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의 후손이 현대 무림을 씹어먹음

3화: 체육관을 건드린 대가
장철호가 사라진 뒤에도 진우는 한동안 골목에 서 있었다.
손목 안쪽이 욱신거렸다. 태극 문양은 사라졌지만 뜨거운 잔향이 남아 있었다. 손가락을 쥐었다 펴자 배 아래의 불씨도 아주 약하게 흔들렸다.
한 번 피하고 한 번 눌렀을 뿐인데 숨은 턱까지 차올랐다. 몸이 강해졌다는 착각에 빠지기엔 대가가 분명했다.
진우는 가방끈을 고쳐 잡고 학교로 향했다.
교실에 들어서자 시선 몇 개가 따라붙었다. 장철호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소문은 먼저 도착한 모양이었다.
"야. 서진우가 철호 손목을 꺾었다며?"
뒤쪽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문이 열리고 장철호가 들어왔다. 손목에는 새 파스가 붙어 있었다. 그는 진우의 책상을 세게 밀고 지나갔다.
"운 좋은 놈이 오래 웃네."
"웃은 적 없는데요."
장철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주먹을 쥔 손이 떨렸지만 진우는 먼저 시비를 걸지 않았다. 학교에서 다시 싸우면 아버지 체육관에 불리한 꼬투리만 늘어날 것 같았다.
점심시간이 되자 유도현이 식판을 들고 맞은편에 앉았다. 평소보다 숨이 가빴다.
"너 지금 밥 먹을 때가 아니야. 이거 봐."
도현은 휴대폰 화면을 내밀었다. 무림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에는 낡은 체육관 간판을 새 간판으로 바꾸는 사진이 붙어 있었다.
[지역 체육관 전환 전문 백호무도관, 이번 달에도 한 곳 정리 예정]
"댓글에 네 아버지 체육관 이름이 있어. 석 달 연체 체육관을 찾는다는 소문도 돌고."
도현은 손가락을 움직여 계약 조건을 보여 줬다.
"밀린 월세를 대신 내 주는 대신 체육관 이름과 회원 명단을 넘겨야 해. 관장은 삼 년 동안 근처에서 같은 업종을 못 하고."
진우는 사진 속 새 간판을 확대했다. 아래에는 작게 KMO 인증 교육관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이 사진은 언제 찍힌 거예요?"
"어제야. 길 건너 주차장에서 찍은 것 같아."
장철호가 교실 뒤에서 웃었다.
"오늘 끝나고 체육관에서 보자고 했다. 네 아버지도 그 자리에서 결정하실 거야."
진우는 휴대폰을 도현에게 돌려줬다.
"사진이랑 계약 조건 전부 저장해 둬요."
"뭐 하려고?"
"확인해야죠. 아버지가 뭘 넘기려고 하는지."
방과 후 체육관 앞에는 검은 승합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장철호가 먼저 내렸다. 그 뒤로 깔끔한 운동복을 입은 남자와 직원 둘이 내렸다. 직원들은 서류 가방과 작은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서태만은 체육관 안에서 매트를 닦다 말고 입구를 돌아봤다.
"백호무도관 오병석입니다. 관장님도 계셨군요."
오병석이 손을 내밀었다. 서태만은 악수를 끝내자마자 손목을 털었다. 상대의 손아귀가 예상보다 셌던 모양이었다.
"진우야. 오늘은 매트만 정리하고 먼저 들어가라."
"무슨 얘기 하시려고요?"
오병석은 서류 가방을 열었다. 첫 장에는 체육관 양도 협약서라는 제목이 찍혀 있었다.
"밀린 월세를 대신 내 드리고 시설 보수비도 지원하겠습니다. 관장님은 빚에서 벗어나시고 회원들은 더 좋은 시설에서 수련하게 됩니다."
서태만이 의자를 끌어왔다.
"조건은요?"
진우는 계약서를 내려다봤다. 양도 대상에는 체육관 상호와 집기뿐 아니라 기존 회원의 연락처와 수련 기록도 들어 있었다. 맨 아래에는 서태만이 삼 년간 같은 업종을 운영하지 않는다는 조항과 지원금의 열 배에 달하는 위약금이 적혀 있었다.
"이건 양도가 아니라 회원 명단을 넘기는 계약인데요."
오병석의 웃음이 옅어졌다.
"학생이 계약서를 다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아버지가 삼 년 동안 체육관도 못 열게 되어 있잖아요."
"그만해라."
서태만이 낮게 말했다.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그래도 당장 월세는 막을 수 있어."
진우는 대꾸하지 못했다. 서태만은 체육관을 포기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아들의 생활비와 다음 달 공과금이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장철호가 코웃음을 쳤다.
"그러니까 어른들끼리 알아서 하게 둬. 네가 골목에서 한 짓도 여기서는 안 통한다."
"골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본인이 말해 보시죠."
장철호의 발이 뒤로 빠졌다가 앞으로 나왔다. 오병석은 그 모습을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젊은 사람들 사이의 오해는 작은 시범으로 풀면 됩니다."
오병석이 매트 가운데로 걸어갔다. 직원 하나가 카메라를 들었다.
"계약은 제가 검토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서태만이 막아섰지만 오병석은 파스 붙은 그의 손목을 힐끗 봤다.
"아드님이 대신 확인해 주면 서로 편하지 않겠습니까?"
진우는 오병석의 오른발이 매트 가장자리에서 반 뼘 안쪽으로 움직인 것을 보았다. 손을 내밀기 전부터 공격할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한 번만 하죠."
"진우야!"
"계약서에 사인하지 않으면 끝나는 시범이잖아요."
진우가 매트 위로 올라갔다.
오병석은 장철호보다 훨씬 조용했다. 어깨가 움직이지 않았고 시선도 흔들리지 않았다.
진우는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배 아래의 불씨가 손목까지 이어졌고 태극 문양이 피부 아래에서 희미하게 떠올랐다.
오병석이 먼저 들어왔다.
손바닥이 가슴을 향해 뻗었다. 진우는 옆으로 피했다. 손바닥이 스친 바람이 셔츠를 밀었다.
다음 공격은 낮았다. 발목을 쓸어 넘어뜨리려는 동작이었다.
진우는 발을 빼지 않고 한 발 앞으로 들어갔다. 오병석의 팔꿈치 바깥을 밀자 이미 앞으로 쏟아지던 몸이 두 걸음 물러나 샌드백을 들이받았다.
오병석의 표정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가 허리를 낮췄다.
이번에는 속도가 빨랐다. 진우는 오른쪽 어깨가 아니라 왼발의 회전을 먼저 봤다. 몸을 비틀어 피했지만 손등이 스쳤다.
따끔한 통증이 올라왔다. 한 번 더 호흡을 이어 가면 몸 안의 열이 거칠게 치솟을 것 같았다.
오병석의 발이 매트의 젖은 자리를 밟았다. 직원이 떨어뜨린 물병에서 물이 새고 있었다.
진우는 뒤로 물러나는 대신 로프 쪽으로 비켜섰다. 오병석의 팔이 로프에 걸렸다.
진우가 로프를 잡아당기자 탄성이 풀리며 오병석의 상체가 앞으로 쏠렸다. 진우는 그의 어깨를 밀고 발끝으로 발목 앞을 막았다.
오병석의 무릎이 매트에 닿았다.
"이건 시범이 아니라 폭행이야!"
장철호가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진우는 오병석에게서 손을 떼자마자 장철호의 주먹을 피했다. 손목을 잡아 아래로 누르자 장철호의 팔꿈치가 접히고 어깨가 돌아갔다.
"놔!"
"뒤에서 오지 말라고 했죠."
진우가 힘을 조금 더하자 장철호가 무릎을 꿇었다. 손목을 부러뜨릴 수 있는 각도였지만 진우는 거기서 멈췄다.
그 순간 손목에서 쿵 소리가 울렸다.
태극 문양이 카메라에도 잡힐 만큼 선명하게 떠올랐다. 배 아래의 불씨가 급격히 작아졌고 시야 가장자리가 검게 물들었다.
진우는 장철호를 놓고 한 걸음 물러났다.
오병석은 매트에서 일어나 진우의 손목을 보고 있었다.
"그 문양은…"
말을 삼킨 그는 재빨리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을 가리려 했지만 진우는 방금 찍힌 영상을 누군가에게 전송하는 모습을 보았다.
"뭘 보내는 겁니까?"
"네가 먼저 폭력을 썼다는 증거다."
오병석은 계약서를 가방에 넣었다.
"오늘 계약은 없던 일로 하죠. 대신 이 체육관은 곧 KMO의 안전 점검을 받게 될 겁니다. 미등록 무공을 사용한 학생이 관원 사이에서 난동을 부렸다는 민원이 들어갈 테니까."
"거짓말이잖아요."
"진실은 서류에 남는 쪽이 이깁니다."
오병석이 직원들을 데리고 나갔다. 장철호도 손목을 감싼 채 뒤를 따랐다.
검은 승합차가 사라진 뒤 체육관에는 매트 냄새와 거친 숨소리만 남았다.
진우는 샌드백을 붙잡고 버텼다. 손끝이 떨렸다.
서태만이 달려와 아들의 어깨를 잡았다.
"괜찮냐? 어디 맞았어?"
"괜찮아요."
"괜찮은 얼굴이 아닌데."
서태만의 시선이 진우의 손목에 닿았다. 문양은 사라졌지만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거 어디서 난 거냐?"
진우가 대답을 고르는 사이 서태만은 오래된 거울 쪽을 바라봤다.
"네 할아버지도 비슷한 자국을 숨기고 다녔다. 어릴 때 물어봤더니 절대로 남한테 보여 주지 말라고 했어. 태극 문양이 있는 물건도 함부로 꺼내지 말라고 했고."
"왜 그랬는지는 몰라요?"
"몰라. 집안 얘기를 물어도 떠돌이 무술가였다는 말만 했어."
서태만은 진우의 손목을 놓았다.
"그래도 네가 나 때문에 저 사람들하고 싸울 필요는 없어. 체육관은 정리할 수도 있다."
"아버지가 포기하면 저 사람들은 회원들까지 가져가요."
"그게 네 인생보다 중요하냐?"
진우는 바닥에 떨어진 계약서를 바라봤다.
"제 인생을 지키려면 여기부터 지켜야 해요."
서태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진우는 도현에게 연락해 체육관에 오기 전부터 찍어 둔 계약서와 오병석의 발언을 저장하게 했다. 직원의 촬영본도 확보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체육관을 정리하고 한참이 지나서야 진우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대한무술기구 KMO였다.
[체육관 안전 관리 민원 접수 안내]
[내일 오전 9시 인증 상태 확인을 위해 방문합니다. 미등록 무공 사용자의 신원 확인이 포함됩니다.]
문자 아래에는 민원 사유가 적혀 있었다.
출처 불명의 무공으로 인한 관원 안전 위협.
첨부된 점검 예고서 하단에는 검은 선 두 개가 맞물린 작은 인장이 찍혀 있었다. 주칠 궤짝에서 보았던 태극 문양과 닮았지만 선이 꺾인 방향은 달랐다.
진우는 손목을 움켜쥐었다.
이번에는 체육관 안으로 들어오는 상대가 주먹을 먼저 내밀지 않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자신을 찾아오는 이유만큼은 분명히 알아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