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으로
약초꾼 객잔의 무림 상담소5화

약초꾼 객잔의 무림 상담소

약초꾼 객잔의 무림 상담소

AD
스폰서 광고

5화: 먹 향이 가리키는 곳

청운객잔의 다락은 언제나 마른 풀 냄새로 가득했다.

천장 서까래 사이로 비쳐 든 아침 햇살이 공중에 떠도는 먼지 알갱이들을 잘게 부수었다. 처마 밑에는 말린 쑥과 산박하, 당귀 다발이 짚끈에 꿰인 채 줄지어 매달려 있었다. 바람이 통할 때마다 서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쌉싸래한 약초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연우진은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딛고 다락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손에는 앞치마 안쪽에 갈무리해 두었던 빚문서 한 장과 객잔 앞 수레바퀴 자국에서 수습한 검은 실오라기가 들려 있었다.

다락 가장 깊숙한 구석에는 스승 구노인이 남기고 간 오동나무 궤가 놓여 있었다. 궤짝 뚜껑을 덮은 낡은 모포를 걷어내자 묵직한 좀약 냄새와 마른 한지의 향이 훅 끼쳐 왔다.

우진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궤짝을 열었다.

궤 안에는 스승이 생전에 산을 타며 기록했던 두툼한 약재 장부 몇 권과 약초 칼이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물푸레나무로 깎은 칼집 표면에는 세 갈래 잎과 휘어진 줄기가 새겨져 있었다.

진태수의 궤짝 속 문서 맨 아래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문양인 봉황초였다.

우진은 칼집을 들어 엄지손가락으로 무늬의 홈을 쓸어내렸다. 스승은 이 칼을 건네며 늘 같은 말을 하곤 했다.

'우진아, 풀을 베는 칼은 흙을 상하게 하지 말아야 하고 사람을 살피는 눈은 욕심에 눈이 멀지 않아야 한다. 산비탈의 약맥은 하늘이 골짜기에 맡긴 숨통이니 먹물 든 자들이 그것을 넘보거든 결코 칼을 먼저 뽑지 말고 그들이 남긴 흔적부터 읽어라.'

그때는 그저 약초꾼으로서의 도리를 일깨우는 잔소리인 줄 알았다. 하지만 스승의 말은 단순한 훈계가 아니었다. 언젠가 닥쳐올 위험을 미리 내다보고 남긴 경고였다.

우진은 칼을 내려놓고 작은 백자 종지를 꺼냈다. 화로에서 떠 온 미지근한 물에 소금 한 꼬집과 빻은 고삼 가루를 아주 옅게 풀었다.

그는 수레바퀴 옆에서 주워 온 검은 실을 종지 속 물에 담갔다.

소리조차 나지 않는 고요 속에서 실 끝에 묻어 있던 검은 응결물이 물속으로 서서히 풀려나왔다. 맑았던 물이 순식간에 잿빛으로 흐려졌다.

우진은 종지 위로 얼굴을 가져갔다. 손부채질을 조심스레 하며 피어오르는 미세한 냄새를 들이마셨다.

코를 찌르는 것은 솔잎 그을음 특유의 묵직한 탄내였다. 하지만 보통의 송연묵처럼 은은하고 맑은 향이 아니었다. 혀뿌리를 마비시킬 듯한 쓴맛과 코 안쪽 점막을 죄어오는 차가운 기운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

'흑송유.'

바위틈에서 자라 독성을 품은 검은 소나무의 기름. 거기에 독초를 쪄서 말릴 때 나오는 훈증 찌꺼기를 아교 대신 개어 넣은 먹이었다.

우진은 품에서 꺼낸 빚문서의 여백을 문질렀다. 종이 표면은 습기를 머금은 날씨 속에서도 눅눅해지지 않고 기름을 먹인 것처럼 빳빳했다.

사파의 무리들이 산간벽지에서 은밀한 계약을 맺거나 오랜 기간 보존해야 할 문서를 만들 때 쓰는 특수 먹이었다. 이 먹으로 글을 쓰면 산길의 비바람이나 동굴의 습기에도 글자가 번지지 않고 수십 년을 버텼다.

솔개골 안에는 이런 먹을 제조하는 공방도 흑송유를 다룰 줄 아는 장인도 없었다.

우진은 스승의 누런 장부를 펼쳤다. 장부의 마지막 장들은 뜯겨 나가 있었지만 앞선 기록들 사이사이에 스승이 흘려 쓴 먹글씨가 남아 있었다. 우진의 시선이 수년 전 날짜가 적힌 모서리 메모에서 멎었다.

‘물레재 너머 북서 관도 어귀, 갈림길 폐객관에 검은 연꽃 깃발을 단 수레들이 드나든다. 산골의 희귀 약재를 헐값에 거두고 가짜 문서를 유통하니 그 근본은 사파의 어두운 무리다.’

검은 연꽃.

조금 전 객잔 문앞에서 물러난 수레의 옆판에 그려져 있던 검은 꽃 문양이 스쳐 지나갔다.

적의 근거지는 솔개골 안이 아니었다. 솔개골로 들어오는 유일한 관도 길목인 물레재 너머의 깊은 협곡에 은밀한 둥지를 틀고 골짜기 전체를 집어삼킬 그물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우진은 실오라기를 마른 천에 정갈하게 쌌다. 장부와 칼집을 궤 안에 다시 넣은 뒤 뚜껑을 덮었다.

다락을 내려오는 우진의 발걸음은 소리 없이 무거웠다.


객잔 본채로 내려서자 화로의 은은한 불빛이 실내를 밝히고 있었다.

진태수는 평상 모서리에 걸터앉아 상처 입은 어깨를 조심스레 주무르고 있었다. 창가 쪽 탁자에는 백서린이 홀로 앉아 무명천으로 검날을 닦고 있었다.

우진이 내려오자 서린의 시선이 계단 쪽으로 향했다.

"다락에서 무엇을 찾았나."

서린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건조했다.

우진은 화로 위의 주전자를 들어 갓 우려낸 따뜻한 쑥차를 세 개의 잔에 나누어 따랐다.

"진 표사님, 차를 드시며 숨을 고르십시오. 한기가 들면 혈도가 다시 굳습니다."

진태수가 두 손으로 공손히 잔을 받았다.

우진은 품에서 마른 천에 싼 검은 실과 빚문서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수레바퀴 자국에 떨어졌던 실과 궤짝 속 문서의 글씨를 대조했습니다."

서린의 눈썹이 잘게 꿈틀했다.

"결과는."

"평범한 먹이 아닙니다. 바위틈에서 자란 흑송유에 독초의 훈증 찌꺼기를 섞어 반죽한 특수 먹입니다. 솔개골의 안개와 비바람에도 수십 년간 썩거나 번지지 않도록 만든 물건이지요."

우진의 설명에 진태수가 흠칫하며 몸을 떨었다.

"그렇다면 그 문서들은……."

"골짜기의 땅과 채취권을 합법의 탈을 쓰고 빼앗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된 위조 문서들입니다."

서린이 검을 탁자 위에 가볍게 얹었다.

"그 먹을 쓰는 자들의 이름을 알고 있나."

우진은 서린의 칠흑 같은 눈동자를 마주보았다.

"수레 옆판에 새겨져 있던 검은 꽃 문양을 보셨습니까."

서린의 입술이 차갑게 굳어졌다.

"검은 연꽃…… 흑련회(黑蓮會)."

서린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에 진태수가 숨을 들이켰다.

"흑련회라고 하셨소? 강호 북서부의 암흑가를 주름잡는다는 그 사파 상단 말이오?"

"단순한 상단이 아니다. 관아의 부패한 관리들과 결탁하고 군소 문파들을 빚과 독으로 옭아매어 하수인으로 부리는 자들이다. 겉으로는 거상 행세를 하지만 실상은 강호의 어둠을 먹고 자란 흡혈귀들이지."

서린은 품속의 편지 조각을 떠올리며 손끝을 굳혔다.

우진이 말을 이었다.

"그들의 거점이 솔개골 밖 물레재 너머의 길목에 있습니다."

진태수가 눈을 크게 떴다.

"물레재 너머라면 협곡 아래 버려진 옛 관도 창고를 말씀하시는 거요?"

"그곳을 아십니까?"

"알다마다요! 우리 표국 행렬이 물레재를 넘기 직전 그 폐창고 앞을 지났소. 그때 창고 마당에 검은 포장을 씌운 마차 대여섯 대가 서 있었소. 표두님이 그 광경을 보고 안색이 굳어지더니 말머리를 서두르셨지.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갯길에서 습격을 당한 것이오!"

진태수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물레재의 버려진 창고에 숨어 관도를 오가는 짐을 감시하고 우리를 덮친 자들이 바로 흑련회의 하수인들이었단 말이오."

퍼즐의 조각들이 하나로 맞물려 떨어졌다.

흑련회는 솔개골 외부의 요충지인 물레재 폐창고에 비밀 지부를 세워 두고 있었다. 그곳에서 위조 문서를 찍어내며 관도를 통제하고 마을의 약맥을 노려 압박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서린의 몸에서 서슬 퍼런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지부의 위치가 확실하다면 주저할 이유가 없다. 지금 물레재로 가 그 창고를 불사르고 하수인들의 목을 베면 된다."

서린이 검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멈추십시오."

우진이 잔잔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그녀를 제지했다.

"그들의 목을 벤다고 해서 종이 위에 적힌 마을 사람들의 이름이 지워지지는 않습니다. 명백한 물증도 없이 사파의 거점을 무력으로 습격하면 관청은 우리를 강도나 비적으로 규정할 것입니다. 피를 흘리는 순간 우리는 법과 명분 모두에서 쫓기는 처지가 됩니다."

"그렇다고 저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자는 건가?"

"기다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가 친 그물의 형태를 먼저 파악해야 찢을 자리도 찾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때 객잔 출입문이 거칠게 열리며 익숙한 발소리가 뛰어 들어왔다.


"주인장! 큰일 났네, 큰일 났어!"

장철이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헐레벌떡 문턱을 넘어섰다. 그의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삼베옷은 먼지투성이였다.

그의 바로 뒤를 이어 소매화가 숨을 헐떡이며 뛰어 들어왔다.

"장철 형님, 매화야. 숨부터 고르십시오."

우진이 얼른 다가가 장철의 팔을 부축하며 의자에 앉혔다.

장철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찻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관도 쪽 상황이 심상치 않아. 마을 어귀를 살펴보러 나갔더니 검은 수레 두 대가 물레재로 통하는 길목 한가운데를 가로막고 서 있더군. 삿갓을 눌러쓴 사내들이 길을 지나는 행상들의 짐보따리를 죄다 들춰보고 있어."

"관아의 포졸들은 없었습니까?"

"관군 초소는 텅 비어 있고 상단 놈들이 관도를 제집 안마당처럼 휘젓고 있단 말이네. 이대로 가다간 솔개골로 드나드는 길목이 모조리 막히게 생겼어."

매화가 품속에서 작게 접은 종이쪽지를 꺼내 놓았다.

"주인장, 시장 쪽도 큰일이에요."

"무슨 일이 있었느냐."

"시장의 쌀가게 서 서방님하고 옹기점 아저씨를 만났는데요. 며칠 전에 관도 도로 보수 공사에 목재랑 항아리를 대면 큰돈을 준다는 외지 상인의 말을 듣고 보증 문서에 도장을 찍어 줬대요. 그런데 방금 그 상인들이 찾아와서 공사가 취소되었으니 당장 위약금을 물어내라고 협박을 했다는 거예요!"

우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 보증 문서의 모양을 보았느냐?"

"네! 서 서방님이 보여주셨는데 우리 궤짝에 있던 종이랑 완전히 똑같았어요. 붉은 도장이 찍혀 있고 그 도장 테두리 바로 옆에 바늘구멍 같은 검은 점이 찍혀 있었어요!"

객잔 안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장철이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결국 온 마을 사람들에게 가짜 빚을 씌워 놓고는 갚지 못하면 집이랑 약초밭을 통째로 털어가겠다는 심보였구먼!"

진태수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나 때문에 마을로 이런 화근이 굴러들어온 것 같소."

"진 표사님의 탓이 아닙니다."

우진이 진태수의 어깨를 단단하게 짚었다.

"저들은 진 표사님이 오기 전부터 이미 그물을 치고 있었습니다. 표사님이 궤짝을 지켜내신 덕분에 우리는 저들의 간계가 완성되기 전에 실체를 알게 된 것입니다."

서린이 칼집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우진을 쳐다보았다.

"상대는 이미 마을 사람들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이제 어쩔 텐가."

우진이 탁자 중앙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의 차분한 눈빛이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은 물레재 너머에 비밀 지부를 두고 마을을 집어삼키려는 흑련회입니다. 저들의 무기는 칼이 아니라 거짓으로 꾸며낸 빚문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 허점부터 파고들어야 합니다."

우진이 단호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매화야, 너는 시장으로 돌아가 같은 문서를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하렴. 절대로 먼저 싸우려 들지 말고 어떤 조건으로 도장을 찍었는지만 조용히 들어주어야 한다."

"네, 주인장! 꼼꼼히 적어 올게요."

"장철 형님은 마을 어르신들을 은밀히 만나 주십시오. 외지 상인들이 빚을 갚으라며 땅문서를 요구하더라도 관아의 정식 판결이 있기 전에는 절대로 서명하거나 땅을 넘기지 말라고 당부해 주셔야 합니다."

"알겠네. 어르신들 단속은 단단히 해 두겠네."

우진의 시선이 진태수에게 닿았다.

"진 표사님은 이곳에서 상처를 치료하셔야 합니다. 흑련회의 습격과 위조 문서의 존재를 증언해 줄 수 있는 사람은 현재로서는 표사님 한 분뿐입니다. 표사님의 목숨이 곧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진태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 목숨이 다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진실을 밝히는 증인이 되겠소."

마지막으로 우진의 눈길이 백서린을 향했다.

"백 여협께는 가장 위험한 일을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객잔과 마을 뒤편 물레재로 이어지는 산길의 동태를 살펴 주십시오. 샛길을 통해 문서를 회수하려는 자들을 막아낼 수 있는 것은 여협의 검뿐입니다."

서린의 입꼬리가 아주 희미하게 올라갔다.

"손님의 편안한 쉼을 방해하는 자는 베어 넘긴다. 내 찻값은 충분히 하겠군."

모든 이들의 역할이 정해지자 객잔 내부를 짓누르던 불안이 잦아들고 단단한 결의가 그 자리를 채웠다.

우진은 조용히 객잔 문가로 걸어가 문짝을 활짝 열어젖혔다.

물레재 능선 너머로 검은 먹구름이 서서히 몰려오고 있었다. 바람에 실려 오는 공기 속에는 흑송유의 독한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흑련회의 거점은 확인되었다. 그들이 놓은 덫의 실체도 드러났다.

우진은 가슴속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스승이 물려준 지혜와 사람들이 건넨 믿음이 그의 마른 어깨를 단단하게 받쳐주고 있었다.

평온했던 약초꾼 객잔이 강호의 거대한 음모에 맞서 문을 활짝 열어젖힌 순간이었다.

AD
스폰서 광고
YOU MAY ALSO LIKE

이런 작품은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