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질려서 101회차를 시작했다

4화: 디버그 모드 활용법
강남역 뒤편의 낡은 상가 골목에는 밤이 되면 사라지는 문이 하나 있었다.
준혁은 폐점한 세탁소의 철문 앞에 멈춰 섰다. 간판의 전원은 끊겨 있었지만 바닥에 떨어진 담배꽁초는 아직 따뜻했다.
엘리스가 그의 어깨 옆에 떠올라 주변을 살폈다.
"여기가 정말 암시장인가요? 등록되지 않은 각성자와 불법 마석 거래가 이루어진다는 소문만 있는 곳인데요."
"소문이 아니라 좌표가 있어."
준혁은 철문 오른쪽의 녹슨 소화전 밸브를 세 번 돌렸다. 안쪽에서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철문 너머에는 아래로 이어지는 좁은 계단이 있었다. 계단 벽에는 CCTV처럼 생긴 검은 구체가 박혀 있었다.
[입장 기록 확인 중]
[각성자 등록 정보 없음]
잠시 뒤 구체의 붉은 렌즈가 준혁의 얼굴을 훑었다.
[임시 거래자 코드 발급]
문이 열렸다.
지하 폐상가는 생각보다 넓었다. 텅 빈 의류 매장과 식당 자리에 각성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피 묻은 갑옷을 수선했고 다른 쪽에서는 검은 천으로 감싼 상자를 교환했다.
누구도 크게 말하지 않았다. 대신 허공에 떠 있는 작은 창들이 손님과 물건의 값을 대신 흥정했다.
[E급 마석 1개 / 기준가 87G]
[D급 포션 1병 / 기준가 1,240G]
[미등록 스킬 각인서 / 협의]
"준혁 님. 이곳은 협회 규정상 이용하면 안 되는 장소예요. 기록이 남으면 각성자 자격이 정지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온 거야. 규정을 지키는 시장은 이미 시스템이 주인을 정해 놨거든."
준혁은 가장 안쪽의 감정소로 걸어갔다. 유리벽 안에 앉아 있던 중년 남자가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물건부터 보여 줘."
"이름은 문태식. 여기서 거래 중개를 맡고 있지."
문태식의 눈썹이 올라갔다.
"내 이름까지 알고 왔나?"
"중개 수수료를 선불로 받는 버릇도 알고 있어. 물건이 형편없으면 감정료까지 떼고."
문태식은 웃지 않았다. 준혁이 꺼낸 푸른 마석을 집게로 집어 감정대 위에 올렸다.
파란 빛이 한 번 번쩍였다.
[E급 마석]
[Mana_Capacity: 12.5]
[예상 거래가: 94G]
문태식은 고개를 저었다.
"94G에서 수수료 빼고 70G. 오늘 게이트가 열려서 마석이 넘쳐. 싫으면 나가."
준혁은 감정대의 수치를 보며 손가락을 마석에 대었다.
겉으로 표시되는 값은 12.5였다. 그러나 디버그 패널은 전혀 다른 문장을 보여 주고 있었다.
[Target: Low_Magic_Stone_E]
[Mana_Capacity: 12.5 / Float32]
[Validation: Item_Grade only]
[Market_Price = Base_Value × Mana_Capacity × Demand_Coefficient]
준혁의 시선이 마지막 줄에서 멈췄다.
문태식은 물건을 돌려주려 했다.
"결정했으면 빨리 해."
"잠깐 빌리지."
"뭐?"
준혁은 마석을 감정대에서 집어 들었다. 검은 콘솔이 손바닥 아래에서 조용히 열렸다.
[Read/Write: Accessible]
[Security_Level: None]
엘리스가 뒤늦게 콘솔을 발견하고 목소리를 낮췄다.
"준혁 님. 값을 바꾸실 생각이라면 그건 데이터 위조예요. 잘못 건드리면 마석이 붕괴하거나 시스템 경보가……"
"12.5를 12,487.5로 바꾼다. 등급 태그는 그대로 둬."
"구백구십구 배라고요?"
"정확히는 999배. 숫자는 깔끔해야 기억하기 좋지."
준혁은 Mana_Capacity 뒤의 숫자를 지웠다. 그리고 새로운 값을 입력했다.
[Command: Mana_Capacity.Set(12487.5)]
파직.
마석 안쪽에서 아주 작은 금이 갔다. 푸른빛이 한순간 붉게 변했다가 다시 원래 색으로 돌아왔다.
[Write complete]
[Item_Grade: E]
[Validation: Pass]
등급 검증은 분류 태그만 읽었다. 가격 함수는 실제 용량을 읽었다. 준혁은 두 검사가 서로 다른 줄을 본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손가락을 뗐다.
감정대의 숫자가 다시 떠올랐다.
[E급 마석]
[Mana_Capacity: 12,487.5]
[예상 거래가 산출 중……]
문태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게 무슨…… 감정기가 고장 났나?"
주변의 각성자들이 하나둘 고개를 돌렸다. 감정대 위에서 솟구친 푸른 숫자는 작은 마석에 어울리지 않는 수치였다.
[예상 거래가: 9,876,450G]
폐상가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누군가가 욕설을 삼켰다. 다른 누군가는 즉시 주변 거래소에 가격을 문의했다.
문태식은 준혁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거 어디서 났어?"
"방금 네 감정대에서 나왔지."
"장난하지 마. E급 껍데기에 저 정도 마력이 들어 있으면 D급 코어도 녹아."
"그래서 비싸게 팔려고."
문태식은 마석을 다시 감정대에 올렸다. 기계는 같은 결과를 내놓았다. 그는 감정 결과와 준혁을 번갈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9백만은 못 줘. 이런 물건은 출처 확인이 먼저야."
"출처 확인하는 동안 다른 중개인에게 팔면 돼."
준혁이 몸을 돌리자 문태식이 급히 외쳤다.
"잠깐! 공개 입찰로 넘기자. 거래소 보증금만 걸면 구매자들이 알아서 가격을 올릴 거야. 수수료는 내가 낮춰 주지."
"선입금은?"
"거래 확정 뒤 정산."
"아니. 입찰 금액의 30퍼센트를 먼저 받아."
문태식이 인상을 찌푸렸다.
"여긴 네가 조건을 고르는 곳이 아니야."
준혁은 그를 바라보며 검은 콘솔의 한 줄을 띄웠다. 문태식에게는 보이지 않는 거래소 규약이었다.
[High_Risk_Item: Advance_Deposit = 30%]
[Auction_Lock: Seller may cancel before deposit confirmation]
"고위험 품목은 선입금이 원칙이야. 네 장부에도 그렇게 적혀 있고."
문태식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그때 마석 주변에 관조자의 렌즈들이 모여들었다.
[관조자 '도파민중독자7': "이번엔 마석 사기냐? 저 조그만 게 9백만이라고?"]
[관조자 '어둠의관조자': "수치가 조작되었다. 그러나 조작 지점은 시장 검증 바깥이다."]
[관조자 '사이다감별사': "진짜 팔리면 인정한다. 안 팔리면 그냥 허세꾼임."]
준혁은 마지막 문장을 보고 피식 웃었다.
"좋아. 입찰 시작해."
문태식이 떨리는 손으로 거래 창을 열었다.
[상품 등록: 미등록 E급 마석]
[현재가: 9,876,450G]
가격이 뜨자 폐상가의 단말기들이 동시에 울렸다. 협회 산하 길드 두 곳과 이름을 숨긴 구매자 셋이 입찰에 참여했다.
오늘 강남역 게이트가 만든 마력 부족으로 수요 계수가 평소보다 18배 높아진 상태였다. 그 계수는 관조자들이 보낸 후원금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 작은 돌 하나가 방송 수익과 서버 유지비를 함께 움직이는 톱니가 된 셈이었다.
[입찰가: 10,100,000G]
[입찰가: 10,500,000G]
[최고 입찰가: 12,000,000G]
문태식의 눈이 커졌다.
"이걸 누가……"
"마력이 필요한 사람. 아니면 마력에 돈을 걸고 싶은 사람."
그때 거래소의 테두리가 붉게 물들었다.
[비정상 데이터 감지]
[거래 검증 서버 응답 지연]
문태식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거래 취소해! 이건 협회 감사가 붙을 물건이야!"
감정소 양옆의 문이 열리며 검은 조끼를 입은 경비원 네 명이 들어왔다. 그들의 손에는 각성자 제압용 쇠뇌가 들려 있었다.
"판매자와 물품을 격리한다."
"누가?"
준혁은 거래 창의 시계를 확인했다. 최고 입찰자가 선입금 버튼을 누른 순간부터 0.8초가 지났다.
검은 콘솔이 거래 로그를 펼쳤다.
[Deposit_Confirm: Complete]
[Seller_Cancel: Locked]
[Settlement: Pending]
거래 확정까지 남은 시간은 1.2초.
준혁은 경비원들이 쇠뇌를 겨누기 전에 손가락으로 로그의 순서를 두 번 눌렀다.
[Command: Settlement.Queue_Priority(Deposit)]
띠링.
[거래가 확정되었습니다.]
[판매자 강준혁에게 12,000,000G가 지급됩니다.]
빛나는 숫자가 허공에 떠올랐다. 동시에 수정했던 마석의 값이 원래 수치로 돌아갔다.
[Mana_Capacity: 12.5]
마석은 평범한 E급 결정체가 되었다. 검증 서버가 이상을 발견해도 이미 확정된 정산을 되돌릴 권한은 거래소에 없었다.
문태식이 소리쳤다.
"값이 돌아왔잖아! 사기야!"
"거래할 때는 진짜였고 정산할 때는 네 감정기가 확인했어. 어느 쪽을 믿을지는 감사관에게 설명해."
준혁이 손을 털자 경비원 하나가 쇠뇌를 발사했다.
쉬익!
준혁은 발끝으로 바닥의 빈 금속 쟁반을 차올렸다.
팅!
화살은 쟁반에 맞고 방향을 꺾어 천장의 배관에 박혔다. 쏟아진 증기가 경비원들의 시야를 가렸다.
준혁은 감정대 아래의 비상 통로를 걷어찼다. 낡은 철판이 벌어지며 좁은 배수로가 나타났다.
엘리스가 다급하게 따라왔다.
"12,000,000G라니요! 방금 그건 거래소 정산 순서를 바꾼 거죠?"
"선입금이 먼저 들어왔잖아. 시스템이 스스로 정한 순서야."
"하지만 거래 로그에 이상 권한 흔적이 남았어요."
준혁은 배수로 벽에 손을 짚었다. 콘솔이 거래소의 외부 연결 목록을 비췄다.
[Settlement Relay: Association_Shadow_Ledger]
[Revenue Share: Akasha_Cast / Viewer_Donation]
[Temporary Backdoor: 07ECO-3F-19]
준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찾았다."
"뭘요?"
"돈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빠지는지."
뒤쪽에서 경비원들의 고함이 울렸다. 붉은 경보창이 배수로 천장까지 따라붙었다.
[관리자 긴급 명령이 실행됩니다.]
[Omega_Emergency_Patch 준비 중]
[Debug_Level_1 침입 흔적을 추적합니다.]
엘리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오메가가 직접 추적을 시작했어요. 지금 나가야 해요!"
"알아."
준혁은 벽에 표시된 낡은 화물 승강기 표식을 발견했다. 이 통로는 지하철 공사 때 쓰던 폐쇄 구역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는 피난 경로를 알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을 끌어들일 생각은 없었다.
녹슨 레버를 당기자 승강기 바닥이 흔들리며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배수로 입구를 막으려던 경비원들이 쇠뇌를 쏘았지만 화살은 닫히는 철문에 튕겨 나갔다.
문태식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네놈 이름이 뭐냐!"
준혁은 어둠 속에서 거래 대금을 확인했다. 12,000,000G. 시스템이 만든 첫 번째 돈줄에서 뜯어낸 돈이었다.
그는 문태식의 계좌로 500,000G를 전송했다.
"수수료다. 감정료도 여기서 빼."
"뭐?"
"네 시장이 통째로 닫히면 다음 거래를 못 하잖아. 사람까지 굶길 생각은 없어."
승강기가 지하 깊은 곳에 멈췄다. 준혁은 콘솔에 복사해 둔 백도어 주소를 별도 저장했다.
엘리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부자가 되셨으니 숨어 지내실 건가요?"
준혁은 어둠 너머로 떠오른 관조자의 렌즈를 바라보았다.
[관조자 '어둠의관조자': "돈을 훔친 게 아니라 회계의 목을 잡았군."]
"아니."
준혁은 새로 만든 계좌를 세 개로 나눴다. 은신처 보증금과 장비 구입비 그리고 손대지 않을 비상 자금이었다.
"이제부터 훔칠 건 돈이 아니라 구조야."
그 순간 서울 전역의 각성자 단말기에 같은 경고가 떠올랐다.
[긴급 패치 공지]
[비정상 마석 거래를 발생시킨 미등록 각성자를 수배합니다.]
[돌발 퀘스트: 시스템 침입자를 체포하라!]
준혁은 입꼬리를 올렸다.
오메가가 드디어 방송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좋아. 다음에는 네가 만든 퀘스트를 팔아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