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 맹주가 훈수를 너무 잘 둠

5화: 쓰레기가 달라졌다
화청문 후원 우물가의 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단우진은 두레박을 길어 올려 흙먼지로 뒤덮인 얼굴과 목덜미를 씻어냈다. 붉게 물든 땟물이 돌바닥 틈새로 흘러내렸다. 찢어진 소매 안쪽의 옆구리 상처는 여전히 욱신거렸지만 지혈초 덕에 더는 피가 터져 나오지 않았다.
통증이 치밀 때마다 그는 배 아래를 가볍게 조였다.
허리 뒤로 돌렸던 미약한 진기가 단전 바닥에 가라앉으며 날카로운 통증을 완만하게 덮어주었다. 불과 반나절 전만 해도 상상조차 못 하던 감각이었다.
〔몸 씻는 데 정신 팔지 마라. 호흡 놓치면 아랫배 진기가 또 흩어진다.〕
정운휘의 서늘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숨은 제대로 쉬고 있습니다. 꼴이 너무 거지 같아서 흙이나 좀 털어내는 중입니다."
〔행색이 중요한 게 아니다. 네 눈에 서린 기운이 문제지. 살기를 그렇게 대놓고 뿜고 다니면 삼류 놈들도 냄새를 맡는다. 눈꺼풀 힘 빼라.〕
우진은 피식 웃으며 젖은 옷자락을 털었다. 잔소리는 여전히 칼 같았지만 머릿속 스승의 지적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그는 정운휘의 말대로 눈매를 느슨하게 풀고 어깨의 힘을 뺐다.
그 순간 담장 너머 연무장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단순한 수련 소리가 아니었다. 수십 명의 제자들이 한곳에 모여 웅성거리는 기척이었다.
우진은 연무장 뒤편 회랑 기둥 그늘로 몸을 숨겼다.
넓은 흙마당 한가운데에 제자 스물 남짓이 둥글게 모여 서 있었다. 그 중심에 선 사내가 거들먹거리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조형기였다.
조형기는 비단 보자기 위에 작은 오동나무 상자를 올려놓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상자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청운절벽 바위틈에서 우진이 목숨을 걸고 캤던 청심초였다.
"모두 들었겠지만 참으로 비통한 일이다."
조형기가 눈가를 손등으로 훔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목소리에는 과장된 슬픔이 잔뜩 묻어 있었다.
"단우진 사제가 절벽 아래로 발을 헛디뎌 추락하고 말았다.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밧줄을 던졌지만 안타깝게도 손이 닿지 않았어. 물살이 워낙 거세어 시신조차 수습하기 어려웠다."
주변에 모인 하급 제자들이 저마다 혀를 차며 수군거렸다.
"단우진 그 녀석 결국 그렇게 됐군."
"평소에도 재능이 없어 허구한 날 잡역만 도맡더니 마지막까지 문파에 짐만 되었어."
"그래도 조 사형이 의리가 있으시네. 저런 둔재 녀석의 뒤까지 챙겨주려 하시고."
동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하나같이 차갑고 비정했다. 3년 동안 문파의 온갖 궂은일을 도맡았던 우진의 목숨값은 그들에게 흙먼지만도 못했다.
조형기는 제자들의 동정을 한 몸에 받으며 가슴을 활짝 폈다.
"하지만 비통함에만 잠겨 있을 수는 없다. 대제자 사형께서 내리신 중요한 임무가 아니더냐! 내가 단 사제의 몫까지 짊어지고 절벽을 기어내려가 마침내 이 백년 청심초를 온전히 수습해 왔다!"
조형기가 오동나무 상자를 높이 치켜들었다.
"이 공로는 오늘 저녁 대제자 사형께 정식으로 바칠 것이다. 단 사제의 넋도 하늘에서 문파의 번영을 보며 기뻐하겠지!"
제자들 사이에서 탄성과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역시 조 사형이십니다!"
"대제자 사형의 직계 제자로 들어가시는 건 이제 시간문제군요!"
조형기의 입꼬리가 귀밑까지 찢어졌다. 우진을 절벽에서 떨어뜨려 죽이고 그 시신을 밟고 올라서서 대제자의 날개 아래로 들어가겠다는 속셈이 완벽하게 들어맞았다고 믿는 얼굴이었다.
기둥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정운휘가 차갑게 혀를 찼다.
〔저놈 폐에 똥바람이 가득 찼구나. 숨소리가 허영으로 덜컥거려. 제 꾀에 취해 앞뒤도 분간 못 하는 놈이다. 저런 놈은 가장 높이 올라갔을 때 바닥으로 처박아야 제맛이지.〕
우진은 기둥에서 등을 뗐다.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어르신 말씀이 딱 맞습니다. 밥상은 제가 차렸는데 숟가락은 엉뚱한 놈이 들면 체하는 법이죠."
〔나가서 판을 엎어라. 뒤는 내가 봐줄 테니.〕
정운휘의 짧은 한마디가 가슴 밑바닥을 든든하게 채웠다.
우진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연무장 한복판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가며 손뼉을 짝 짝 짝 세 번 쳤다.
맑고 경쾌한 박수 소리가 환호성으로 가득 차 있던 연무장의 소음을 단숨에 갈랐다.
"이야 조 사형. 혼자서 절벽을 기어내려가셨다고요? 그 놀라운 재주로 왜 진작 곡예단에 들어가지 않으셨습니까?"
능청스럽고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흙마당에 울려 퍼졌다.
제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소리가 난 쪽으로 쏠렸다. 의기양양하게 상자를 치켜들고 있던 조형기의 시선도 굳은 채 돌아갔다.
그곳에는 잿빛 흙투성이가 된 옷을 걸치고 찢어진 소매 사이로 거친 붕대를 감은 단우진이 서 있었다. 비록 행색은 초라했으나 허리는 꼿꼿했고 두 눈은 한낮의 칼날처럼 형형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조형기의 눈동자가 사시나무 떨듯 흔들렸다. 손에 들고 있던 오동나무 상자가 덜컥거리며 떨어질 뻔했다.
"너…… 너 단우진?!"
조형기의 목구멍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주변 제자들도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경악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단우진? 살아 있었어?"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며! 어떻게 저놈이 멀쩡히 걸어 들어와?"
연무장이 순식간에 벌집을 쑤신 듯 뒤집혔다.
조형기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그의 시선이 다급하게 연무장 뒤편 숲길 쪽을 훑었다. 마삼과 배도형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자 놈의 턱 끝이 사시나무 떨듯 떨려왔다.
'어째서 살아 있는 거지? 마삼과 배도형 그 미련한 놈들은 뭘 하고 있는 거야!'
우진은 조형기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한 걸음씩 다가갔다.
"사형 왜 그렇게 넋이 나가셨습니까? 마치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 돌아와서 간담이 서늘해진 얼굴이시네요."
"네 네놈이 어떻게……!"
"제가 절벽에서 떨어질 때 말입니다."
우진이 목소리를 낮추며 주변 제자들에게 들리도록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이상하게도 밧줄 단면이 칼날로 곱게 잘려 있더군요. 낡아서 끊어진 게 아니라 누군가 위에서 잘라낸 것처럼 말입니다. 게다가 산길로 올라오는데 누군가 제 입을 틀어막으려고 흉기를 쥐고 기다리고 있지 뭡니까?"
연무장에 모인 제자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밧줄이 잘려 있었다고?"
"누가 매복을 해?"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번져나갔다. 제자들의 의심 어린 시선이 슬그머니 조형기에게로 쏠렸다.
조형기의 이마에 핏발이 섰다. 이대로 두면 우진의 추락을 사주하고 청심초를 가로채려 했다는 사실이 문파 전체에 탄로 날 판이었다.
그렇게 되면 대제자의 직계는커녕 문규에 의해 손목이 잘리고 문파에서 파문당할 위기였다.
궁지에 몰린 쥐새끼가 독을 품듯 조형기의 눈에 비열한 살기가 차올랐다.
"닥쳐라! 감히 어디서 해괴한 거짓말로 동문을 모함하느냐!"
조형기가 소리를 빽 지르며 오동나무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연무대 옆 거치대에 꽂혀 있던 묵직한 수련용 목검 한 자루를 낚아챘다.
"하급 제자 주제에 사형을 공개적으로 능멸하고 문파의 위계를 어지럽히다니! 내가 오늘 사형으로서 네놈의 썩은 버릇을 문규의 이름으로 뜯어고쳐 주마!"
조형기는 목검을 우진의 코앞에 겨누며 으르렁거렸다. 우진의 입을 물리적으로 찢어서라도 진실을 덮어버리겠다는 노골적인 살기였다.
주변 제자들이 질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조 사형이 진짜 화가 났어."
"단우진 저놈은 살아 돌아오자마자 매를 버는군. 조 사형의 검법은 하급 제자 중에 으뜸인데 저러다 뼈도 못 추리겠어."
아무도 우진의 편을 들지 않았다. 우진은 문파에서 공인된 재능 없는 삼류였고 조형기는 화청문의 정식 검법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강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진의 얼굴에는 두려움 따위는 먼지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우진은 연무장 바닥에 굴러다니던 낡은 목검 한 자루를 발끝으로 툭 차올려 가볍게 손에 쥐었다.
〔저놈이 쓸 초식은 화청검법의 삼초 청풍쇄도다.〕
정운휘의 담담한 훈수가 우진의 귓전에 꽂혔다.
〔바람처럼 빠르다고 자랑하는 초식이지만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서 검끝이 크게 떤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찌르기는 허장성세다. 세 번째에 가슴팍을 찌르려고 발을 뻗을 때 저놈 오른쪽 허리와 손목 안쪽이 통째로 빈다.〕
우진은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궤적을 눈앞의 현실에 겹쳐 보았다.
〔칼을 맞부딪치지 마라. 힘으로 막으면 네 옆구리가 터진다. 세 번째 찌르기가 들어오는 순간 왼쪽으로 반 걸음 비틀어 흘려라. 그러고는 목검 끝으로 손목 대릉혈을 털고 턱주가리를 꺾어버려라.〕
"알겠습니다 어르신."
우진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목검을 비스듬히 내렸다.
그 무방비하고 오만한 태도가 조형기의 남은 이성을 완전히 끊어버렸다.
"뒈져라, 쓰레기 같은 놈!"
조형기가 고함을 지르며 쇄도했다.
파아앗!
조형기의 목검이 바람을 가르며 매섭게 날아들었다. 과연 화청문의 정규 검법답게 검끝이 세 갈래로 갈라지며 우진의 상체를 어지럽게 찔러왔다.
첫 번째 검격이 허공을 찔렀다.
두 번째 검격이 빗겨나갔다.
그리고 세 번째 조형기가 승리를 확신하며 온 체중을 실어 우진의 명치를 향해 찌르기를 내리꽂았다.
바로 그 찰나였다.
우진의 뇌리에서 정운휘의 일갈이 터졌다.
〔지금이다! 반 걸음!〕
우진은 지체 없이 왼쪽 발목을 비틀며 몸의 중심을 반 걸음 바깥으로 비껴냈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우진의 귀밑머리를 흩날렸다. 조형기의 목검 끝이 허공을 깊숙이 찔러 들어가며 놈의 상체가 앞으로 쏠렸다. 맹주의 예고대로 조형기의 오른쪽 손목 안쪽과 턱이 텅 빈 채 허공에 드러났다.
우진은 단전에 갈무리해 둔 진기를 오른팔로 밀어 올렸다.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쥐고 있던 목검 끝으로 조형기의 오른쪽 손목 대릉혈을 번개처럼 내리쳤다.
딱-!
맑고 둔탁한 타격음이 울려 퍼졌다.
"끄악!"
비명과 함께 조형기의 손에서 목검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우진의 동작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어졌다. 허리를 튕기며 목검 손잡이의 둥근 끝으로 조형기의 턱 끝을 아래에서 위로 사납게 쳐올렸다.
퍽-!
뼈와 나무가 부딪치는 섬뜩한 파열음이 터졌다.
조형기의 고개가 뒤로 사납게 꺾였다. 두 눈이 허옇게 뒤집힌 조형기의 몸뚱이가 허공으로 반 자쯤 떠올랐다가 연무장 흙바닥으로 먼지를 풀썩 일으키며 처박혔다.
쿵!
정적.
연무장에 찬물을 끼얹은 듯 지독한 고요가 내려앉았다.
흙먼지가 가라앉는 가운데 조형기는 바닥에 엎어진 채 사지를 부들부들 떨며 피 섞인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단 1합. 검을 맞대지도 않고 스쳐 지나간 반 합 만에 벌어진 참극이었다.
지켜보던 수십 명의 제자들은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채 굳어버렸다.
"조, 조 사형이……?"
"한 방에? 저게 지금 무슨 일이야?"
"단우진 저놈이 언제 저런 무공을 배웠어? 검을 쥘 줄도 모르던 놈이 어떻게 화청검법을 한 수 만에 파쇄한 거지?"
경악과 공포가 뒤섞인 수군거림이 터져 나왔다. 제자들의 눈에 비친 우진은 더는 자신들이 조롱하고 발길질하던 둔재 쓰레기가 아니었다.
괴물.
마치 다른 영혼이라도 깃든 것 같은 서늘한 기도의 고수였다.
우진은 목검을 어깨에 툭 걸치며 바닥에 널브러진 조형기에게 다가갔다. 발끝으로 바닥에 떨어진 오동나무 상자를 툭 쳐올려 품에 안았다.
"내 피 묻혀 캔 약초는 내가 챙겨야지. 남의 공으로 알랑방귀 뀌려다 턱뼈 나가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조 사형."
조형기는 바닥을 긁으며 찢어지는 눈으로 우진을 올려다보았지만 턱이 부서져 웅얼거리는 신음밖에 내지 못했다.
"으 으으……!"
우진은 허리를 숙여 조형기의 귓가에 차갑게 속삭였다.
"마삼이랑 배도형은 뒷산 덤불에서 칡넝쿨에 꽁꽁 묶여 있으니 심심하면 가서 풀어주시든가요. 다음에는 밧줄을 좀 더 질긴 걸로 준비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조형기의 눈에 형언할 수 없는 공포가 들어찼다. 자신이 보낸 매복자들까지 전부 우진의 손에 박살 났음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때였다.
연무장 북쪽 누각 2층 난간에서 서늘한 시선 하나가 우진의 뒤통수를 꿰뚫듯 내리꽂혔다.
우진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누각 그늘 아래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훤칠한 체구의 청년이 보였다. 그의 도포 소매 끝에는 짙은 검은색 실로 정교한 삼각 무늬가 수놓아져 있었다.
절벽 아래에서 주웠던 천 조각과 마삼의 허리띠에 묶여 있던 은실 매듭의 주인과 닿아 있는 자였다.
대제자의 최측근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차가운 눈동자가 우진의 일거수일투족을 마치 위험한 맹수를 관찰하듯 뜯어보고 있었다.
우진은 피하지 않고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그 시선을 마주 받았다.
머릿속에서 정운휘가 껄껄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 속이 다 후련하구나! 꼴통 턱주가리를 날리는 폼이 아주 일품이었다!〕
"어르신 덕분이죠. 훈수가 아주 귀에 쏙쏙 박히더군요."
〔하지만 좋아할 틈은 없다. 저 누각 위의 놈 보이지? 오늘 해가 지기 전에 문파 꼭대기까지 네놈 소문이 쫙 퍼질 게다. 쓰레기가 귀신에 홀려 돌아왔다고 말이다.〕
우진은 품에 안은 청심초 상자를 가볍게 두드리며 뒤돌아섰다.
"소문이야 퍼지라고 내는 것 아닙니까? 얌전히 숨어 살 생각이었으면 살아서 돌아오지도 않았습니다."
〔패기는 마음에 드는구나. 내일이면 진짜 칼을 든 놈들이 널 찾아올 테니 오늘 밤 숨이나 제대로 더 뚫어 둬라.〕
우진은 흙먼지를 털어내며 당당한 걸음으로 제자 처소를 향해 걸어갔다.
수십 명의 제자들이 양옆으로 홍해처럼 갈라지며 길을 터주었다. 아무도 그 앞을 감히 가로막지 못했다.
화청문의 만년 쓰레기 단우진.
그가 살아 돌아온 날 문파의 공기가 완전히 뒤바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