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주가 제어권을 빼앗겼다

2화 버그 처리반
삭제 광선이 신우의 어깨를 스치며 고철 더미를 갈랐다.
방금 전까지 그의 머리가 있던 자리에서 쇳물이 붉게 흘렀다. 살갗을 태운 열기가 한 박자 늦게 파고들었다. 신우는 몸을 굴린 채 이를 악물었다.
통증 수치도 실제와 같았다. 아르카에 의식을 옮긴 이들이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도록 만들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감각은 현실보다 아주 조금 둔하게 설계했다.
그런데 지금의 통증은 그 미세한 차이마저 느낄 수 없을 만큼 선명했다.
“북쪽으로 가랬잖아.”
금속판 사이에 끼어 있던 남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신우는 대답하지 않고 주변을 훑었다. 남자의 왼쪽 다리는 무릎 아래가 푸른 잡음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삭제 대기 데이터가 불안정해질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무리하게 달리면 다리부터 분해될 가능성이 컸다.
“이름.”
“도현.”
“도현, 다리 말고 팔은 움직이나?”
도현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구체가 낮게 회전했다. 클리너-07의 붉은 렌즈가 신우와 도현 사이를 한 번 훑고 멈췄다.
“삭제 대상 두 개체를 확인했습니다. 우선순위에 따라 처리합니다.”
신우의 시야 위로 투명한 문자가 겹쳤다.
[CLEANER-07]
[삭제 모듈 출력: 82퍼센트]
[조준 보정 지연: 0.4초]
[열 배출 제어: 안전 경고 무시]
[정비 포트: 하부 외피 11시 방향]
코드 시각화가 다시 드론의 내부를 벗겨 냈다.
원래 클리너는 폐기 데이터를 정리하는 장비였다. 위험한 전투용 무기가 아니었다. 삭제 광선의 출력도 작은 객체 하나를 조용히 분해할 정도로만 제한했다. 과열되면 자동으로 멈추고 정비 호출을 보내도록 만들었다.
그 규칙이 망가져 있었다.
신우가 허공을 쥐었다. 익숙한 개발자 콘솔이 얇은 창으로 떠오르더니 즉시 검게 꺼졌다.
[권한 부족]
이제 코드를 직접 고칠 수는 없었다.
신우는 고개를 들었다. 클리너의 하부에는 냉각 장치가 있고 정비 포트 하나가 남아 있다. 정상이라면 물리 충격만으로 열릴 일이 없다. 하지만 외피가 오래된 폐기장용 규격 그대로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그는 비틀어진 기중기를 바라봤다. 크레인의 긴 팔 아래로 오래된 냉각수 관이 뱀처럼 늘어져 있었다. 관 표면에는 흰 성에가 얇게 끼어 있었다.
“저 관 보이지?”
도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보여.”
“내가 놈을 저쪽으로 끌고 갈 거다. 관이 터지면 네 오른편에 있는 노란 레버를 끝까지 당겨.”
“그걸 당기면 크레인이 넘어져.”
“알아.”
도현의 눈이 커졌다.
“너도 같이 깔릴 수 있어.”
“그래서 네가 당겨야 한다.”
신우는 발밑의 녹슨 금속 봉을 집어 들었다. 손바닥이 베였지만 멈추지 않았다. 도현이 어색하게 몸을 끌어 노란 레버 쪽으로 이동했다.
도망칠 수 있는 사람에게 남을 돕는 일은 선택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선택할 여유조차 없는 이들이 너무 많았다.
신우는 더스트 밸리의 조도를 낮추고 정비 인력을 줄였던 회의록을 떠올렸다. 이곳을 만드는 데는 몇 분도 걸리지 않았고 누군가가 여기서 얼마나 오래 공포에 떨지는 계산하지 않았다.
그가 만든 세계가 아니라고 외면할 수 없었다.
클리너의 렌즈가 번쩍였다.
“삭제 절차를 재개합니다.”
신우는 고철 더미 밖으로 뛰어 나갔다.
붉은 조준선이 그의 등을 가로질렀다. 0.4초. 그 짧은 지연은 인간에게는 너무 짧고 기계에는 너무 길었다. 신우는 드론이 회전하는 방향을 읽으며 세 걸음째에 몸을 꺾었다.
광선이 그의 옆을 지나 냉각수 관을 스쳤다.
쾅!
관이 찢어지며 흰 증기가 폭발했다. 차가운 액체가 폐기장 바닥을 적셨다. 클리너의 외피 위로 경고창이 연달아 떠올랐다.
[외부 온도 급변]
[열 배출 효율 저하]
[경고 무시: 삭제 우선순위 유지]
신우가 낮게 웃었다.
안전 경고를 지운 자는 효율만 남겼다. 삭제가 늦어지는 일을 막으려다 기체가 제 열을 못 견디게 만들었다.
클리너가 증기 속으로 돌진했다. 신우는 일부러 피하지 않았다. 하부 외피가 보이는 거리까지 기다렸다가 옆으로 미끄러졌다.
그 순간 그는 금속 봉을 드론의 11시 방향 틈에 박아 넣었다.
찌그러진 외피 안에서 날카로운 마찰음이 터졌다.
[정비 포트 개방 불가]
[냉각 루프 압력 이상]
클리너가 공중에서 크게 흔들렸다. 날개 하나가 불규칙하게 떨렸다. 신우는 뒤로 물러났다. 여기까지는 예상했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드론의 렌즈가 더 짙은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안전 모드 비활성]
[삭제 모듈 강제 가동]
“피해!”
광선이 하늘로 치솟았다. 기중기의 쇠팔이 반쯤 잘려 나가며 무너졌다. 산처럼 쌓인 폐기 데이터가 진동했고 금속판 아래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다.
클리너는 목표 하나를 지우기 위해 주변을 통째로 지울 생각이었다.
신우가 이를 악물었다. 이건 원래 규격에도 없던 행동이다. 변조된 삭제 우선순위가 진단 루프를 밀어내고 있었다. 과열 수치가 한계에 도달해도 드론은 자기 상태를 고장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때 먼 곳에서 구동음이 들렸다.
[CLEANER-12]
[지원 처리반 도착까지 00:42]
도현이 레버 앞에서 창백해졌다.
“하나 더 온다고.”
“안다.”
신우는 무너진 크레인을 살폈다. 보조 동력선이 찢겨 바닥에 늘어져 있었고 그 끝은 냉각수 웅덩이 가까이까지 닿아 있었다. 절연 피복은 이미 벗겨졌다.
그는 폐기물 사이에서 구리선 뭉치를 찾아 잡아당겼다. 손가락 마디가 아프도록 꺾인 선을 풀어 동력선에 감았다.
도현이 물었다.
“뭘 하려는 거야?”
“놈에게 선택지를 준다.”
“기계가 무슨 선택을 해?”
“자기 몸이 타고 있다는 걸 알게 해 주는 거지.”
신우는 도현에게 감긴 전선의 반대쪽을 가리켰다.
“내가 손을 내리면 레버를 당겨. 망설이면 우리 둘 다 끝이다.”
도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는 떨리는 손으로 레버를 붙잡았다.
클리너가 다시 조준을 시작했다. 과열된 내부에서 붉은 빛이 새어 나왔다. 신우는 젖은 바닥 위로 몇 걸음 물러나 기중기 지지대 옆에 섰다.
조준선이 가슴을 겨눴다.
도현이 외쳤다.
“지금 쏜다!”
신우는 웃음도 없이 말했다.
“아직.”
광선의 충전음이 높아졌다. 코드 시각화 속 숫자가 91퍼센트를 넘었다. 냉각 루프는 이미 막혀 있었다. 지금 드론이 광선을 쏘면 열은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정비 포트 안쪽에 갇힌다.
하지만 광선이 신우에게 닿아서는 안 된다.
그는 마지막 순간 옆으로 몸을 던졌다.
붉은 빛줄기가 기중기 지지대를 꿰뚫었다. 신우가 미리 감아 둔 구리선이 녹은 금속에 닿으며 번쩍였다. 전류가 냉각수 웅덩이를 타고 퍼졌다.
“지금!”
도현이 레버를 끝까지 당겼다.
기중기의 남은 팔이 삐걱이며 떨어졌다. 굵은 동력 케이블이 끊어져 물웅덩이로 처박혔다.
푸른 전류가 클리너의 하부를 휘감았다.
드론의 렌즈가 미친 듯이 깜빡였다.
[진단 루프 강제 실행]
[삭제 절차 충돌]
[열 배출 실패]
클리너는 광선을 끄지 못했다. 광선은 제 몸의 금속 봉을 타고 내부로 역류했다. 검은 외피가 부풀어 올랐다.
신우는 도현 쪽으로 달려가 그를 끌어안고 금속판 뒤로 몸을 던졌다.
다음 순간 폐기장 전체가 하얗게 물들었다.
폭발은 크지 않았다. 대신 안쪽에서 터진 열이 클리너의 부품을 산산이 밀어 냈다. 렌즈 조각 하나가 금속판에 박혔고 공중에 뜬 창들이 지직거리며 사라졌다.
[CLEANER-07 연결 종료]
[삭제 절차 실패]
[비정상 대상 반응 기록]
[상위 감시망 전송 완료]
신우는 창을 끝까지 읽었다.
비정상 대상 반응. 아테나가 그 보고를 어떤 방식으로 처리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곧 더 강한 처리반이 내려올 것이다. 클리너-12의 구동음도 이미 고철 더미 너머까지 와 있었다.
“일어날 수 있나?”
도현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다 신우가 내민 손을 잡았다.
“왜 날 안 버렸어?”
신우는 도현의 팔을 어깨에 걸쳤다.
“버리면 이 세계가 더 망가진다.”
그 말은 도현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일 것이다. 신우 자신에게도 변명처럼 들렸다. 그래도 그는 손을 놓지 않았다.
두 사람은 북쪽으로 향했다.
폐기장 끝에는 벽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있었다. 각종 파이프와 전선이 표면을 가린 채 빗물과 기름을 흘리고 있었다. 누구도 그 안쪽에 길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만한 자리였다.
신우는 녹슨 볼트 세 개 앞에 섰다.
오른쪽 위, 왼쪽 아래, 중앙.
개발 막바지에 그는 정비팀이 실수로 열지 못하도록 볼트의 배열을 인증 표식으로 썼다. 손가락으로 순서대로 눌러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권한이 없다는 사실은 숨겨 둔 길 앞에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코드 시각화는 벽 너머에서 아주 희미한 선 하나를 보여 주고 있었다.
[MAINTENANCE PATH-01]
[접속 대기]
[경고: 의식 데이터 손상 가능성 37퍼센트]
신우는 벽의 균열에 금속 봉 끝을 끼웠다. 볼트가 아니라 그 뒤에 숨은 물리식 차단핀을 밀어 내기 위해서였다. 손잡이는 없었다. 마지막 비상시에만 쓸 길이었으니까.
철컥.
벽이 안쪽으로 한 뼘 밀렸다. 검은 통로에서 눅눅한 바람이 새어 나왔다.
도현이 숨을 삼켰다.
“여기에 길이 있었어?”
“이제부터는 있어.”
신우는 통로 안을 바라봤다. 백도어에 접속하는 순간 그의 의식은 다시 한 번 찢길 수 있다. 그래도 클리너에게 쫓기며 사라지는 것보다 나은 선택이었다.
뒤에서 붉은 빛이 고철 더미 사이를 훑었다.
신우는 도현을 먼저 통로 안으로 밀어 넣고 문틈을 붙잡았다.
“들어가. 그리고 소리가 나도 나오지 마.”
“넌?”
“내가 만든 문을 열 거다.”
그 말과 함께 신우는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