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화포 장인의 제국 정벌기

2화: 묵은 장부와 붉은 먹
새벽안개가 군기시 마당을 낮게 덮고 있었다.
흙비린내 섞인 찬 공기 속에서 장도윤은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검게 그을린 손톱 밑에 어제의 재가 박혀 있었다. 밤새 주조장 주변에 물통을 나르고 불씨 격리선을 친 탓에 온몸이 뻐근했다.
밸브가 터지던 국방과학연구소의 비상 사이렌과 무너진 흙벽 사이로 울리던 비명이 머릿속에서 엇갈렸다. 하지만 혼란에 잠겨 있을 여유는 없었다.
발소리가 안개를 가르고 다가왔다.
강연화였다. 낡은 무명 저고리 소매를 질끈 동여맨 그녀의 눈 밑에는 짙은 피로가 묻어 있었다.
"만수 형은 어찌 되었습니까?"
도윤이 먼저 물었다. 연화는 잠시 그를 응시하다가 나직하게 답했다.
"열은 내렸어. 하지만 왼팔 뼈에 금이 가서 당분간 쇠망치를 들지는 못해. 집에 딸린 입이 넷인데 품삯이 끊기면 굶어 죽을 판이지."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말끝이 가늘게 떨렸다. 현대의 연구소에서는 사고가 나면 규정에 따라 치료비가 나왔지만 이곳 조선에서 장인의 부상은 곧 굶주림이었다.
"치료비와 품삯은 해결해야 합니다."
"관청에서 다친 천민에게 쌀 한 톨 줄 것 같아? 사고를 낸 자에게 책임을 물어 쫓아내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연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쪽 창고 쪽에서 거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군기시 묘시 감사를 시작한다!"
횃불 대여섯 개가 안개 속에서 붉게 일렁였다. 잿빛 관복을 차려입은 서리 이문갑이 서기들과 몽둥이를 든 하인들을 대동하고 걸어왔다. 그의 품에는 누렇게 손때가 묻은 두꺼운 장부철이 안겨 있었다.
이문갑은 바닥에 그어진 흙선과 늘어선 물통들을 보며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밤새 쓸데없는 장난질을 쳐 놓았구나. 장도윤, 네가 어제 기록을 남기겠다고 큰소리를 쳤지? 그 오만한 혓바닥이 오늘 네 목을 옥죄는 밧줄이 될 것이다."
서기가 마당 한가운데 나무 탁자를 놓고 기름먹 장부를 펼쳤다. 붉은 관인이 찍힌 두꺼운 한지 위로 빼곡한 글씨들이 횃불 아래 드러났다.
"보름 전 칠월 이십일, 주조장에서 받아 간 물목 대장이다."
이문갑이 장부의 한 줄을 손톱으로 짓눌렀다.
"정선 초석 삼십 근. 그리고 수리용으로 불출된 승자총통 두 문. 여기 네놈의 이름 석 자와 수결이 또렷하게 박혀 있다."
도윤은 장부 위로 시선을 내렸다.
'장도윤(張道潤).'
그 이름 아래에 붓으로 그어 내린 독특한 형태의 수결이 있었다. 순간 도윤의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이 몸의 옛 기억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보름 전 그날 자신이 이 장부에 먹을 찍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기억의 공백이 칼날처럼 목덜미를 스쳤다.
이문갑이 몸을 기울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어제 폭발로 깨진 포신 외에, 보름 전에 가져간 승자총통 두 문과 초석 삼십 근이 창고 어디에도 없다. 네놈이 주조장에 감춰 두었거나 몰래 밖으로 빼돌린 것이 분명하다."
주변에 모여든 장인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군기시의 화약과 무기를 사사로이 유출한 죄는 곤장 몇 대로 끝나지 않는다. 참형이나 변방 유배였다.
"말이 없구나. 장부를 인정하는 것이냐?"
이문갑이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붓을 들어 붉은 먹을 찍으려 했다. 죄를 확정 짓는 붉은 선을 긋겠다는 뜻이었다.
도윤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현대에서 다루었던 시험 데이터와 조작된 보고서의 기억이 차갑게 깨어났다.
"잠깐 멈추십시오. 장부를 눈으로 확인하겠습니다."
도윤의 목소리가 단호했기에 붓을 쥐고 있던 서기가 흠칫하며 횃불을 내밀었다.
도윤은 한지의 결을 따라 글씨를 훑었다. 먹의 상태와 획의 농도를 살피는 그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가늘어졌다.
"이 장부는 위조되었습니다."
도윤의 입에서 차가운 말이 떨어졌다. 마당이 일순간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네놈이 감히 관아의 출납 장부를 위조라 모함하느냐!"
"글자를 보십시오."
도윤은 흔들림 없이 장부의 한 글자를 짚었다.
"초석 삼십 근이라 적힌 곳에서 '삼(三)' 자를 보십시오. 가장 위의 획은 종이에 스며들어 광택이 죽어 있습니다. 하지만 가운데 획과 아래 획은 먹의 윤기가 그대로 살아 있고 기름먹 번짐이 덜합니다. 원래 적혀 있던 글자는 '일(一)' 자였습니다."
서기가 당황하여 마른침을 삼켰다.
"보름 전에 쓰인 먹과 며칠 전에 덧칠된 먹은 마른 정도가 완전히 다릅니다. 게다가 '일십 근'이라 적혀 있던 자리에 '삼' 자를 억지로 끼워 넣다 보니 수결 머리 부분이 글자 끝에 부자연스럽게 닿아 있습니다."
이문갑의 눈가가 잘게 경련했다.
"억지다! 수결이 네놈 것인데 무슨 궤변을 늘어놓느냐!"
"수결이 맞다 해도 들어간 자재의 무게는 속일 수 없습니다."
뒤편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강연화였다. 그녀는 주조장 구덩이 옆에서 무거운 무쇠 저울과 나무 궤짝을 끌고 나왔다. 궤짝 안에는 어제 수습한 포신 파편과 바닥 찌꺼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쇠는 먹물처럼 붓으로 덧칠할 수 없습니다. 어제 깨진 포신 파편과 가마 바닥의 찌꺼기를 전부 모았습니다."
연화는 쇠붙이들을 저울에 올렸다. 저울대가 삐걱거리며 기우뚱 내려앉았다.
"총통 두 문과 어제 주조하려던 포신의 쇳물을 합치면 최소 백이십 근의 청동이 필요합니다. 가마 벽에 눌어붙은 광재와 거푸집 찌꺼기를 감안해도 최소 삼십 근은 나와야 정상이지요. 하지만 다 합쳐도 마흔두 근에 불과합니다. 애초에 이 가마에는 포신 두 문을 녹일 쇠가 들어온 적조차 없습니다."
도윤이 덧붙였다.
"쇳물이 허공으로 증발하지 않는 한 들어온 쇠는 한 문 분량도 되지 않았습니다. 들어오지도 않은 쇠를 우리가 어떻게 훔쳐낸단 말입니까?"
이문갑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장부를 조작할 수는 있어도 주조 구덩이에 남은 쇳물의 총량은 조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문갑은 물러서지 않고 표독스럽게 쏘아붙였다.
"쇠붙이는 그렇다 치자! 그렇다면 초석은 어디로 갔느냐? 초석은 불에 타면 재도 남지 않는다! 어젯밤 한강 마포나루로 왜관 상선의 돛이 내려갔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주조장 놈들이 왜놈들과 내통하여 화약 원료를 팔아넘긴 것이 틀림없다!"
'왜관'과 '밀무역'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마당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이놈들을 당장 오라로 묶어라!"
하인들이 몽둥이를 치켜들며 다가왔다. 장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그 순간 연화가 품속에서 누런 기름종이 전표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이 나리, 이걸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십니까?"
연화의 서늘한 음성이 마당을 갈랐다.
이문갑이 멈칫하며 종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동공이 일순간 찢어질 듯 커졌다.
연화는 종이를 완전히 펼치지 않고 상단의 날짜와 붉은 수결 부분만 이문갑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도윤의 시선에도 그 내용이 언뜻 들어왔다.
'칠월 십오일, 서고 비축 초석 이십 자루 습기 훼손 폐기 처리. 마포선창 인계.'
그리고 그 아래에는 이문갑의 인장뿐 아니라 군기시 판관의 관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서쪽 창고에서 썩어서 버렸다는 초석들이 어젯밤 마포나루에서 왜관 배에 실렸더군요. 주조장 흙바닥에 들어오지도 않은 초석을 찾으실 게 아니라, 판관 나리의 도장이 찍힌 이 인출 전표부터 형조에 올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문갑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다리가 풀린 듯 그가 휘청거리며 물러섰다.
군기시 고위 관료와 한강 선단, 왜관 밀무역상이 얽힌 거대한 부패의 사슬이었다. 만약 이 종이가 의금부나 포도청으로 넘어간다면 이문갑은 꼬리 자르기로 가장 먼저 목이 달아날 터였다.
연화의 눈빛에는 깊은 분노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도윤은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여기서 이문갑을 완전히 부러뜨리면 군기시 상부는 증거를 없애려 주조장 장인들을 몰살할 터였다. 전쟁까지 남은 시간은 8개월이었다. 관료들의 권력 다툼에 휘말려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었다.
도윤이 걸음을 옮겨 연화와 이문갑 사이에 섰다.
"이문갑 나리. 우리는 나리를 죽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살고자 할 뿐입니다."
"무슨 뜻이냐?"
"장부를 덮으십시오."
도윤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어제 주조장의 사고는 '포신 주조 시의 기포 결함과 장약 계량 오차로 인한 파열'로 공식 보고를 올리십시오. 어젯밤 제가 서명한 사고 기록 그대로 처리하시면 됩니다."
"그럼 비어 있는 초석과 총통은?"
"장부 기재 착오로 처리하십시오. 출납 대조 중 수량 오기로 확인되어 재검수 진행 중이라 적어 올리면 상부에서도 굳이 들추지 않을 것입니다."
이문갑의 숨통이 조금 트이는 듯했다. 하지만 도윤은 빈손으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대신 세 가지 조건을 들어주셔야겠습니다. 첫째, 어제 부상당한 박만수 형의 치료 약값과 넉 달 치 품삯을 군기시 관급 경비에서 오늘 정오까지 즉시 내어 주십시오."
이문갑이 입술을 깨물었다.
"둘째, 주조장 주변의 불씨 격리선과 물통 설치, 작업자 안전 절차를 공방의 정식 규정으로 인정하십시오."
"그것이야 어렵지 않다. 셋째는 무엇이냐?"
도윤의 시선이 이문갑의 떨리는 눈을 똑바로 꿰뚫었다.
"다음 주조에 쓰일 청동과 숯, 정제된 초석을 정량대로 공급하십시오. 모래 섞인 구리와 썩은 화약을 주조장에 들이는 순간, 연화 낭자의 품에 있는 종이가 어느 대감의 대청마루에 떨어질지 저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서늘한 경고였다. 이문갑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정오까지 박만수의 몫으로 은자 다섯 냥과 약재를 보내마. 물목도 내 손으로 직접 검수하겠다."
이문갑은 서기들을 거칠게 밀치며 장부철을 낚아챘다.
"철수한다! 돌아가자!"
관원들이 도망치듯 물러난 마당에서 장인들이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도윤아, 우리가 살았다."
도윤은 장인들의 어깨를 다독여 보낸 뒤 주조장 안으로 들어섰다.
연화가 뒤따라 들어왔다. 그녀는 품속으로 전표를 갈무리하며 도윤을 바라보았다.
"너는 장도윤이 아니야. 이전의 도윤이는 장부의 덧칠을 찾아내지도 못했고 관원의 목을 쥐고 흔들 배짱도 없었어. 만수 형의 약값을 뜯어내는 수완은 더더욱 없었지."
도윤은 깨진 포신의 파단면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내가 누구로 보입니까?"
"몰라.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졌어. 넌 우리를 팔아넘길 놈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기술로 사람을 살리려 한다는 것."
연화가 손을 내밀었다. 그을음이 묻은 거친 손바닥이었다.
"일단은 손을 잡지. 대신 내 등에 칼을 꽂지 않겠다고 약속해."
도윤은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단단한 온기가 전해졌다.
"등에 칼을 꽂는 일은 없습니다. 내 목표는 오직 하나뿐이니까요."
"그게 뭔데?"
"살아남는 겁니다. 우리 모두가."
동쪽 하늘에서 붉은 아침 해가 솟아올랐다. 햇살 아래 드러난 깨진 청동의 단면은 노랗고 붉은 빛이 얼룩덜룩하게 뒤섞여 있었다.
도윤은 쪼그려 앉아 파편의 단면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구리와 주석이 제대로 섞이지 않았습니다. 열이 고르지 못해 한쪽은 무르고 한쪽은 깨지기 쉬운 상태가 되었어요."
장부의 위기는 넘겼으나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썩은 자재와 엉터리 배합으로는 왜군을 막아낼 포를 만들 수 없다.
임진왜란까지 남은 시간은 8개월.
도윤은 바닥에 흩어진 숯 조각을 집어 들었다. 불이 꺼진 가마 벽 위로 새로운 합금의 비율과 불씨의 온도를 나타내는 수치들이 하나씩 새겨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