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화포 장인의 제국 정벌기

1화: 불이 꺼진 주조장
쇳소리보다 먼저 냄새가 올라왔다.
젖은 숯과 탄 기름 냄새였다. 그 아래에는 혀끝을 마르게 하는 유황 냄새가 깔려 있었다.
서도윤은 눈을 뜨지 못한 채 숨을 삼켰다. 가슴이 눌려 있었다. 콘크리트 바닥이 아니라 거칠고 차가운 흙바닥이었다.
“도윤아!”
여자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터졌다.
“불씨 남았어. 움직이지 마!”
기침 소리와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가 겹쳤다. 도윤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시야가 흔들렸다. 천장은 낮았고 검은 연기가 들보 사이에 엉겨 있었다. 두꺼운 삼베 옷이 어깨를 감쌌다.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박혀 있었고 오른손 검지에는 작은 화상 자국이 있었다.
압력 용기 시험장의 경고등이 떠올랐다. 계기판의 바늘이 허용선을 넘던 순간이었다. 누군가 차단 밸브를 외쳤고 금속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다음은 없었다.
“박만수부터 봐!”
도윤은 목소리가 가리킨 곳으로 기어갔다. 나무판 아래에서 사내의 다리가 삐져나와 있었다. 도윤은 판을 들려다 멈췄다. 무너진 거푸집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잘못 건드리면 남은 쇳물이 쏟아질 수 있었다.
“사람 둘만 붙으시오. 판을 들지 말고 먼저 받치세요.”
자기 입에서 나온 말이 낯설었다. 발음은 조선말이었지만 문장은 작업장에서 쓰던 안전 지시와 다르지 않았다.
여자가 그를 노려보았다. 그을음이 묻은 얼굴과 짧게 묶은 머리 사이로 작은 금속 귀걸이가 흔들렸다.
“네가 그런 말을 할 때는 꼭 일이 더 커지더라.”
“받칠 것부터.”
“명령하지 마. 네가 다친 사람을 옮길 힘이 남았는지부터 봐.”
말은 날카로웠지만 여자는 이미 작업자들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도윤은 판 아래로 팔을 뻗었다.
박만수의 맥은 뛰고 있었다. 왼쪽 팔은 피와 그을음으로 뒤덮였고 숨이 짧았다.
“만수 형은 살아 있어. 물은 조금만. 얼굴부터 가려요.”
“도윤아.”
여자가 낮게 불렀다.
“네가 오늘 아침부터 사람 이름을 잊은 것처럼 구는데도 만수 형 상태는 잘 보네.”
주변의 시선이 자신에게 몰렸다. 모두가 그를 장도윤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름을 듣는 순간 머리가 욱신거렸다. 뜨거운 쇳물을 식히는 물통과 새벽마다 굳은 목을 두드리던 손이 떠올랐다. 비 오는 날에는 화약 자루를 벽에서 떨어뜨려 놓으라는 늙은 장인의 목소리도 스쳤다. 기억은 얼굴이 되기 전에 끊겼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여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군기시 서쪽 주조장이지. 머리를 세게 부딪친 모양이네.”
“지금이 언제입니까?”
“사고가 난 뒤에 날짜를 묻는다고?”
“대답해 주시오.”
여자는 잠시 그를 살폈다.
“선조 이십사년 팔월 십구일이다. 네가 어제까지 세던 포신은 오늘 새벽에 너와 같이 깨졌고.”
선조 이십사년.
1591년.
도윤은 목 안쪽을 눌렀다. 역사책에서 보았던 전쟁이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었다. 임진왜란. 일본군의 상륙과 조총과 보급로.
그 사실을 여기 있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강연화야.”
여자가 말했다.
“네가 기억해야 할 이름이 더 있으면 나중에 물어. 지금은 불이 남았는지부터 봐.”
도윤은 연기 속을 둘러보았다. 깨진 포신 하나가 주조 구덩이 가장자리에 걸쳐 있었다. 두꺼운 청동이 세 갈래로 갈라졌고 안쪽에는 검은 그을음이 길게 뻗어 있었다. 화약 자루 하나는 넘어져 있었지만 입구가 젖어 있었다.
“모두 바깥으로 물러나시오. 화약 자루는 만지지 말고 물을 뿌리되 한꺼번에 붓지 마세요.”
“물에 닿으면 화약을 못 쓰게 돼.”
“지금 쓸 화약이 어디 있습니까?”
연화는 대꾸하지 않고 작업자들을 내보냈다.
도윤은 바닥을 살폈다. 붉은 불점 하나가 부서진 벽돌 틈에서 깜빡였다. 그는 손을 뻗지 않고 긴 쇠집게로 불점을 젖은 흙 위에 밀었다. 작은 불씨가 물통 가장자리까지 굴러가자 연화가 물을 부었다.
쉭.
주조장 안의 숨이 조금 풀렸다.
연화가 박만수의 팔을 천으로 감는 동안 도윤은 깨진 포신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건 치워야 해.”
“치우기 전에 표시해야 합니다.”
“파편이 남아 있으면 다음 주조에 쓸 청동이 줄어.”
“어디가 먼저 깨졌는지 알아야 합니다.”
“네가 포신을 살릴 수 있다는 뜻이야?”
“아니요. 왜 깨졌는지 아직 모릅니다.”
도윤은 포신 파편을 건드리지 않고 나무 막대와 끈으로 방향을 표시했다. 안쪽 벽에는 한쪽으로만 깊어진 검은 줄이 있었다. 깨진 면에는 작은 구멍이 무더기로 이어졌다.
현대의 시험실이라면 확대경과 장비부터 찾았을 것이다. 여기에는 눈과 손과 기록밖에 없었다.
“두께를 비교하겠습니다. 끈 좀 주시오.”
연화가 낡은 삼끈을 던졌다. 도윤은 안쪽과 바깥쪽을 번갈아 재고 매듭을 묶었다. 한쪽 벽이 반대편보다 눈에 띄게 얇았다.
“이 정도 차이면 장약을 줄여도 위험합니다.”
“장약은 정량대로 넣었다고 했어.”
“누가 확인했습니까?”
연화의 표정이 굳었다.
“네가 확인했지. 어제 네 손으로 자루를 달았어.”
흔들리는 저울과 금이 간 계량 바가지가 머릿속을 스쳤다. 누군가 뒤에서 재촉하는 목소리와 기름종이에 묻은 검은 손자국도 따라왔다. 하지만 장면은 거기서 멈췄다.
“계량 바가지를 가져와 주세요.”
“깨졌어.”
“깨진 것도 기록해야 합니다.”
연화가 그를 빤히 쳐다봤다.
“사고가 나면 네가 제일 먼저 숨겼잖아. 관원이 오기 전에 흔적을 치우자고.”
도윤은 대꾸하지 않았다. 이 몸의 과거를 모르는 것은 자신의 사정이지 연화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는 숯 조각으로 포신의 방향과 파편 위치를 바닥에 그렸다. 연화가 그 모습을 보다가 작업자에게 말했다.
“물통을 세 개 가져와. 불씨 격리선은 네가 그어.”
“누구 말대로요?”
“지금은 둘 다 말이 맞아.”
주조장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무슨 난리를 쳐 놓고 아직도 안 치웠느냐.”
회색 관복의 사내가 문턱을 넘었다. 허리에는 작은 장부 주머니가 달려 있었고 뒤에는 종이를 든 하인이 붙어 있었다.
“군기시 서리 이문갑 나리다.”
작업자들이 고개를 숙였다.
이문갑은 깨진 포신보다 젖은 화약 자루를 먼저 보았다. 이어 바닥의 선과 파편 표식으로 시선을 옮겼다.
“누가 저런 짓을 했지?”
“제가 했습니다.”
도윤이 일어섰다.
“장도윤. 네가 아직 서 있을 줄은 몰랐다. 이번에는 네 부주의가 아니라 만수의 손이 문제였다고 적을까 했는데.”
연화가 고개를 들었다.
“만수는 장약을 만지지 않았습니다. 거푸집 옆에서 받침대를 잡고 있었어요.”
“다친 자가 자기 책임을 부정할 정신이 있겠느냐.”
“그래서 기록이 필요합니다.”
도윤이 말했다.
이문갑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네가 기록을 하겠다고?”
“사고 시각과 작업자 위치부터 적겠습니다. 포신은 깨진 면을 확인하기 전까지 폐기하면 안 됩니다.”
“말을 어렵게 하는군.”
“필요한 말입니다.”
이문갑이 하인에게 손짓했다.
“전부 쓸어 담아. 포신은 녹이면 그만이다.”
“안 됩니다.”
도윤의 말이 먼저 나갔다.
이문갑은 걸음을 멈췄다.
“내일 묘시에 재고 감사가 있다. 그때 포신 두 문이 모자란 이유와 초석 세 자루가 빈 이유를 함께 설명해 보거라.”
연화의 손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도윤은 그 변화를 보았지만 묻지 않았다. 초석이 사라졌다면 포신 시험 기록과 연결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가진 것은 이문갑의 말뿐이었다. 증거 없는 의심은 작업장 전체를 태울 수 있다.
주조장 밖의 좁은 길에서 작업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젯밤 강 쪽으로 내려간 배 말인가?”
“왜관을 거친 배라던데. 돛은 일본식인데 선주는 이름을 대지 않았다고 하더군.”
“군기시 물자를 실었다는 말도 있던데.”
“쉿. 그런 말은 들은 적 없는 걸로 해.”
이문갑의 눈이 문밖으로 향했다. 연화는 말없이 깨진 파편을 발끝으로 가렸다.
“내일 감사 때까지 이곳의 물건은 하나도 움직이지 마라. 장부를 건드리면 사고보다 큰 죄가 된다.”
“사고 기록은 제가 작성하겠습니다.”
도윤은 흙바닥의 숯을 집었다.
“제 손으로 계량한 장약이 들어갔다고 하셨으니까요. 그 책임을 피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기록을 지우지도 않겠습니다.”
이문갑이 한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내일 네 이름이 가장 먼저 장부에 오를 거다.”
“알고 있습니다.”
이문갑은 하인을 데리고 문밖으로 나갔다.
발소리가 멀어지자 연화가 숨을 내쉬었다.
“너 지금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 군기시 사고는 기록을 남긴 사람이 책임을 진다.”
“아무것도 적지 않으면 책임이 사라집니까?”
연화의 눈빛이 흔들렸다.
“사라지는 건 사람뿐이지.”
해가 기울 무렵 박만수는 임시 치료소로 옮겨졌다. 작업자들은 연화의 지시에 따라 물통을 출입구와 주조 구덩이 사이에 놓았다. 젖은 화약 자루에는 덮개를 씌웠고 아무도 불씨 격리선을 넘지 않았다.
완벽한 절차는 아니었다. 그래도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도윤은 기록방의 낮은 탁자 앞에 앉았다. 붓이 낯설었다. 연화가 맞은편에 앉아 사고 시각과 작업자 위치를 불러 주었다.
“첫 쇳물이 구덩이에 들어간 건 인시 전. 폭음은 그 뒤 한 식경쯤. 만수는 받침대 옆, 덕수는 입구, 나는 북쪽 벽에 있었어. 너는 계량 바가지 앞.”
“그 뒤에 장약을 계량한 사람은요?”
“네가 돌아온 뒤에는 네가 했어.”
기록에 빈칸이 생겼다. 빈칸은 사고 원인만큼 무거웠다.
연화가 품 안에서 접힌 종이를 꺼내려다 손을 멈췄다. 종이는 다시 품으로 들어갔다.
도윤은 모른 척 붓을 움직였다.
“사고 원인은 단정하지 않겠습니다. 파단면과 계량 도구를 보존했다고 적겠습니다.”
그는 기록을 두 부로 나눴다. 한 부에는 사고 시각과 작업자 위치를 적었고 다른 부에는 파편 표식과 포신의 두께 차이를 그렸다. 새 화포의 설계도가 아니라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메모였다.
연화가 붓을 받아 들었다.
“이건 내가 보관할게. 네가 내일 끌려가면 이 종이도 같이 사라질 테니까.”
그녀는 기록 끝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강연화.
도윤은 그 이름 아래에 장도윤이라고 썼다. 손가락이 잠깐 멈췄지만 붓끝을 떼지 않았다.
밖에서 밤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배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해.”
연화가 낮게 말했다.
“소문은 증거가 아니니까. 하지만 내일 감사가 시작되면 초석 세 자루와 그 배가 같은 장부에 걸릴 수도 있어.”
“당신은 뭘 알고 있습니까?”
“아직은 네가 알아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나누는 중이야.”
연화는 기록방 문을 닫았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해. 내일 네가 살아남고 싶다면 포신보다 먼저 장부를 봐야 해.”
도윤은 어두운 주조장을 돌아보았다. 깨진 포신은 천으로 덮였고 물통의 표면에는 희미한 불빛이 흔들렸다.
현대에서 그는 시험이 끝난 뒤 보고서를 쓰는 사람이었다. 여기서는 보고서를 쓰는 순간부터 누군가의 목숨과 자신의 목이 함께 걸렸다.
도윤은 종이 위의 이름을 다시 확인했다.
서도윤이 아니라 장도윤.
아직 그 이름을 자기 것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내일 새벽까지 지켜야 할 것은 분명했다.
불이 꺼진 주조장과 기록 두 장.
그리고 사라진 초석 세 자루의 행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