은 감청색 천 위에 단정하게 놓인 식도 한 자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길이는 손잡이를 포함해 약 30센티미터.
손잡이는 무광 블랙의 미끄럼 방지 소재였고 칼날은 거울처럼 매끈한 은빛 합금이었다. 겉보기에는 백화점 명품관의 최고급 주방 식도와 다를 바 없었다.
칼자루를 쥐자 손잡이에서 미세한 센서가 반응하며 은은한 푸른 선이 칼날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손목을 가볍게 털어 보았다. 칼끝에 실리는 묵직한 균형감이 소름 끼칠 만큼 정교했다.
"무게 중심 예술이네."
현우는 식도를 쥐고 컨테이너 모퉁이를 돌아 나왔다.
콰아아앙!
그 순간 정수장 외곽의 콘크리트 방벽이 박살 나며 자욱한 분진 속에서 거대한 괴물이 지상으로 솟구쳤다.
쿠에에에엑-!
[C급 변종: 철갑 맹독 지네]
길이만 15미터에 달하는 흉측한 괴물이었다.
수백 개의 날카로운 다리가 아스팔트를 파헤쳤고 온몸은 짙은 남색의 두꺼운 철갑 외골격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녀석의 거대한 주둥이에서는 쇠창살만 한 독니 두 개가 보라색 독액을 뿜어내고 있었다.
"사격해! 눈을 노려!"
경비 헌터가 두 손으로 내리찍은 강철 대검이 지네의 등껍데기에 닿는 순간 둔탁한 금속음과 함께 불꽃이 튀었다.
대검의 날이 처참하게 부러져 튕겨 나갔다.
"말도 안 돼! 껍질이 통째로 장갑판이야!"
슈우우욱!
지네의 거대한 꼬리가 채찍처럼 휘둘러졌다.
방패를 들고 버티려던 방어형 헌터가 방패째 찌그러지며 폐자재 더미로 처박혔다.
"대원님!"
유미란이 이를 악물고 마나건을 쐈다.
탕! 탕! 탕!
하지만 푸른 탄환은 외골격 표면에 닿자마자 힘없이 도탄되었다. 흠집 하나 내지 못한 공격이었다.
철갑 지네가 번뜩이는 붉은 눈을 돌려 유미란을 응시했다.
키샤아악!
녀석이 아가리를 벌리며 보라색 독액을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아스팔트 바닥이 치이익 소리를 내며 녹아내렸다. 자욱한 독무가 사방으로 번지며 유미란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아……."
유미란의 손에서 마나건이 힘없이 떨어졌다.
사방이 독가스로 가득 차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거대한 독니가 들이닥치는 광경을 보며 미란은 본능적으로 죽음을 직감했다.
다리는 바닥에 붙은 듯 굳어 버렸다.
그때였다.
타박.
짙은 독안개 속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울렸다.
"콜록거리지 말고 뒤로 물러나요. 옷 상합니다."
담담한 목소리.
유미란의 시야 사이로 검은 후드 재킷을 걸친 실루엣이 나타났다.
강현우였다.
독무가 휘몰아치고 있었지만 현우의 옷 틈새로 드러난 회색 에테르 내복이 은은한 빛을 내며 독기를 모조리 튕겨내고 있었다.
현우의 호흡은 평온했다.
"강현우 씨……? 피해요! 도망쳐야 해요!"
하지만 현우는 지네를 향해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의 오른손에는 장검도 도끼도 아닌 은빛으로 매끈하게 빛나는 주방 식도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철갑 지네가 먹잇감을 향해 쇄도했다. 집채만 한 턱이 현우의 상체를 씹어 으깨기 위해 내리꽂혔다.
쾅-!
현우는 물러서지 않았다.
주둥이가 코앞까지 들이닥친 순간 몸을 낮추며 오른쪽 사각지대로 파고들었다.
지네의 돌진이 옆구리를 스쳤지만 에테르 내복이 충격을 미끄러운 비단처럼 흘려보냈다.
현우의 시야 속에서 복지몰의 보조선이 지네의 목덜미에 붉은 절단 가이드를 띄웠다.
[생체 해체 가이드 활성화]
[권장 각도: 45도 하향 슬라이스]
"도마 위에 올라온 고기 치고는 좀 징그럽네."
현우는 식도를 가볍게 쥐고 가이드라인을 따라 손목을 비틀었다.
스각.
소리는 그것뿐이었다.
강철 대검을 부러뜨렸던 흉악한 철갑 외골격이 잘 익은 수박 껍질처럼 힘없이 벌어졌다.
칼날이 지나간 자리마다 두꺼운 근육과 뼈마디가 분자 단위로 미끄러지듯 갈라졌다.
키에에에엑-!
지네가 온몸을 뒤틀며 비명을 내질렀다.
현우는 멈추지 않았다. 커다란 생선의 대가리를 쳐내듯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반대 방향으로 칼날을 회전시켰다.
서걱.
두 번째 칼질이 지네의 척추 중추 신경을 완벽하게 관통했다.
쿠구구궁!
열다섯 미터에 달하던 거대한 마수가 비명을 끝맺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쿵-!
집채만 한 지네의 머리통이 바닥으로 육중하게 굴러떨어졌다.
목마디의 잘려 나간 단면은 면도날로 깎아낸 유리판처럼 반질반질했다. 피 한 방울 즉시 튀지 않을 만큼 완벽한 분자 분해였다.
사방이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주저앉아 있던 유미란도 찌그러진 방패를 안고 신음하던 경비 헌터들도 숨을 들이켜는 것조차 잊은 채 굳어 있었다.
침묵을 깨뜨린 것은 현우의 눈앞에만 떠오른 투명한 텍스트 창이었다.
[C급 변종 보스 '철갑 맹독 지네' 처치 완료]
[변종 마수의 마력 핵 및 체조직이 흡수됩니다.]
[+480 HP 적립]
[돌발 변종 저지 특별 적립: +40 HP]
[총 보유 포인트: 577 HP]
[골드 회원 사전 심사 요건 100% 달성!]
[골드 회원 승급 심사가 개방되었습니다.]
지네의 거대한 머리와 몸통이 푸른빛 입자로 부서져 내리며 현우의 품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거대 마수가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남은 것은 쪼개진 아스팔트와 현우의 주머니에 쌓인 577 HP의 포인트뿐이었다.
현우는 손에 든 식도를 들어 올렸다.
엄청난 괴수를 베어 넘겼음에도 칼날 표면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은빛 칼날은 방금 찬장에서 꺼낸 것처럼 새것 그대로였다.
"역시 칼은 잘 들고 봐야 해."
현우는 주머니에서 일회용 물티슈를 꺼내 칼날을 슥 닦았다.
그리고 식도를 배낭 바깥쪽 물병 꽂이에 툭 꽂아 넣었다.
뒤편에서 거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 저게……."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경비 헌터가 헛소리를 하듯 중얼거렸다.
"C급 변종을…… 부엌칼로…… 썰었다고……?"
유미란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채 멍하니 현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현우는 배낭을 고쳐 메고 뒤를 돌아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다들 안 다치셔서 다행이네요."
미란이 떨리는 손가락으로 현우의 배낭 옆에 꽂힌 은빛 식도를 가리켰다.
"강현우 씨…… 그…… 그 칼…… 대체 뭡니까? 어디서 난 물건이에요?"
현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태연한 어조로 대꾸했다.
"아, 이거요? 자취방 부엌에서 쓰던 식도인데 생각보다 손에 잘 맞네요."
그 무심한 대답에 유미란의 턱이 툭 하고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