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성녀인 줄 알았는데 신이 편애함

3화: 황금빛 새장
육중한 철문이 닫히는 소리는 마치 단두대의 칼날이 떨어지는 소리처럼 묵직했다.
황금 가마에서 내린 리에나의 발밑으로 매끄러운 백대리석 회랑이 이어졌다. 광장의 흙먼지와 장작 타는 냄새는 멀어지고 은은한 유향 냄새와 벽면의 금박 성화들이 사방을 메웠다.
“이쪽으로 드시지요, 성녀님.”
순백의 의전복을 입은 여사제들이 고개를 숙였다. 동작은 절도 있었지만 그들의 굳은 어깨와 긴장한 손끝이 먼저 보였다. 신도라기보다는 귀한 포로를 호송하는 간수에 가까웠다.
도착한 곳은 대성전 동편 깊숙한 별채 ‘백야궁’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리에나는 숨을 들이켰다. 천장에는 유리 구슬로 엮은 샹들리에가 마력 빛을 뿜고 있었고 바닥에는 두터운 양모 융단이 깔려 있었다. 침상에는 최고급 실크가 물결쳤다. 거리에서 마대 자루를 덮고 자던 자신에게는 낯선 사치였다.
그러나 리에나의 시선은 화려한 가구 대신 방의 구석구석을 훑었다.
높다란 창문에는 백합 덩굴 모양의 쇠창살이 박혀 있었다. 테라스 밖은 깎아지른 절벽이었고 문밖에는 금빛 갑주의 성기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새장이네.’
그것도 아주 화려하게 꾸며진 황금 새장.
“성녀님, 목욕을 준비했습니다.”
세 명의 시녀가 수건과 은빛 대야를 들고 다가왔다. 선두의 시녀가 리에나의 어깨에 둘러진 망토를 벗기려 손을 뻗었다.
“신발도 벗으시지요. 흙탕물이 튄 것은 교단의 관례에 따라 소각해야 합니다.”
‘신발을 소각한다고?’
왼쪽 구두 굽 안에는 식량 창고 장부 조각이 들어 있었다. 신전 관리의 직인과 횡령 수량이 적힌 유일한 무죄의 증거였다. 빼앗기는 순간 자신은 쓸모가 다하면 버려질 쥐새끼 신세였다.
“아닙니다.”
리에나는 얼른 손을 들어 시녀의 손길을 막았다.
“남이 몸을 씻겨 주는 일에는 익숙하지 않아서요.”
“하지만 대사제님께서 몸을 청결히 하고 새 예복을 입히라 명하셨습니다.”
“대사제님의 뜻을 거스르겠다는 게 아니에요. 다만 혼자 씻고 싶을 뿐입니다.”
리에나는 일부러 몸을 떨며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거리에서 써먹던 순진한 고아의 얼굴이었다.
“아직 화형대의 불길이 눈앞에 어른거려 사람이 다가오면 숨이 막힙니다. 혼자 물에 몸을 담그면 나아질 것 같아요. 옷도 직접 갈아입겠습니다.”
호박색 눈동자에 맺힌 눈물을 보자 시녀들의 경계심이 풀렸다. 죽음의 공포를 겪은 어린 소녀라면 사람을 무서워하는 것도 당연했다.
“……알겠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종을 울려 주십시오.”
시녀들이 물러나자마자 리에나는 세면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리고 바닥에 주저앉아 왼쪽 구두를 벗었다.
구두 굽의 바깥쪽 모서리를 누르자 작은 소리와 함께 틈새가 벌어졌다. 손톱만 한 크기로 접힌 종이 조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잉크로 쓰인 숫자와 도장은 선명했다.
‘다행이다.’
하지만 시녀들이 둔 새 옷은 얇은 비단 가운뿐이었다. 속주머니 하나 없는 옷에 종이를 숨기기는 어려웠다.
그때 거실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울렸다.
똑, 똑.
“성녀님. 오르덴 대사제님께서 드셨습니다.”
리에나는 종이를 다시 구두 굽 틈새에 밀어 넣고 구두를 도로 신었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세면실 문을 열고 나가자 은발을 단정히 넘긴 노인이 서 있었다. 대사제 오르덴 베르크였다. 자애로운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눈동자 깊은 곳의 안광은 맹수처럼 차가웠다.
“앉거라, 아이야. 달콤한 과자와 따뜻한 차를 내오라 했다.”
“감사합니다, 대사제님.”
탁자 위에는 찻잔과 꿀에 절인 무화과가 놓여 있었다. 먹음직스러웠지만 리에나는 손도 대지 않았다. 거리에서 독 든 음식에 쓰러지던 부랑자들을 보아 왔기 때문이었다.
오르덴이 찻잔을 들었다 놓으며 리에나를 바라보았다.
“광장에서 많이 놀랐겠지. 거친 불길 속에서 얼마나 무서웠겠느냐.”
“죽는 줄만 알았습니다.”
“그래, 그럴 만하지. 하지만 그것은 형벌이 아니라 주신 루멘께서 네 은총을 드러내고자 마련하신 엄숙한 시련이었단다.”
리에나는 속으로 비소를 삼켰다. 아이들을 살려 달라 빌지 않았다면 자신은 이미 숯덩이가 되었을 터였다.
“저는 거리의 심부름꾼일 뿐입니다. 신성력을 배운 적도 없고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릅니다.”
“알 필요 없다.”
오르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서늘한 한기가 방 안을 채웠다.
“네가 신학을 알 필요도 교리를 공부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군중이 백합을 보았다는 사실이지. 그들은 너를 성녀라 믿고 있고 신전은 그 믿음을 지켜 줄 의무가 있다.”
오르덴의 손가락이 탁자 위를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네가 누구의 심부름을 했는지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신전의 말에 순종한다면 너는 제국에서 가장 존귀한 성녀로 남을 것이다. 네가 아끼던 거리의 어린 것들도 배를 곯지 않도록 신전이 돌보아 주마.”
‘아이들.’
리에나의 눈동자가 떨렸다. 자비의 약속이 아니라 아이들을 인질로 쥐고 있다는 협박이었다.
“하지만 만약 네가 신전의 뜻을 거스른다면 다시 화형대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때는 어떤 백합도 너를 구하지 못할 게다. 신성 모독의 죄는 횡령죄보다 백 배는 더 무거우니까.”
꼭두각시 성녀가 되든가 이단으로 몰려 불타 사라지든가. 선택지는 없었다.
“……대사제님의 뜻대로 따르겠습니다.”
“착하구나.”
오르덴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일어섰다. 그는 리에나의 머리에 축복을 얹은 뒤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 리에나는 의자에 등을 파묻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미친 노인네.’
신전은 화형대보다 지독한 거미줄이었다. 도망쳐야 했지만 창문에는 쇠창살이 박혀 있었고 문밖에는 기사들이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방 안의 마력 불빛도 사위어 갔다. 푸른 달빛만이 쏟아져 내렸다.
바스락.
그때 테라스 쪽에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렸다. 돌바닥을 밟는 규칙적인 군화 소리였다.
리에나는 은제 촛대를 집어 들고 커튼을 겨누었다.
어둠 속에서 커튼이 걷히며 검은 그림자가 들어왔다. 칠흑 같은 사제복과 차가운 회색 눈동자. 낮에 화형대에서 백합을 조사하던 이단심문부 부관 에단 로웰이었다.
“소리 지르지 마라.”
에단이 낮게 말했다.
“당신이 여길 어떻게…….”
“신전 경비의 순찰 주기에는 칠 분의 공백이 있다.”
에단은 창문을 등진 채 리에나를 응시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낮에 화형대에서 네 발끝이 가리키던 장부는 어디 있지?”
리에나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이 남자는 그 혼란 속에서도 자신의 움직임을 기억하고 있었다.
“발뺌하지 마라.”
에단이 다가왔다.
“대사제가 서둘렀던 처형 문서는 승인 인장이 누락되어 있었다. 신전 곡물 창고의 장부 원본도 저녁에 화재로 소실됐다. 대사제는 증거를 지우고 있다.”
‘원본을 불태웠다고?’
그렇다면 자신이 가진 종이 조각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진짜 기록이었다.
“대사제는 너를 성녀로 세워 군중을 기만한 뒤 쓸모가 다하면 제거할 거다. 증거를 내놓아라. 그래야 내가 이단심문부의 권한으로 너를 보호할 수 있다.”
리에나는 에단의 회색 눈을 바라보았다. 거짓은 없어 보였지만 권력자들의 보호가 얼마나 허망한지 잘 알고 있었다.
“이단심문부의 권한이요?”
리에나가 헛웃음을 흘렸다.
“낮에 광장에서는 왜 절 끌어내리지 못하셨나요? 대사제님이 한마디 하시니까 물러서셨잖아요. 당신들의 법과 절차는 가난한 사람들이 굶어 죽을 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요. 당신이 나쁜 사람 같지는 않지만 날 지켜주지는 못해요. 내 증거를 넘겨주는 순간 난 당신의 장기말까지 되는 거예요.”
에단은 입을 열지 못했다. 소녀의 말은 그의 무력한 현실을 찔렀다.
침묵 끝에 에단이 품속에서 작은 은제 송곳 하나를 꺼내 탁자에 놓았다. 책갈피처럼 생겼지만 끝이 예리했다.
“……차를 마시지 않은 건 현명했다. 신전에는 사람을 순종하게 만드는 은밀한 약초가 많다. 앞으로도 대사제가 주는 음식은 삼키지 마라.”
“이건 뭐죠?”
“최소한의 무기다. 장부를 어디에 숨겼든 끝까지 지켜라. 빼앗기는 순간 네 목숨도 끝이다.”
에단이 테라스 난간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기억해라. 황태자 카이렌 전하의 정보국이 신전을 에워쌌다. 네가 성녀이든 사기꾼이든 곧 피바람이 불 거다.”
에단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차가운 바람만이 커튼을 흔들었다.
방 안에는 다시 리에나 혼자 남았다.
리에나는 문을 걸어 잠근 뒤 은제 송곳을 집어 들었다. 황태자까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니 눈앞이 아득했다.
그녀는 구두 굽에서 종이를 꺼낸 뒤 송곳과 화장대 서랍의 무명실을 쥐었다. 구두 굽에 언제까지나 둘 수는 없었다. 가장 안전한 곳은 늘 입고 다니는 옷 속뿐이었다.
리에나는 겉옷 안쪽의 단단한 솔기를 송곳 끝으로 뜯어내고 장부 조각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송곳으로 천을 뚫어 무명실로 꼼꼼하게 꿰맸다. 손으로 만져도 천의 심지처럼 느껴질 만큼 감쪽같았다.
마지막 매듭을 이로 끊어내는 순간 탁자 위의 촛불이 흔들렸다.
스르륵.
어디선가 싱그럽고 서늘한 향기가 번져 왔다. 낮에 광장을 뒤덮었던 바로 그 순백의 백합 향기였다.
방 안에는 백합 한 송이 없었고 창문도 닫혀 있었다. 그런데 촛불의 가장자리가 푸르스름한 금빛으로 물들며 리에나의 지친 손등을 따스하게 감쌌다.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손을 토닥여 주는 것 같았다.
‘……신?’
화형대에서 아이들을 살려 달라고 외쳤을 때 하늘을 갈랐던 그 거대한 빛. 신전의 위선자들과는 전혀 다른 차갑고도 다정한 기척이었다.
왜 자신에게 이런 기적을 내렸을까. 알 수 없었다. 자신은 기도를 바치던 신자도 아니었고 거짓말을 하던 거리의 쥐새끼에 불과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저 촛불 너머의 존재가 무엇이든 간에 자신을 구해 줄 구원자는 오직 자신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신의 호의조차 영원할 수는 없었다.
‘반드시 살아서 나갈 거야.’
리에나는 안감에 장부를 꿰맨 옷자락을 힘주어 쥐었다.
‘아이들도 데리고 이 신전을 빠져나가서 평범하게 살 집을 찾을 거야.’
복도 저편에서 성기사들의 발소리가 다시금 울렸다. 황금으로 엮은 새장의 창살 너머로 보이지 않는 폭풍이 서서히 소용돌이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