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의 1층에서 100년 동안 스탯만 올림

2화: 10년의 공백, 낡은 신분증
치이익—
산산조각 난 측정기 잔해에서 매캐한 백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로비 대리석 바닥에 흩어진 마정석 코어 파편들이 파지직거리는 잔류 전류를 뿜어냈다. 1층 대기 로비에 내려앉은 정적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무거웠다.
"스, 스캔 대상 접근 금지!"
바닥에 주저앉았던 측정 요원이 엉덩이를 질질 끌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고함에 넋을 놓고 있던 경비 헌터들이 일제히 무기를 고쳐 쥐었다. 철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력 탄환을 장전한 충격 소총과 푸른 날을 세운 바요넷이 서후의 전신을 겨누었다.
"제자리에 멈춰라!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무릎을 꿇어!"
선두에 선 경비대장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대장은 수많은 하위 던전을 돌며 잔뼈가 굵은 베테랑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를 마주한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났다.
남자는 살기를 뿜지도 않았고 무기를 빼 들지도 않았다. 그저 잿빛으로 바랜 낡은 가죽 코트를 걸친 채 건조한 눈으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숨이 턱턱 막혀 왔다.
남자가 서 있는 주변의 공기가 기형적으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거대한 산 하나가 통째로 사람의 형상을 띠고 걸어 나온 것 같은 불가해한 질량감이었다.
서후는 경비대장의 경고를 들으며 제자리에 가만히 섰다.
100년 만이었다.
시스템의 메마른 기계음이나 골렘의 포효가 아닌 살아 있는 인간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정말로 100년 만이었다.
오랜 세월 쓰지 않아 굳어 있던 귓바퀴가 말소리의 굴절과 호흡의 떨림을 생생하게 포착했다. 서후는 눈을 가늘게 뜨며 경비 요원들의 무장을 살폈다.
100년 전 그가 기억하던 헌터들의 장비는 조잡한 철제 갑옷과 개조된 사냥용 총기가 고작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이 든 총기에는 정교한 마도 회로가 새겨져 있었고 제복 역시 방호 마법이 깃든 신소재 섬유였다.
세상은 그가 돌방에 갇혀 있는 동안 지나칠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손을 올리라고 했다! 세 번 경고하지 않는다!"
경비대장이 방아쇠에 검지를 걸며 소리쳤다. 요원들의 호흡이 거칠어지고 마력 탄창에서 푸른빛이 번뜩였다.
서후는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요원들이 흠칫하며 총구를 바짝 들이댔지만 서후의 손은 머리가 아니라 코트 안쪽 품으로 향했다.
"움직이지……!"
서후가 손가락 두 개로 품속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그의 손끝에 들려 있는 것은 흙먼지와 말라붙은 검은 피로 얼룩진 손바닥만 한 사각형 플라스틱 카드였다. 모서리는 삭아서 갈라져 있었고 표면의 코팅은 거의 다 벗겨져 있었다.
툭.
서후가 가볍게 손목을 털자 카드가 허공을 완만한 호를 그리며 날아갔다.
경비대장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그것을 낚아챘다. 폭탄이나 독극물이라도 닿은 것처럼 손을 떨던 대장의 시선이 카드 앞면에 박혔다.
[한국헌터관리협회 등록증]
- 성명: 강서후
- 등록 번호: 01-E-4402
- 인가 등급: E급
- 발급 일자: 2016년 9월 11일
"……이게 뭐야?"
대장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디자인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지금 쓰이는 협회 라이선스는 홀로그램 칩이 내장된 디지털 카드였다. 하지만 손에 쥐인 것은 탑이 처음 출현했던 10년 전에나 임시로 발급하던 1세대 플라스틱 면허증이었다.
"강서후……?"
대장이 카드에 적힌 빛바랜 이름을 읊조렸다.
서후가 갈라진 목소리로 낮게 입을 열었다.
"미등록 침입자 아니다."
100년 동안 제대로 쓰지 않았던 성대가 삐걱거리는 쇳소리를 냈다. 발음은 투박했지만 한 글자 한 글자가 묵직하게 바닥을 짓눌렀다.
"1층 튜토리얼 01구역 소속. E급 헌터 강서후."
1층 로비 서편에 위치한 협회 임시 관측소.
강화 유리로 둘러싸인 취조실 안쪽에는 차가운 형광등 불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서후는 쇠로 된 의자에 앉아 맞은편 벽면에 걸린 대형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실시간 뉴스 채널에서는 탑의 공략 현황과 상위 길드들의 주가 변동 그래프가 쉴 새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삐비비빅! 삐비비빅!
단말기 앞에 앉은 협회 행정관이 낡은 플라스틱 카드를 리더기에 긁자마자 경고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모니터 화면 전체가 붉은색으로 점멸하며 굵은 글씨가 떠올랐다.
[경고: 영구 결번 데이터 감지]
- 대상자: 강서후 (남성, 29세)
- 최종 상태: 10년 전 실종 (사망 추정 영구 제적)
- 특이 사항: 탑 개방 원년 '1층 튜토리얼 01구역 마력 폭주 붕괴 사고' 피해자
"말도 안 돼……."
행정관이 안경을 고쳐 쓰며 모니터와 서후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10년 전 등록 사진 속의 청년은 풋내 나는 얼굴이었지만 눈매와 턱선의 윤곽은 눈앞의 남자와 분명히 일치했다.
행정관의 손가락이 떨리며 자판을 두드렸다.
"당신…… 진짜 강서후 씨라고요? 10년 전 1구역 사고 때 실종된?"
"그래."
서후의 대답은 단 한마디였다.
그는 화면에 떠 있는 '마력 폭주 붕괴 사고'라는 단어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사고.
협회는 그날의 일을 그렇게 기록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후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100년 전 그날, 석실의 문은 안쪽에서 부서진 것이 아니었다.
바깥에서 거대한 흑철 격벽이 내려앉으며 잠금장치가 걸렸고 시스템은 '실험 표본 장기 격리'라는 관리자 프로토콜을 가동했다.
누군가 고의로 문을 닫고 밖에서는 붕괴 사고로 처리해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 버린 것이다.
"말이 안 됩니다."
취조실 문을 열고 들어온 협회 수석 관측관이 서류철을 탁자에 내려치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1층 튜토리얼 01구역은 10년 전 탑이 열리자마자 내부 차원이 붕괴해 완전히 폐쇄된 곳입니다. 내부 산소도 식량도 없는 공간에서 사람이 10년 동안 살아남는다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요."
관측관의 눈동자에 짙은 의심이 서렸다.
"어디 밀수 루트로 기어 들어온 불법 체류자 아닙니까? 10년 전 사망자 신분증을 주워서 위장하고 있는 거라면 협회 특수구금형에 처해질 겁니다. 사실대로 말해요. 지난 10년 동안 어디 숨어 있었습니까?"
서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관측관을 보았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무미건조한 눈동자.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눈빛과 마주친 관측관은 자기도 모르게 숨을 들이켜며 말을 멈췄다.
100년 동안 어둠 속에서 골렘의 급소만을 노려보던 시선이었다. 그 눈빛에는 인간적인 온기 대신 3만 번이 넘는 도륙을 거치며 완성된 압도적인 생존자의 기형적인 무게가 담겨 있었다.
"방에 있었다."
서후가 낮게 읊조렸다.
"문이 열리지 않았고 매일 괴물이 나왔다. 그것들을 죽이면서 기다렸다."
"그, 그런 황당무계한 소리를 믿으란 말입니까?! 10년 동안 몬스터만 잡았다고요?!"
"10년이 아니다."
서후가 주먹을 쥐었다. 거친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 마디마디가 삐걱거렸다.
"내 시간은 백 년이었다."
취조실 안에 차가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관측관은 헛숨을 들이켰다. 남자의 말이 허황된 과대망상처럼 들려야 마땅했지만 마주한 눈빛이 너무나 또렷해서 비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미쳤군. 차원 고립 증후군으로 시간 감각이 완전히 망가진 거야."
관측관이 마른침을 삼키며 행정관에게 손짓했다.
"신원 조회가 저렇게 떴으니 규정대로 처리해. 사망 처리된 헌터가 살아 돌아온 이상 기존 등급은 무효다. 즉시 특수 감찰반에 보고서 올리고 심층 재측정실로 보낸다."
행정관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재측정실이요? 방금 로비에서 휴대용 측정기가 과부하로 터졌는데요?"
"휴대용 장비는 원래 E급이나 C급 측정용이라 노후화되면 쇼트가 날 수도 있어. 중앙 재측정실의 마력 챔버는 A급 공략대 레이드용으로 설계된 특수 격벽이다. 거기로 데려가."
관측관이 서후를 향해 명령조로 말했다.
"강서후 씨. 탑 내부 행정법상 미등록 헌터는 탑 밖으로 나갈 수도, 다른 층으로 이동할 수도 없습니다. 자신의 신원을 증명하고 싶다면 측정실로 가시죠."
서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서후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밖으로 나가든 탑의 위로 올라가든 지금의 세상이 요구하는 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100년 동안 쳐박아 둔 자들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탑의 중심부로 파고들어야만 했다.
관측소를 나와 중앙 복도로 들어서자 번쩍이는 유리벽 너머로 로비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서후의 곁에는 무장한 경비 요원 네 명이 일정한 거리를 둔 채 호위하듯 따라붙었다.
그들이 든 총구는 바닥을 향해 있었지만 언제든 서후를 쏠 수 있도록 손가락이 방아쇠 울에 걸려 있었다.
로비를 오가던 수많은 헌터들의 시선이 일제히 서후에게 꽂혔다.
"저 사람 뭐야? 행색이 왜 저래?"
"가죽 코트 다 찢어진 거 봐. 허리에 찬 검은 날도 부러졌잖아."
"어디 하층 쓰레기장에서 건져 올린 부랑자인가? 경비대까지 붙었네."
화려한 브랜드 로고가 박힌 방호 재킷을 입고 세련된 마법 무기를 든 젊은 헌터들이 쑥덕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10년의 세월은 헌터를 목숨을 건 개척자에서 거대 자본과 스폰서가 움직이는 화려한 엔터테이너로 바꾸어 놓은 듯했다.
서후는 그들의 비웃음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로비 2층 난간, 그리고 천장의 마도 환풍구 쪽을 향하고 있었다.
100년 동안 극도로 연마된 그의 초감각은 보이지 않는 시선들의 무게를 예리하게 짚어내고 있었다.
단순한 구경꾼들의 시선이 아니었다.
'관찰당하고 있다.'
2층 테라스 그늘진 기둥 뒤편.
단정한 단발머리에 실용적인 카키색 필드 재킷을 걸친 한 여성이 고성능 데이터 렌즈를 통해 서후를 응시하고 있었다.
중소 길드 '해든'의 현장 분석관 한미루였다.
미루는 렌즈 너머로 보이는 남자의 걸음걸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상해.'
미루가 데이터 패드에 실시간으로 기록되는 모션 분석 그래프를 확인했다.
화면의 수치는 믿기 힘들 만큼 완벽한 직선을 그리고 있었다.
'발소리가 전혀 안 나. 낡은 군화를 끌듯이 걷는데도 바닥에 닿는 충격량이 0에 수렴해. 골반의 회전, 어깨의 수평, 발바닥 전체로 체중을 분산하는 움직임까지…….'
그것은 초보 헌터의 서툰 걸음이 아니었다.
최소 수만 번, 아니 수십만 번 이상 똑같은 공간에서 같은 보법을 극한까지 갈고닦은 고수만이 보여줄 수 있는 극도의 신체 제어였다.
'저런 걸음걸이를 가진 E급 헌터가 세상에 어디 있어?'
미루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녀의 패드 상단에 협회 로비 경보 로그가 작게 깜빡이고 있었다.
[1구역 비상 개방. 측정기 폭발 사고 발생.]
해든 길드는 상위 길드들의 정보 독점에 밀려 만성적인 공략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미루의 직관이 속삭이고 있었다. 저 남자는 결코 평범한 부랑자가 아니었다.
동시에 탑 1층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협회 중앙 본부.
특수감찰국 집무실에 앉아 있던 백도겸 감찰관의 녹음 펜이 멈칫했다.
그의 책상 위에 놓인 보안 모니터에 긴급 보고서가 팝업 형태로 떠올랐다.
[긴급 보고: 10년 전 영구 봉쇄 구역 '튜토리얼 01' 생존자 확인. 사망 처리자 강서후 출현.]
백도겸의 무표정한 얼굴에 서서히 금이 갔다.
"1구역이라고……?"
그는 안주머니에서 낡은 가죽 수첩을 꺼냈다.
수첩 안쪽에는 10년 전 탑 개방 초기,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봉인되었던 구역들의 목록이 적혀 있었다. 그 목록의 맨 위에는 붉은 잉크로 동그라미가 쳐진 번호가 있었다.
01구역.
그리고 그 옆에 적힌 메모.
[관리자 교단 초기 접촉 의혹 구역. 전원 실종 처리 후 비공개 봉인.]
백도겸이 회색 정장 코트를 집어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망자가 10년 만에 제 발로 걸어 나왔다라."
감찰관의 차가운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았다.
"여기가 심층 재측정실입니다."
경비 요원들이 멈춰 선 곳은 1층 깊숙한 통제 구역 끝에 자리 잡은 원형 광장이었다.
광장 중앙에는 두께 30센티미터의 방호 강화유리로 둘러싸인 거대한 원통형 챔버가 우뚝 솟아 있었다. 챔버 외벽에는 미스릴 합금과 복합 마법 룬이 촘촘하게 새겨져 있었다.
"들어가시죠."
수석 관측관이 팔짱을 낀 채 턱짓으로 챔버를 가리켰다.
"이건 협회가 보유한 최고 등급의 고정형 마력 측정기입니다. A급 상위 레이드 보스의 브레스 충격도 견딜 수 있도록 특수 설계되었죠. 아까처럼 장비가 터졌다는 핑계는 통하지 않을 겁니다."
서후는 미동 없이 거대한 유리 챔버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기계의 외형이 아니라 기계 내부를 흐르는 마력의 회로망과 압력 분산 장치가 훤히 들여다보이고 있었다.
100년 동안 1층 보스의 단단한 외피와 마력 핵의 구조를 수없이 찌르고 베어 온 감각이었다.
기계는 겉보기에 웅장해 보였지만 구조적으로 순수한 물리적 질량 압력을 받아내는 데에는 치명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다.
서후가 나직하게 말했다.
"부서질 텐데."
관측관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하! E급 헌터의 허세가 하늘을 찌르는군요. 걱정 마시고 발판 위에나 똑바로 서십시오. 당신의 신체 등급이 얼마인지 전 세계에 공개되기 전에 말입니다."
서후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경고는 이미 충분했다. 듣지 않는 것은 그들의 선택이었다.
치이익—
육중한 유압음과 함께 챔버의 전면 강화유리문이 열렸다.
서후는 낡은 가죽 코트 자락을 쓸어내리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챔버 바닥 중앙에는 푸른 마법진이 새겨진 금속 발판이 놓여 있었다.
쿵.
서후의 낡은 군화가 발판 한가운데를 밟았다.
그 순간이었다.
지잉—!
서후가 발을 디딘 것만으로 발판 아래 설치되어 있던 마력 완충 스프링이 비명을 질렀다.
챔버 내부의 공기 밀도가 급격하게 팽창하며 강화유리 표면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응? 뭐지?"
외부 조종석에 앉아 있던 오퍼레이터가 모니터를 보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측정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압력 게이지가…… 왜 벌써 한계치의 80퍼센트를 넘어서지?!"
"뭐라고?!"
관측관이 놀라 조종석으로 달려드는 순간, 챔버의 육중한 유리문이 쾅 소리를 내며 완전히 닫혔다.
위이이잉—!
챔버 천장에서 붉은색 스캔 광선이 쏟아져 내렸다.
동시에 서후의 발밑에서부터 거대한 균열의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쩌적.
쩌저적—!
서후는 쏟아지는 붉은빛 속에서 허리에 찬 부러진 칼자루를 조용히 쥐었다.
그의 입술에 서늘한 호선이 걸렸다.
측정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