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세가의 만년 하급 포졸

1화: 사당의 차가운 재
대연국 호서 변방의 작은 고을 운수현.
비가 막 그친 이른 새벽의 관아 마당에는 젖은 흙냄새와 풀잎 냄새가 짙게 깔려 있었다.
처마 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에 맞춰 마당 한구석에서 낡은 싸리빗자루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사각, 사각.
빗자루를 쥔 사내의 자세는 더없이 헐렁했다. 빛바랜 삼베 포졸복을 대충 걸치고 허리에는 가죽이 다 벗겨진 포승 한 줄을 매달아 놓았다. 볕에 검게 그을린 얼굴 위로 덥수룩한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눈매를 반쯤 가렸다.
운수현 관아 삼방의 만년 하급 포졸 진우였다.
"진 형님! 빗자루질을 그렇게 느릿느릿해서 언제 마당을 다 쓸랍니까?"
관아 내삼문 쪽에서 앳된 얼굴의 포졸 장칠이 뛰어오며 혀를 찼다.
진우는 빗자루를 바닥에 짚은 채 심드렁하게 하품을 늘어놓았다.
"장칠아. 한 달 쌀 두 말 받는 하급 포졸이 너무 부지런을 떨면 하늘이 노하신다. 마당 흙손실도 막아야 하고."
"말이나 못 하면! 그보다 지금 빗자루 쥐고 농담할 때가 아닙니다. 저기 윤 포두님이 불을 뿜으며 이쪽으로 오고 계십니다요."
장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관아 복도 저편에서 단정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절도 있고 거침없는 보폭.
허리춤에 검은 포승과 두꺼운 수첩을 단단히 묶은 여인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운수현 관아에 새로 부임한 신참 포두 윤하린이었다.
단정하게 묶어 올린 흑발 아래로 서릿발처럼 날카로운 눈매가 드러나 있었다.
"진우 포졸."
하린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예, 포두님. 마당에 떨어진 새벽 낙엽을 일일이 계수하며 환경을 정돈하던 중이었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마십시오. 즉시 장비 챙겨서 따라붙으세요. 망령골 고사당에서 변사체가 나왔습니다."
진우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들썩였다.
"망령골 사당이라면 1년 전에 관아에서 쇠사슬로 묶어 인봉까지 쳐 둔 폐사당 아닙니까? 거긴 귀신 나온다고 동네 백성들도 발을 끊은 곳인데요."
"약초를 캐러 가던 심마니가 담벼락 틈새로 피비린내를 맡고 달려왔습니다. 단순한 변사가 아닙니다."
하린이 목소리를 낮추며 주위를 훑었다.
"시신이 입고 있는 옷이…… 남궁세가의 정예 무복이랍니다."
순간 진우의 손가락이 빗자루 자루를 쥔 채 미세하게 굳었다.
왼쪽 갈비뼈 아래 깊게 박혔던 옛 검상이 묵직한 통증처럼 욱신거렸다. 하지만 겉으로는 눈살을 찌푸리며 투덜거리는 기색만 내보였다.
"남궁세가 무사라니요. 천하제일 검가라는 대세가의 무인이 어쩌다 이런 촌구석 폐사당까지 기어들어와 죽는단 말입니까. 거참, 이번 달 당직은 단단히 꼬였군요."
"사안이 중대합니다. 현령 나으리께서도 곧 나오실 겁니다. 서두르세요."
망령골은 운수현 읍내에서 북쪽으로 십 리 남짓 떨어진 험한 골짜기였다.
새벽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산길 끝자락에 퇴락한 기와를 얹은 사당이 음산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사당 정문 앞에는 굵은 쇠사슬이 칭칭 감겨 있었고 붉은 밀랍으로 찍어 누른 관아의 인봉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비바람에 조금 바래긴 했으나 뜯기거나 훼손된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포졸 서넛이 창백한 얼굴로 사당 주변을 둘러싸고 웅성거렸다.
"문이 바깥에서 이리 단단히 잠겨 있는데 사람이 어떻게 들어갔단 말인가?"
"창문도 전부 좁은 격자살창이라 고양이 한 마리 겨우 드나들 크기요.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하린이 다가가 쇠사슬과 밀랍 인봉을 꼼꼼히 살폈다.
"인봉에 균열이 없습니다. 열쇠 구멍에도 흙먼지가 그대로 쌓여 있어요. 최근에 자물쇠를 따고 열었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하린이 수첩을 꺼내 먹을 묻힌 붓으로 현장 상태를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
현령 서문태가 마른 기침을 뱉으며 걸어왔다. 피곤이 짙게 깔린 눈빛이었으나 눈매만은 날카로웠다.
"윤 포두. 세가에 이 소식이 들어가기 전에 먼저 현장을 확인해야 하네. 관할 다툼으로 번지면 시신 수습조차 우리 손으로 못 하게 될 수 있어."
"알겠습니다, 사또. 쇠사슬을 절단하겠습니다."
하린이 손짓하자 장칠과 다른 포졸이 쇠도끼와 정을 들고 나섰다.
쾅! 콰직!
둔탁한 쇠붙이 소리와 함께 굵은 사슬이 끊겨 나가고 굳게 닫혔던 육중한 목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어둡고 서늘한 사당 내부의 공기가 밀려 나오며 지독하게 역한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으악!"
포졸 하나가 헛구역질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사당 안채 한가운데에 한 사내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결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고개를 떨군 사내의 가슴팍, 심장 부근에는 주먹만 한 핏자국이 둥그렇게 번져 있었고 등 뒤로는 칼날이 관통하고 지나간 찢긴 자국이 선명했다.
사내가 입은 옷은 짙은 청람색 비단으로 수놓인 남궁세가의 정예 무복이었다.
"세상에…… 진짜 남궁가의 무사잖아?"
장칠이 질겁하며 중얼거렸다.
하린이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놓으며 사당 바닥을 살폈다.
"모두 함부로 들어오지 마세요. 발자국이 섞이면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린은 조심스럽게 시신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시신의 품 안에서는 은자 몇 닢과 신분을 증명하는 청동패가 나왔다.
"남궁세가 호위무사 배진구."
하린이 청동패를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진우는 사당 문지방 곁에 헐렁하게 기댄 채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시선은 하린이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친 사당의 구석구석을 샅샅이 훑고 있었다.
'문은 바깥에서 쇠사슬로 묶여 있었고 살창은 온전하다. 사람이 들어와 살인을 저지르고 나갈 틈은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완벽한 밀실 살인인가?
진우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비틀렸다. 세상에 완벽한 무공은 있어도 완벽한 밀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현장은 반드시 모순을 남기기 마련이었다.
진우는 허리에 찬 낡은 포승을 만지작거리며 천천히 사당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걸음걸이는 겉보기에 술 취한 사람처럼 흐느적거렸으나 실제로는 바닥의 먼지와 흔적을 조금도 흩뜨리지 않는 정교한 보법이었다.
'가슴의 상처.'
진우의 눈동자가 시신의 흉곽에 꽂혔다.
심장을 정면에서 일격에 꿰뚫은 검상. 남궁세가의 기본 검결인 창룡출해(蒼龍出海)의 직자결과 매우 흡사했다.
하지만 상처의 끝부분이 미세하게 우측으로 뒤틀려 있었다.
'남궁세가의 정통 검법은 찌를 때 손목을 안으로 감아쥐며 검기를 회전시킨다. 하지만 이 상처는 바깥쪽으로 꺾여 있어. 남궁의 검을 흉내 냈지만 근본은 다른 문파의 살수다.'
누군가가 일부러 남궁세가의 검법으로 살해당한 것처럼 꾸며 놓은 것이었다.
진우는 이어 시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창백하게 굳어 버린 오른손 손등. 검을 쥐는 검지 아래와 손등 피부 위로 기묘하게 붉은 잔 물집들이 다닥다닥 돋아나 있었다.
'검을 쥐다 생긴 굳은살이 아니다. 무언가 뜨거운 약물이나 특수한 증기에 노출되었을 때 생기는 흔적.'
진우의 시선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사당 바닥은 오래된 흙바닥과 박석이 섞여 있었는데 흙바닥 곳곳에 엷게 번진 물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어젯밤 축시(丑時)부터 인시(寅時) 사이에 내렸던 새벽비의 흔적이다. 사당 천장이 낡아 빗물이 몇 방울 샜던 게지.'
그리고 진우의 시선은 사당 정면의 낡은 목제 제단 위로 향했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제단 위에는 녹슨 청동 향로가 놓여 있었다. 1년 동안 봉인되어 방치된 사당이었으니 향로 안에는 굳어 버린 차가운 재만 남아 있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향로 가장자리에서 떨어져 나온 회색 향재 한 줄기가 바닥 박석 위에 흩뿌려져 있었다.
진우는 쪼그려 앉아 그 향재의 위치를 가만히 응시했다.
잿가루는 바닥에 떨어진 빗물 자국 '위'에 덮여 있었다.
'물이 먼저 떨어져 흙을 적셨고 그 젖은 자국 위에 마른 잿가루가 내려앉았다.'
진우의 가슴속에서 차가운 확신이 번뜩였다.
사당 문이 1년 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면 향로의 재는 비가 내리기 훨씬 전, 즉 1년 전부터 바닥에 떨어져 있었어야 했다.
만약 그랬다면 빗물은 잿가루 위에 떨어져 재를 질척하게 반죽해 놓았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비가 내려 바닥을 적신 뒤에 누군가가 향로를 건드렸거나 진동을 일으켜 잿가루를 떨어뜨린 것이다.
'어젯밤 비가 내린 이후에 누군가 이 안에 들어왔다. 아니면…….'
진우는 사당 문틀과 제단 뒤쪽의 좁은 틈새를 묵묵히 눈에 담았다.
"진우 포졸! 거기서 멍하니 뭐 하고 서 있습니까?"
하린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하린은 시신의 소지품 목록을 다 적었는지 붓을 거두며 포졸들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사또의 명이 떨어졌습니다. 세가에서 감찰무사가 도착해 억지를 부리기 전에 시신을 관아 형방으로 이송해야 합니다. 장칠이와 함께 시신을 들것에 얹으세요."
포졸들이 들것을 들고 다가오려 하자 진우가 헛기침을 하며 천천히 일어났다.
"저기, 포두님."
"또 뭡니까? 설마 무서워서 시체에 손도 못 대겠다는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요?"
하린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진우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제단 아래 바닥을 턱 끝으로 가리켰다.
"그게 아니고요. 저기 바닥에 떨어진 향로 재를 좀 보시지요."
"향로 재요? 1년 묵은 사당에 잿가루 떨어진 게 무슨 대수라고 그럽니까."
"대수가 아니긴 한데요. 어젯밤 새벽에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까? 천장에서 샌 빗물이 바닥을 적셔 놓았는데 말입니다."
진우가 덤덤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저 잿가루가 빗물 자국 위에 아주 얌전하게 얹혀 있더라고요."
하린의 미간이 순간 좁혀졌다.
"……뭐라고요?"
"물 위에 재가 앉았다는 건 비가 내린 뒤에 재가 떨어졌다는 뜻이지요. 1년 동안 봉인되어 아무도 안 들어온 사당에서 향로 재가 어젯밤 비 그친 뒤에 혼자 공중제비를 돌며 떨어졌을 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하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황급히 걸어와 진우가 가리킨 제단 아래 바닥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마른 흙바닥에 번진 둥근 물자국, 그리고 그 위에 얇고 선명하게 덮인 회백색 잿가루.
하린의 숨결이 턱 막혔다.
"이건……."
"그리고 저 무사 나으리의 손등도 좀 이상합니다."
진우가 무심하게 덧붙였다.
"칼싸움하다 베인 상처도 아닌데 손등에 물집이 잔뜩 잡혀 있어요. 벼락 맞은 것도 아닐 텐데 말입니다."
하린이 굳은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진우를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일하기 싫어 빈둥거리며 쌀 두 말 타령이나 하던 헐렁한 고참 포졸. 하지만 지금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는 얼핏 스치는 서늘하고 깊은 기운이 담겨 있었다.
"진우 포졸. 당신…… 그걸 어떻게 본 겁니까?"
하린이 입을 떼려는 찰나였다.
두구두구두구!
사당 바깥 골짜기 너머에서 거센 말발굽 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쇄도해 오는 수십 필의 군마. 그 선두에는 푸른 깃발에 은빛 용이 새겨진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창룡의 깃발. 남궁세가의 감찰 무배들이었다.
진우는 고개를 돌려 사당 문밖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거참, 불청객들이 생각보다 너무 일찍 들이닥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