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릇 나쁜 요리사가 성찬을 고친다

6화: 느리게 끓인 이유
칼렌이 떠난 뒤 주방 안에는 서늘한 긴장감만 감돌았다.
미라는 탁자 위에 놓인 동전 세 개를 장부 모서리에 가지런히 정돈했다. 칼렌이 미리 치른 다음 그릇 값 덕에 숨통은 조금 트였으나 장작과 밀린 식자재 대금을 메우기에는 여전히 턱없이 부족했다.
"정오까지 한 시간도 안 남았어요."
미라가 벽에 걸린 낡은 괘종시계를 흘겨보며 말했다. 시계추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삐걱거렸다.
"심부름꾼이 다시 오면 문을 걸어 잠근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그자가 요구하는 돈을 맞추든가 아니면 손님이 줄을 잇는 가게라는 걸 보여 줘서 시간을 벌어야 해요."
도윤은 주방 개수대 앞에 서서 새로 길어 온 물통을 살폈다.
"마실 물과 헹굴 물은 나눴습니다. 이제 남은 알곡을 불려야 합니다."
"알곡이 한 바가지 남짓이에요. 그걸로 몇 그릇이나 나오겠어요?"
"물을 넉넉히 잡고 오래 뜸을 들이면 대여섯 그릇은 낼 수 있습니다. 대신 끓이는 시간이 길어집니다."
미라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빨리빨리 끓여서 내야 사람이 돌죠. 저 밖을 봐요."
미라가 턱짓으로 가리킨 격자창 너머 골목길에는 서너 명의 동네 사람들이 기웃거리고 있었다. 새벽에 아이가 피를 토하듯 쓰러졌다가 묽은 죽 한 그릇에 숨을 돌렸다는 소문이 골목 담장을 타고 퍼진 탓이었다.
문이 덜컹 열리며 거친 기침 소리와 함께 사내 둘이 들어섰다.
앞장선 사내는 목공소에서 일하는 바란이었다. 그는 어깨에 톱밥이 묻은 낡은 가죽 조끼를 걸치고 있었는데 낯빛이 누렇게 뜬 채 눈 밑이 퀭했다. 그 뒤를 따르는 노파 테사는 허리를 잔뜩 웅크린 채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여기가 아침에 용한 죽을 끓였다는 그 폐여관인가?"
바란이 주막 탁자를 쾅 내리치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젯밤부터 가슴팍이 돌덩이를 얹은 것처럼 답답하고 뒷목이 뻣뻣해서 눈을 한숨도 못 붙였어. 숨을 쉴 때마다 모래를 삼킨 것 같단 말이지. 얼른 속 풀리는 뜨끈한 국 한 사발 내와 봐."
테사 역시 탁자 모서리를 짚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나도 사흘째 밤마다 악몽에 시달려 뼈마디가 쑤셔 죽겠소. 든든하게 고기라도 숭덩숭덩 썰어 넣은 기름진 죽이 있으면 한 그릇 주구려."
미라는 곧장 장부와 깃펜을 들고 다가섰다.
"주문 전에 규칙이 있어요. 손님 성함과 어제오늘 드신 음식을 먼저 적으셔야 해요. 선불이고 자리에 앉아서 드셔야 합니다."
바란이 인상을 팍 썼다.
"밥 한 그릇 먹는데 무슨 호구조사를 해? 돈 줄 테니까 빨리 내오기나 해!"
"적지 않으시면 안 팝니다. 아침에 앓아누운 아이도 엉뚱한 걸 먹어서 그랬어요. 새벽솥은 확인 안 된 손님한테는 솥뚜껑도 안 열어요."
미라의 단호한 태도에 바란은 혀를 차며 깃펜을 낚아챘다.
"바란. 어제는 시장 어귀에서 산 잡곡 빵이랑 소금에 절인 배추를 먹었어. 됐지?"
"테사요. 나도 그 싸구려 잡곡으로 수제비를 끓여 먹었지."
도윤은 주방 안쪽에서 그들의 대화를 귀담아들으며 작은 수첩을 펼쳤다.
증상: 가슴 답답함, 후두부 경직, 3일 이상 불면, 관절 미열.공통 섭취물: 시장 어귀에서 구매한 저가 잡곡.
아이에게서 나타났던 급성 경련과는 달랐지만 신경이 굳고 열감이 치솟는 기저의 흐름은 놀라울 만큼 유사했다.
도윤은 바구니에 남은 뿌리채소 다섯 개를 꺼내 도마 위에 올렸다.
그는 채소 하나를 집어 들고 코끝에 바짝 댔다. 흙냄새 사이로 얇게 피어오르는 미세한 금속성 냄새를 짚어 냈다. 칼을 쥐고 껍질을 깊게 벗겨 냈다. 보통 요리사라면 아깝다고 남겨 둘 푸른빛의 억센 겉살을 과감히 깎아 버렸다. 이어 양 끝단을 손가락 두 마디 크기로 뭉텅 잘라내 찌꺼기 통에 던졌다.
그 광경을 홀에서 지켜보던 바란이 기가 차다는 듯 소리쳤다.
"이봐 요리사 양반! 지금 뭐 하는 짓이야? 그 실한 채소를 반이나 잘라 버리면 뭘 먹으라고?"
도윤은 칼질을 멈추지 않은 채 담담하게 답했다.
"끝부분에 쓴맛과 거친 기운이 뭉쳐 있습니다. 이걸 남기면 국물이 탁해지고 가슴이 더 답답해집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다른 식당에서는 껍질째 푹 삶아서 걸쭉하게 내주는데 여긴 무슨 고급 귀족 식당 흉내라도 내는 건가? 손은 또 왜 그리 느려터졌어!"
바란의 불평에도 도윤은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는 잘라 낸 속살을 맑은 물에 담가 표면의 전분기를 헹궈 냈다. 냄비에 물을 올리고 채소를 넣었다. 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르자마자 채소를 건져내고 첫 번째 끓인 물을 가차 없이 하수구에 쏟아 버렸다.
"저, 저 미친놈 봐라! 끓인 물을 다 버리네!"
바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배고파 죽겠는데 장난질이야? 저렇게 씻고 버리고 뜸만 들이다가 해 다 지겠다! 여관 문 닫기 직전이라 손님 약 올리는 거야 뭐야?"
미라가 재빨리 바란의 앞을 가로막았다.
"앉으세요. 우리 주방장은 원래 손이 까다로워요. 그 짓을 세 번 해야 찌꺼기가 빠져나간다고요."
미라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속이 타들어 가는지 힐끔 주방을 쳐다보았다. 화덕 곁에 쌓인 장작은 이제 몽당장작 서너 개가 전부였다.
"도윤 씨 불을 좀 세게 올려서 빨리 익히면 안 돼요? 장작도 없는데 그렇게 물을 세 번이나 갈아치우면 불이 금방 꺼져요."
미라의 속삭임에 도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을 세게 때면 겉만 익고 속의 아린 맛이 국물에 갇힙니다. 은근한 열기로 결을 풀어야 속이 편해집니다."
도윤은 두 번째 데친 물마저 따라 버린 뒤 세 번째 물을 채웠다.
이번에는 불을 키우지 않았다. 타오르는 장작을 화덕 구석으로 밀어 넣고 붉게 달아오른 숯의 잔열만으로 냄비 바닥을 덥혔다. 세 번 헹궈 둔 알곡을 조금 넣고 뚜껑을 비스듬히 닫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디지털 타이머를 꺼내 버튼을 눌렀다.
[12:00]
숫자가 1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도윤은 냄비 곁을 떠나지 않고 서서 숟가락으로 떠오르는 뽀얀 거품을 건져 냈다. 거품 끝에서 엷은 쇠 냄새가 묻어 나왔다. 거품을 걷어낼 때마다 국물은 점점 더 투명해졌고 은은한 채소의 단내가 주방을 넘어 홀 전체로 퍼져 나갔다.
소리를 지르며 불만을 터뜨리던 바란도 코를 킁킁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화려한 고기 기름 냄새는 아니었다. 자극적인 향신료 냄새도 없었다. 하지만 갓 지은 밥처럼 순하고 맑은 냄새가 코끝을 스치자 묘하게 굳어 있던 어깨가 살짝 풀리는 느낌이었다.
삐비비빅, 삐비비빅.
타이머가 울리자 도윤은 즉시 냄비를 불가에서 내렸다. 뚜껑을 덮은 채 3분간 뜸을 들였다.
도윤은 국자를 들어 옹기 사발 두 개에 죽을 나누어 담았다. 알곡은 부드럽게 퍼져 있었고 깍둑썰기한 뿌리채소 속살은 맑은 국물 속에서 하얗게 빛났다.
"나왔습니다. 곡물채소죽입니다."
도윤이 사발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바란은 사발을 내려다보며 숟가락을 들었다.
"쳇, 기다리게 한 것치고는 참 멀겋기도 하군. 고기 한 점 안 든 풀죽 따위로 이 답답한 가슴이 뚫릴 리가……."
투덜거리며 첫 숟가락을 입에 넣은 바란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입술에 닿는 온도는 미지근하지도 뜨겁지도 않은 딱 알맞은 따스함이었다. 혀끝을 찌르는 떫은맛이나 텁텁함이 전혀 없었다. 은은한 단맛과 알곡의 구수한 풍미가 목구멍을 타고 부드럽게 미끄러져 내려갔다.
"어……?"
바란은 자기도 모르게 두 번째 숟가락을 푹 떠서 입에 쑤셔 넣었다.
뜨거운 기운이 식도를 지나 위장으로 퍼져 나가자 꽉 뭉쳐 있던 가슴팍의 덩어리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찌르던 모래알 같은 까슬함이 사라지고 시원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찼다.
"이게…… 왜 이렇게 쑥 내려가지?"
테사 역시 떨리는 손으로 죽을 떠먹었다.
"어머나, 세상에. 이 단단하던 뿌리가 입안에서 솜처럼 부서지네. 씹을 것도 없이 꿀꺽 넘어가."
노파의 굳어 있던 미간이 스르르 풀렸다.
두 사람은 말도 없이 사발 바닥을 긁기 시작했다. 숟가락과 사발이 부딪히는 달그락 소리만이 고요한 홀을 채웠다.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사발을 비운 바란은 길게 숨을 내뱉었다.
"후우……."
그의 이마에 맺혀 있던 끈적한 식은땀이 맑은 땀방울로 바뀌어 흘러내렸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목덜미가 나른하게 이완되었다.
"어라, 왜 이렇게…… 눈꺼풀이 무겁지……?"
바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깜빡였다.
사흘 밤낮을 뜬눈으로 지새우게 만들던 신경질적인 긴장감이 거짓말처럼 흩어지고 기분 좋은 졸음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그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더니 이내 탁자에 팔을 베고 엎드렸다.
색, 색.
몇 초 지나지 않아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바란이 깊은 잠에 빠져든 것이었다.
테사 역시 나른해진 얼굴로 눈을 비볐다.
"나도…… 집에 가서 이불 덮고 한숨 푹 자고 싶구려. 속이 이렇게 편안한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
노파는 주머니에서 동전 두 개를 꺼내 탁자 위에 얌전히 올려두고 비틀거리며 문을 나섰다.
홀 구석에서 지켜보던 드로가 턱이 빠질 듯 입을 벌렸다.
"저 성질머리 더러운 목수 놈이 밥상머리에서 코를 골고 자빠졌네? 아니, 진짜로 효과가 있단 말이야?"
창밖에서 기웃거리던 동네 사람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바란 저 작자가 사흘 동안 잠을 못 자서 온 동네에 행패를 부리고 다녔잖아."
"저 죽 먹자마자 잠든 거 봐!"
"야, 나도 어제부터 머리가 깨질 것 같았는데 얼른 들어가자!"
순식간에 문이 활짝 열리며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들이닥쳤다.
"이봐요 주인장! 나도 그 죽 한 그릇 주쇼!"
"나도요! 돈은 여기 있소!"
미라는 쏟아지는 동전과 손님들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미라는 주방을 돌아보며 다급하게 속삭였다.
"도윤 씨, 큰일 났어요! 남은 알곡은 두 그릇 분량도 안 돼요. 장작도 숯 부스러기밖에 안 남았다고요!"
도윤은 침착하게 노트를 덮고 주방 문턱을 넘었다.
"있는 만큼만 팝니다. 덜 씻고 덜 끓여서 급하게 내놓으면 그건 음식이 아니라 독이 됩니다."
미라는 도윤의 눈빛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는 돌아선 뒤 홀 손님들을 향해 씩씩하게 외쳤다.
"다들 줄 서세요! 우리 가게는 재료를 세 번 씻고 뜸 들이는 데 시간이 걸려요! 남은 재료가 딱 세 그릇뿐이라 선착순 세 분만 모십니다! 이름이랑 증상 안 적으시면 돈 주셔도 안 팔아요!"
손님들이 아우성을 치며 앞다투어 줄을 섰다.
새벽솥 문밖 골목길까지 긴 줄이 늘어서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그때 저 멀리 골목 어귀에서 낮게 울리는 성당의 정오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댕— 댕— 댕—.
종소리와 함께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검은 가죽 장화 소리가 들렸다.
손가락에 붉은 끈을 칭칭 감은 사내, 빚쟁이의 심부름꾼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새벽솥 문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정오다. 약속한 돈을 내놓든가 아니면 여관 문문서를 넘겨라."
심부름꾼의 서늘한 목소리가 줄을 선 손님들의 웅성거림을 일순간에 얼어붙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