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 맹주가 훈수를 너무 잘 둠

4화: 반 걸음의 격차
바람이 잣나무 가지를 흔들 때마다 축축한 솔잎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단우진은 연무장 뒤편 흙길 언덕배기에 몸을 바짝 엎드렸다. 진흙을 덧바른 탓에 겉옷은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가슴팍 아래로 짓눌린 젖은 풀잎이 차가운 물기를 뿜어냈다.
옆구리의 붕대는 지혈초 덕에 피가 배어 나오는 속도가 잦아들었지만 조금만 몸을 비틀어도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다친 왼쪽 발목은 여전히 체중을 온전히 싣기 버거웠다.
그런 몸 상태로 저 앞의 둘을 상대해야 했다.
스무 걸음 앞, 길목을 굽어보는 바위 틈새에 사람의 그림자가 웅크리고 있었다.
화청문 하급 제자복을 걸친 놈들이었다. 하나는 덩치가 곰처럼 우람한 배도형이었고 다른 하나는 쥐새끼처럼 눈을 굴리며 단도를 만지작거리는 마삼이었다. 둘 다 조형기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온갖 궂은 심부름을 도맡던 놈들이었다.
"형기 형님이 너무 과민한 거 아닙니까? 절벽에서 떨어졌으면 온몸 뼈가 작살나서 까마귀 밥이 됐을 텐데."
마삼이 풀잎을 씹으며 투덜거렸다.
"입 닥치고 눈이나 똑바로 떠. 형님이 확실하게 확인하기 전까지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그냥 올려보내지 말라고 하셨잖아. 만에 하나 기어올라오면 대제자 사형께 알려지기 전에 그 자리에서 숨통을 끊어야 한다고."
배도형이 굵직한 목소리로 묵직한 박달나무 몽둥이를 바닥에 쿵 내려놓았다.
우진의 턱 끝이 굳었다.
'사고로 위장해 떨어뜨려 놓고 혹시 살아 돌아올까 봐 길목에 살수를 심어 둬?'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열기가 치밀어 올랐다. 단전에 간신히 갈무리해 둔 진기 한 줄기가 욱하는 감정에 반응해 사방으로 흩어지려 요동쳤다.
그 순간 귓전이 아니라 뇌수 한가운데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숨 삼켜라, 이 미련한 놈아.〕
정운휘의 냉랭한 질타였다.
〔감정에 휘둘려 진기를 흩뿌리면 저놈들이 네 숨소리보다 먼저 네 살기를 맡는다. 아까 배운 걸 잊었느냐? 어깨 내려라. 명치에 찬 숨 뱉고 기운을 아랫배 바닥으로 다시 끌어내려라.〕
우진은 이를 악물고 천천히 숨을 토해냈다. 서늘한 공기가 폐부를 채우고 아랫배 깊은 곳으로 가라앉자 요동치던 미약한 진기가 다시 얌전하게 한 줄기로 묶였다.
"어르신. 저 둘, 제가 원래 몸 상태여도 일대일로 겨우 버티던 놈들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다리도 절뚝거리고 옆구리도 터졌는데 둘을 한꺼번에 어떻게 뚫습니까?"
〔누가 둘을 한꺼번에 상대하랬느냐? 무학이란 힘자랑이 아니다. 저놈들은 지금 네가 죽은 줄 알고 넋을 놓고 있다. 긴장이 풀린 놈의 칼은 어린아이 장난감보다 느리다.〕
정운휘가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잘 봐라. 저 말라비틀어진 놈은 오른발에 무게를 싣고 있지 않다.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 채 엉덩이를 바위에 걸치고 있지. 저러면 칼을 뽑아 찌를 때 반드시 오른쪽 무릎이 먼저 들린다. 반면에 저 곰 같은 놈은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서 몽둥이를 크게 휘두를 생각밖에 없다.〕
우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정운휘의 심념을 거치자 평소에는 그저 위협적으로만 보이던 동문들의 자세에서 수많은 틈이 거짓말처럼 낱낱이 도드라져 보였다.
"틈이 보인다고 제 몸이 따라줄지는 별개 아닙니까?"
〔따라주게 만들어야지. 놈이 칼을 뻗고 난 뒤에 피하려 하지 마라. 그건 네 부러진 다리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 한다. 칼끝이 움직이기 직전 놈의 어깨 근육이 조여드는 순간에 먼저 반 걸음만 비틀어라. 세 치만 빗나가면 칼날은 허공을 가른다.〕
정운휘의 어조는 단호했다.
〔내가 신호를 줄 테니 네놈은 의심하지 말고 몸을 던져라. 알겠느냐?〕
우진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우진은 바위 옆으로 기어 나와 흙먼지를 털며 일부러 비틀거리는 척 발소리를 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덤불 속의 두 사람이 번쩍 고개를 돌렸다.
"누구냐!"
마삼이 벌떡 일어나며 단도를 쥐었다. 그들의 시선에 잿빛 진흙투성이에 피 묻은 헝겊을 감은 우진의 모습이 들어왔다.
"단…… 단우진?!"
마삼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곁에 있던 배도형도 몽둥이를 쥔 채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너, 살아 있었냐? 청운절벽에서 떨어졌는데 어떻게……!"
"마삼, 배 사형. 살려주십시오…… 절벽에서 간신히 나뭇가지에 걸려 목숨만 건졌습니다. 조 사형은 어디 계십니까? 문파로 돌아가야……."
우진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리며 마삼을 향해 다가갔다. 두 손을 허우적거리는 모습은 영락없는 반송장이었다.
마삼의 얼굴에 떠올랐던 경악이 순식간에 비열한 살기로 뒤바뀌었다.
"크큭…… 용케 살아남았나 본데 네놈 명줄도 참 끈질기구나. 하지만 헛수고했다, 우진아. 네놈은 여기서 죽어 줘야 하거든."
마삼이 눈을 번뜩이며 품에서 단도를 역수로 쥐었다. 놈의 몸이 앞으로 쏠리며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쇄도했다.
거리 닷새 치. 마삼의 칼날이 우진의 목덜미를 향해 비수를 내리꽂으려던 찰나였다.
머릿속에서 정운휘의 일갈이 터졌다.
〔지금이다! 왼쪽 발목 비틀고 오른쪽 어깨 세 치 낮춰!〕
우진은 생각을 거치지 않았다. 오직 머릿속에 울린 명령대로 부러질 듯 아파오던 왼쪽 발목을 비틀며 몸의 중심을 낮추었다.
쉬익-!
차가운 칼바람이 우진의 귓바퀴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마삼의 칼날이 정확히 허공을 갈랐다. 마삼의 눈동자에 짙은 당혹감이 스친 순간 정운휘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팔꿈치 펴지 말고 단전 기운을 팔뚝 안쪽으로 흘려라! 저놈 팔꿈치 안쪽 오금을 그대로 꺾어 찍어!〕
우진은 숨을 짧게 끊으며 단전의 미약한 진기를 오른팔로 밀어 올렸다. 굽혀진 팔꿈치가 쐐기처럼 마삼의 뻗은 팔 안쪽 관절을 정확하게 내리찍었다.
빠각!
"끄아아악!"
섬뜩한 뼈 마디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마삼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쥐고 있던 단도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우진의 동작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관절을 박살 낸 반동을 이용해 마삼의 턱밑으로 파고들며 턱 끝을 손바닥 아래 둔탁한 뼈로 매섭게 올려쳤다.
퍽!
마삼의 고개가 뒤로 꺾이며 흰자를 드러낸 채 바닥에 고꾸라졌다. 단 1합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이게 무슨……!"
뒤에서 지켜보던 거구의 배도형이 경악으로 물든 얼굴로 뒷걸음질을 쳤다. 만년 삼류 둔재라 불리던 단우진이 마삼을 단숨에 때려눕히는 광경은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사파 요술이라도 배운 거냐!"
배도형이 괴성을 지르며 두 손으로 묵직한 박달나무 몽둥이를 치켜들었다. 놈의 거대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은 마삼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위에서 내리찍히는 몽둥이에 스치기만 해도 우진의 갈비뼈는 가루가 될 터였다.
〔쫄지 마라!〕
정운휘의 호통이 우진의 고막을 때렸다.
〔저놈은 팔 힘만 믿고 휘두르는 꼴통이다. 내리찍는 궤적에 힘이 실릴수록 하체 중심은 공중에 뜬다. 피하려 들면 몽둥이 끝에 걸린다. 차라리 놈의 품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라!〕
배도형의 몽둥이가 허공을 찢으며 무서운 기세로 내리꽂혔다.
콰앙!
몽둥이가 바닥의 바위를 깨부수며 흙먼지를 튀겼다. 그러나 그 자리에 우진은 없었다.
우진은 몽둥이가 떨어지는 궤적의 바깥이 아니라 몽둥이 손잡이 안쪽, 즉 배도형의 가슴팍 바로 밑으로 몸을 던져 미끄러져 들어갔다.
"뭐, 뭣?!"
배도형이 경악해 시선을 내리깔았을 때 우진은 이미 놈의 품속에 파고든 뒤였다.
〔왼발로 저놈 오른발 안쪽 복사뼈를 걷어차 균형을 깨라! 그리고 단전의 진기를 오른손 엄지에 모아 명치 아래 세 치, 거궐혈을 찔러 넣어!〕
우진은 배운 대로 몸을 움직였다. 발목의 통증을 억누르며 배도형의 발목 안쪽을 강하게 걷어찼다. 거구의 몸이 휘청하며 무게중심을 잃는 찰나 우진은 운기조식으로 모아둔 가느다란 진기를 오른손 엄지끝에 응축시켰다.
단단하게 굳힌 엄지손가락이 배도형의 명치 아래 급소를 송곳처럼 파고들었다.
푸훕!
배도형의 입에서 숨이 턱 막히는 괴음이 터졌다. 핏줄이 곤두서며 눈이 뒤집힌 배도형은 몽둥이를 떨어뜨린 채 무릎을 꿇었다.
우진은 지체 없이 배도형의 목덜미 뒤쪽을 손날로 강타했다.
쿵!
거구의 사내가 맥없이 앞으로 꼬꾸라지며 흙바닥에 처박혔다.
연무장 뒤편 숲길에 고요가 찾아왔다.
단우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흙투성이가 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내가…… 둘을 쓰러뜨렸어.'
화청문에서 언제나 조롱받고 두들겨 맞던 자신이 조형기의 수족 노릇을 하던 두 놈을 단 한 대도 맞지 않고 일격에 제압했다.
가슴 한구석에서 벅차오르는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뭘 넋을 놓고 있느냐? 숨이나 골라라.〕
정운휘의 무덤덤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진기가 또 제멋대로 흩어지고 있다. 방금 찌른 급소 타격도 궤적이 반 치 빗나갔어. 제대로 찔렀으면 저놈은 기절이 아니라 그대로 숨이 끊어졌을 거다. 손가락 힘 빼고 호흡 가다듬어라.〕
우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어르신, 칭찬 한마디 해주는 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이 정도면 대박 아닙니까?"
〔흥, 칼도 제대로 못 쥐는 삼류 쥐새끼 둘 눕혀 놓고 호들갑 떨기는. 내 전성기 시절이었으면 재채기 한 번에 날아갔을 놈들이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정운휘의 음성에는 미세한 만족감이 섞여 있었다. 몸을 움직이는 감각을 흡수하는 속도만큼은 예상보다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우진은 숨을 가다듬은 뒤 덤불 속으로 들어가 칡넝쿨을 끊어 왔다.
기절한 마삼과 배도형의 손발을 등 뒤로 단단히 묶고 나무기둥에 엮었다. 그러고는 곁에 굴러다니던 마삼의 단도를 집어 들었다.
우진은 차가운 계곡물을 마삼의 얼굴에 끼얹었다.
"푸하악! 쿨럭, 쿨럭!"
마삼이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다. 눈앞에 피 묻은 진흙투성이 얼굴로 단도를 내려다보는 우진이 보이자 마삼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우, 우진아…… 아니, 우진 사형!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사형 소리가 참 듣기 좋네. 평소엔 버러지 보듯 하더니."
우진이 단도 끝으로 마삼의 볼때기를 툭툭 쳤다. 서늘한 칼날의 감촉에 마삼의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묻는 말에만 똑바로 대답해. 조형기가 뭐라고 시켰지?"
"형, 형기 형님이…… 네놈이 절벽에서 떨어진 걸 대제자 사형께는 비밀로 하고 그냥 실종됐다고 보고하겠다고 했습니다! 혹시라도 살아서 기어 올라오면 문파에 발 들이기 전에 숨통을 끊어 버리라고……!"
"대제자 사형은 이 일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지?"
"모르십니다! 진짜 모릅니다! 형기 형님이 대제자 사형께 잘 보여서 직계 제자로 들어가려고 네놈을 제물 삼아 청심초 채약 공을 자기가 가로채려던 것뿐입니다!"
우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조형기 놈이 독단으로 벌인 짓이었군.'
대제자가 직접 살인을 지시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조형기가 이토록 대담하게 일을 벌일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여전히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저놈이 찬 허리띠를 봐라.〕
정운휘가 우진의 시야를 통해 지적했다.
〔검은 매듭에 은실이 섞여 있다. 하급 제자가 차는 물건이 아니다. 저 조형기라는 놈 뒤에 다른 놈이 붙어 있는 게 분명하다.〕
우진은 마삼의 허리띠를 내려다보며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절벽 아래에서 주웠던 검은 삼각 무늬 제자복 조각과 맥락이 닿아 있었다.
우진은 마삼의 입에 젖은 헝겊을 틀어막았다.
"읍! 읍-!"
"조금만 조용히 있어라. 조형기 얼굴 보고 올 때까지 여기서 낮잠이나 자고 있어."
우진은 널브러진 배도형의 입까지 단단히 막은 뒤 덤불로 두 사람을 가렸다.
숲길을 벗어나자 저 멀리 화청문의 웅장한 기와지붕과 연무장이 눈에 들어왔다. 연무장 쪽에서는 제자들의 기합 소리와 목검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우진은 옷에 묻은 거친 흙을 털어내며 찢어진 소매를 정리했다.
"어르신."
〔왜 부르느냐?〕
"죽은 줄 알았던 놈이 멀쩡히 살아서 걸어 들어가면 조형기 낯짝이 어떻게 변할 것 같습니까?"
〔볼 만하겠지. 똥을 씹은 표정일 게다.〕
정운휘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하지만 방심하지 마라. 문파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부터는 이런 잔챙이들이 아니라 진짜 칼을 든 놈들이 득실거릴 테니.〕
"걱정 마십시오. 제 머릿속에 천하제일의 훈수꾼이 앉아 있는데 뭐가 무섭겠습니까?"
우진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화청문의 후원을 향해 당당하게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