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초꾼 객잔의 무림 상담소

4화: 종이 위의 빚
진태수의 손이 궤짝 덮개를 들어 올렸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젖은 나무 냄새가 객잔 안으로 퍼졌다. 위에는 황기와 천궁 꾸러미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하지만 약재의 뿌리는 지나치게 깨끗했고 포장끈에는 마차를 달린 흔적이 없었다.
우진은 손을 내밀어 진태수의 손목을 붙잡았다.
"잠시만요. 종이를 꺼내기 전에 손을 다시 씻으셔야 합니다."
"아직도 그 독이 남아 있소?"
"독인지 자극성 가루인지 확정할 수 없습니다. 손끝에 남은 가루가 종이에 묻으면 문서의 상태를 바꿀 수 있습니다."
진태수는 말없이 대야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매화가 따뜻한 물을 부었고 우진은 손가락 사이를 한 번씩 살폈다. 물 위에 붉은 실 같은 가루가 다시 풀려 나왔다.
서린은 궤짝 안쪽을 내려다보았다.
"저런 걸 묻힌 채로 문서를 만졌군. 누가 일부러 그랬을까."
"지금은 단정하지 않겠습니다. 문서부터 보지요."
우진은 약초 꾸러미를 하나씩 꺼내 깨끗한 천 위에 올렸다. 말린 황기의 단면에는 흙이 없었고 천궁의 매듭에는 새 붉은 실이 묶여 있었다. 약재는 물건의 얼굴을 꾸미는 덮개에 가까웠다.
그 아래에 기름 먹인 종이 뭉치가 놓여 있었다. 종이 가장자리마다 붉은 인장이 반쯤씩 찍혀 있었다.
진태수의 숨이 막혔다.
"저것이오. 표두님이 죽어도 빼앗기지 말라고 한 것."
"표두께서는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셨습니까?"
"모르셨을 거요. 다만 짐을 받은 뒤부터 계속 봉인을 확인하셨소. 누군가 마차를 세우면 약재가 아니라 종이를 먼저 살피셨지."
우진은 종이 뭉치의 끈을 끊지 않았다. 겉장을 받치고 있던 나무젓가락을 들어 매듭을 풀자 눅눅한 먹 냄새가 올라왔다.
평범한 장부의 먹보다 무거운 향이었다. 오래된 기름과 마른 약초를 섞어 만든 먹처럼 코 안쪽에 씁쓸한 막이 남았다.
첫 장에는 사람 이름이 있었다.
‘솔개골 남쪽 밭, 소만복.’
매화가 숨을 들이켰다.
"우리 아버지 이름이에요."
그녀가 종이에 손을 뻗자 우진이 손등으로 가볍게 막았다.
"눈으로만 보렴. 손끝에 기름이 묻으면 글자가 번질 수 있어."
매화는 손을 거두었지만 얼굴은 이미 하얗게 질려 있었다.
문서에는 곡식 세 섬을 빌렸다는 기록이 적혀 있었다. 갚는 날은 보름 뒤였다. 이자가 붙으면 남쪽 밭 한 자락을 넘긴다는 문장이 붉은 선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우리 집은 곡식을 빌린 적이 없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빚이 없다고 들었는데……."
우진은 종이의 접힌 자리를 살폈다.
"원본처럼 보이게 만든 사본일 가능성이 큽니다. 종이 섬유가 같은 방향으로 눌려 있어요. 여러 장을 겹쳐 베낀 흔적입니다. 인장도 한 번에 찍은 것이 아니라 마른 뒤 다시 눌렀습니다. 원본과 대조하기 전에는 확정할 수 없지만 누군가 목록을 만들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서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사본인데 왜 사람 이름과 밭 위치까지 적었지?"
"돈을 받으려는 장부가 아니라 권리를 빼앗을 때 쓸 목록일 겁니다. 원본을 가진 자가 사라져도 사본만 있으면 빚이 있었다고 주장할 수 있으니까요."
우진은 다음 장을 넘겼다. 솔개골 북쪽 우물가의 집과 물레재 아래 숯굽는 집이 이어졌다. 돌개울 옆 약초밭의 이름도 있었다. 액수는 달랐지만 문장 끝은 한결같았다.
‘기한 내 상환하지 못할 경우 토지와 채취권을 채권자에게 양도한다.’
우진의 눈이 ‘채취권’이라는 글자에서 멈췄다.
약초를 캐는 산비탈은 밭처럼 매매할 수 있는 땅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이 계절마다 나눠 쓰는 약초밭이었다. 그것을 빚문서에 끼워 넣었다는 건 돈만이 아니라 산의 권리까지 가져가겠다는 뜻이었다.
매화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시장에 있던 빚문서도 이런 모양이었어요. 붉은 인장이 조금 번져 있고 마지막 줄만 유난히 진했어요. 인장 옆에는 검은 점도 하나 있었고요."
우진은 문서 첫 장의 인장을 기울여 빛에 비추었다. 붉은 원 안쪽에 작은 검은 점이 있었다. 종이를 찍은 뒤 바늘 끝으로 눌러 만든 듯한 자국이었다.
"같은 표식인가."
서린이 검집 끝으로 인장을 가리켰다.
"같습니다. 다만 이 표식이 누구의 것인지는 아직 모릅니다."
그때 밖에서 발굽 소리가 들렸다.
매화가 창가로 달려갔다가 몸을 낮췄다. 안개가 걷힌 관도 끝에 검은 말 두 필이 서 있었다. 아침에 물러난 사내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뒤에는 낡은 수레 한 대가 있었고 수레 옆판에는 약초 상단의 문양처럼 보이는 검은 꽃이 그려져 있었다.
서린이 창문 쪽으로 움직였다.
"내가 나가서 길을 묻겠다."
"묻는 데 검은 필요 없습니다."
우진이 문서 뭉치를 덮었다.
"사람들이 오기 전까지는 이 종이의 주인이 우리라고 보이지 않게 해야 합니다."
"이미 저들은 이곳에 종이가 있다는 걸 안다."
"그래서 더더욱 문서를 들고 뛰어가면 안 됩니다. 쫓기는 쪽의 행동처럼 보일 테니까요."
서린은 잠시 우진을 바라보다가 검자루에서 손을 뗐다. 그 사이 객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청운객잔 주인장. 상단의 위탁물을 확인하러 왔다."
이번 목소리는 아침의 흉터 사내보다 낮았다. 말투에는 예의가 있었지만 문을 두드리는 간격은 명령처럼 일정했다.
진태수가 움찔했다.
"저들은 우리가 문서를 봤다는 걸 알았소."
"아직은 모릅니다."
우진은 문서를 두 묶음으로 나눴다. 한 묶음은 약재 자루 아래에 넣고 다른 한 묶음은 자신의 앞치마 안쪽에 감쌌다. 모든 문서를 숨기면 수색의 명분이 생겼다. 그대로 내놓을 수도 없었다.
우진은 문을 열지 않은 채 말했다.
"위탁물을 확인하려면 위탁표와 표국의 인장을 먼저 보여 주십시오."
"표국 사람의 짐을 표국에서 확인하겠다는데 무슨 절차가 더 필요한가."
"정원표국 삼조의 표두 한대석이 맡긴 짐입니다. 상단의 사람이 회수하려면 표국의 확인이 있어야 합니다."
문밖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서린이 낮게 말했다.
"잘 알고 있군."
"이름을 적은 표사 명단이 있습니다. 이름을 아는 것과 표국의 권한을 가진 것은 다릅니다."
우진의 말이 끝나자 문밖 사내가 웃었다.
"그 표사는 상단의 물건을 훔쳐 달아난 자다. 궤짝을 내놓으면 그 죄도 덮어 주겠다."
진태수가 입술을 깨물었다. 서린은 그를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진은 대답하기 전에 문서의 맨 아래를 살폈다. 마지막 장은 다른 종이보다 얇았다. 붉은 인장도 없었다. 대신 접힌 자국 안쪽에 작은 무늬가 눌려 있었다.
세 갈래 잎과 휘어진 줄기. 봉황초를 본뜬 무늬였다.
우진의 손끝이 굳었다. 스승의 약초 칼집에 새겨진 것과 같은 무늬였다.
"주인장!"
장철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렸다.
우진이 빗장을 풀자 장철이 절뚝이며 들어왔다. 그는 포목점 앞치마를 두른 채였다. 조금 전 외지 수레가 포목점 앞에서 멈춰 우물 깊이를 재는 것을 보고 뒤를 밟아 온 참이었다.
"마을 어귀에 수레가 서 있길래 뛰어왔네. 저놈들 어제도 우물가를 재고 다니던 외지 상단 사람들 아닌가."
문밖의 사내가 곧바로 끼어들었다.
"장철, 괜한 일에 끼어들지 마라. 우리는 빚을 받으러 왔을 뿐이다."
장철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빚을 받으러 왔다는 사람들이 왜 남의 우물 깊이를 재고 다녀?"
"상단의 물류를 위해 길을 살핀 것이다."
"그럼 물류 수레에 왜 빈 문서 자루가 여러 개 실려 있지?"
장철은 수레 옆판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검은 꽃 문양이 찍힌 자루 세 개. 안쪽에 종이가 잔뜩 들었더군. 내가 다가가니 덮어 버리더라."
문밖의 기척이 변했다. 말발굽이 돌을 긁었고 누군가 칼집을 여미는 소리가 났다.
서린이 문가에 섰다.
"다시 칼을 뽑으면 이번에는 관도까지 따라가겠습니다."
"여협께서는 상단의 사유 재산을 훔치는 일을 돕고 있소."
"사유 재산이면 인장과 위탁표를 보여라."
서린의 대답은 짧았다. 검날이 반쯤 드러난 순간 문밖의 목소리는 더 이어지지 못했다.
장철은 객잔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의 시선이 탁자 위에 펼쳐진 종이에 닿았다.
"이게 대체 뭐야?"
매화가 먼저 대답했다.
"우리 집 이름이 적힌 빚문서예요. 그런데 그런 빚을 진 적이 없어요."
장철은 문서를 읽으며 눈을 찌푸렸다. 우진이 밭과 집의 위치를 설명하자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건 우리 골짜기 사람들 이름이잖아. 우물가의 임 노인도 있고 돌개울 약초밭도 있어."
"외지 상단이 토지와 우물을 조사했다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설마 약초밭까지 빼앗으려는 건가."
"문서만으로는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상환기한과 인장이 같은 모양이라면 누군가 같은 양식으로 여러 사람을 묶고 있습니다."
진태수가 힘겹게 일어섰다.
"이것 때문에 표두님이 짐을 빼돌린 거요. 나는 그분이 단순히 상단과 다툰 줄 알았소. 그런데 동료들을 버리고 도망친 게 아니라……."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궤짝을 내려다보았다.
우진은 그의 어깨를 다시 눌러 앉혔다.
"지금 자책하면 상처만 벌어집니다."
"내가 살아남은 건 내가 먼저 도망쳤기 때문이오."
"살아남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문서를 증언하고 동료들의 행방을 찾는 일입니다."
진태수는 한참 동안 침묵했다. 바깥에서는 사내들이 낮은 목소리로 서로를 재촉하고 있었다.
우진은 문서 맨 아래의 얇은 장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봉황초 무늬 아래에는 글자가 거의 지워져 있었다. 남은 것은 세 글자뿐이었다.
‘솔개골 약맥.’
서린의 눈빛이 달라졌다.
"약맥을 알고 있었나."
"이 문서가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확인해야 합니다."
우진은 얇은 장을 접어 손바닥 아래 숨겼다. 약맥은 스승이 생전에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말라고 했던 이름이었다. 그런데 그 이름이 사람들의 빚과 같은 문서에 찍혀 있었다.
장철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해."
"증거를 들고 바로 뛰어가면 문서를 빼앗기거나 사람들을 겁먹게 할 수 있습니다. 우선 피해자들의 이름을 확인하고 문서가 사본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합니다."
서린이 우진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언제까지 확인만 할 건가."
"확인하지 않은 칼은 아무나 벱니다."
우진은 앞치마 안쪽의 문서 묶음을 단단히 눌렀다.
"하지만 이제 이 일을 객잔 안에만 묻어 둘 수도 없습니다. 오늘은 진 표사님의 동료와 문서에 적힌 사람들을 찾을 방법을 정하겠습니다."
진태수는 무릎 위에 올린 손을 천천히 폈다.
"나도 함께 가겠소. 물레재로 돌아가 동료들을 찾겠소. 상처가 낫지 않았다고 숨어 있으면 또 누군가 대신 피를 흘릴 테니."
"혼자서는 안 됩니다."
우진이 곧바로 말했다.
"상처가 벌어지면 이동할 수 없습니다. 장철 아저씨가 관도 쪽 소문을 알아보고 서린이 산길을 살펴 주시면 제가 문서의 먹과 인장을 확인하겠습니다."
서린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빚으로 치지 않겠다."
매화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저도 할 일이 있어요. 시장에서 같은 문서를 본 사람을 찾아볼게요. 대신 이번에는 혼자 가지 않을게요."
우진은 그녀에게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문서 이름을 적을 종이입니다.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나게 하려 하지 말고 말해 준 것만 적으렴."
매화는 봉투를 품에 넣었다.
밖에서 다시 문을 두드렸다. 이번에는 문짝이 흔들릴 만큼 강했다.
"마지막으로 말하겠다. 궤짝을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표사와 객잔 주인을 함께 상단에 넘기겠다."
우진은 문 앞으로 걸어갔다.
"정식 표국의 확인과 관도의 입회가 없으면 궤짝은 내놓지 않겠습니다. 지금부터 이 안의 문서는 객잔의 손님이 맡긴 증거입니다. 누구도 강제로 가져갈 수 없습니다."
"증거라고? 네가 그 문서를 훔쳤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관도 순찰대 앞에서 확인합시다. 문서를 만든 사람과 빚을 진 사람도 함께 부르면 더 좋겠지요."
장철이 피식 웃었다.
"말로는 참 질기구먼."
"객잔 주인은 원래 문을 오래 지켜야 합니다."
문밖에서 욕설이 터졌다. 그러나 칼이 문을 가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관도 쪽에서 수레 방울이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흑색 꽃 문양의 수레가 서서히 물러났다. 바퀴가 진흙을 깊게 파고 지나간 자국이 객잔 앞에 남았다.
우진은 그 자국 옆에 떨어진 검은 실 한 가닥을 집었다. 실에는 아주 희미한 약초 냄새가 배어 있었다. 쓴 향 아래로 낯익은 솔잎 먹 냄새가 섞여 있었다.
스승이 쓰던 장부의 냄새와 비슷했다.
우진은 실을 천에 싸서 약통 안에 넣었다. 아직 같은 먹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냄새만으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누군가 빚문서로 솔개골의 땅을 묶고 있었다. 그 문서의 아래에는 스승이 감추려 했던 약맥의 이름이 있었다.
우진은 다락으로 향하는 계단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아직 열지 않은 스승의 장부와 봉황초 무늬의 약초 칼집이 놓여 있었다.
이번에는 오래 미룰 수 없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