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성녀인 줄 알았는데 신이 편애함

1화: 불꽃이 피기 직전
열기가 먼저 목덜미를 핥았다.
아직 장작에 불이 붙지도 않았는데 태양광장의 화형대는 한낮의 햇빛보다 뜨거웠다. 리에나는 등을 곧게 세우려다 밧줄에 눌린 손목을 보고 그만두었다. 손을 움직일 때마다 거친 삼실이 살을 파고들었다.
발밑에는 마른 장작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가장 위에는 기름을 먹인 천 조각이 놓여 있었다. 불을 붙이는 사람은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을 것이다.
리에나는 발끝을 아주 조금 안쪽으로 틀었다.
왼쪽 구두 굽 안에는 얇게 접은 장부 조각이 들어 있었다. 식량 창고에서 빠져나간 밀가루 자루의 수와 날짜가 적힌 종이였다. 그 종이만 있으면 자신이 사기꾼들에게 이용당한 심부름꾼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었다.
살아서 재판을 다시 받을 수 있다면.
그런데 살아서 내려갈 방법이 없었다.
광장 둘레를 막은 신전 경비들이 창을 세우고 있었다. 그 너머에는 구휼소에서 빵을 받아 가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누군가는 리에나를 보며 침을 뱉었고 누군가는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믿지 않는 얼굴이 가장 무서웠다.
“저 여자 때문에 아이들 몫까지 빼돌려졌다면서?”
“성녀님이 밝혀내지 않았다면 더 많은 사람이 굶었겠지.”
“불을 붙여. 거짓말쟁이의 혀는 오래 두면 또 사람을 홀린다.”
리에나는 그 말들 사이에서 익숙한 눈동자를 찾았다.
광장 북쪽 분수 뒤였다. 낡은 빨간 목도리를 두른 아이 하나가 돌기둥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 옆에 작은 머리 셋이 더 붙어 있었다. 거리에서 함께 지내던 아이들이었다.
오지 말라고 했는데.
리에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젯밤 빵을 나눠 주며 아침 광장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말했다. 아이는 손가락 사이에 그녀가 건넨 낡은 동전을 꼭 쥐고 있었다.
리에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도망쳐.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나?”
화형 집행관이 물었다. 그의 허리에는 불붙은 횃불이 걸려 있었다.
리에나는 집행관과 밧줄을 번갈아 살폈다. 밧줄은 세 겹이었고 발목의 쇠사슬은 장작 아래 고리에 연결되어 있었다. 이를 사용해 삼실을 끊을 수는 없었다. 장작을 무너뜨리면 잠깐 혼란이 생기겠지만 경비가 열 명도 넘었다.
시간을 버는 것만이 방법이었다.
“제가 정말 마지막 말을 할 수 있습니까?”
“허락된 시간 안에서라면.”
집행관의 시선이 관람석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대사제 오르덴 베르크가 앉아 있었다. 은발의 노인은 온화하게 웃고 있었지만 사람을 오래 바라보는 눈은 차가웠다. 그 옆에는 공식 성녀 셀레나 하르트가 있었다. 셀레나는 리에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손에 든 금빛 성물을 움켜쥐었다.
리에나는 군중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저는 식량을 훔치지 않았습니다.”
야유가 쏟아졌다. 누군가 던진 돌이 화형대 난간을 맞고 튕겨 나갔다.
“저는 창고 관리인에게 장부를 전달했을 뿐이에요. 밀가루 자루가 사라진 날의 기록도 있습니다.”
“죽기 싫어서 또 거짓말을 하는군!”
신전 관리가 소리쳤다. 그의 오른손에 낀 반지가 햇빛을 반사했다. 검은 유리 안쪽에 신전의 작은 태양 문양이 박혀 있었다.
리에나는 그 반지를 본 적이 있었다. 관리가 심문실에서 증인에게 조용히 내밀던 반지였다. 증인은 그것을 받은 뒤 리에나가 창고 열쇠를 훔쳤다고 진술했다.
“그 반지는 왜 끼셨습니까?”
“뭐라고?”
“증인에게 주던 것과 같은 반지잖아요. 벗어서 보여 주세요.”
관리는 손을 움켜쥐었다.
“죽을 때가 되니 눈에 보이는 것마다 죄를 뒤집어씌우는구나.”
“신의 이름으로 진실을 말하는 자리라면 못 벗을 이유도 없겠죠.”
경비 하나가 창대로 그녀의 어깨를 밀었다. 리에나의 무릎이 장작에 부딪혔다. 발목 안쪽에서 장부 조각의 모서리가 살을 찔렀다.
아직 들키지 않았다.
화형대 아래 검은 사제복을 입은 남자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백금발과 회색 눈이 햇빛 아래서 차갑게 빛났다. 그는 군중을 진정시키는 대신 관리의 손과 처형 승인 문서를 살폈다.
“집행 전 확인이 남았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정확했다.
오르덴이 부드럽게 웃었다.
“에단 부관. 이미 두 번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두 번째 확인은 증인 진술의 필체가 다르다는 이유로 중단됐습니다.”
“겁먹은 사람의 손은 흔들리는 법이지요.”
에단이라 불린 남자는 문서를 펼쳤다. 처형 승인에 필요한 붉은 인장이 있어야 할 자리는 깨끗했다. 대신 상단에 오르덴의 개인 문장이 찍혀 있었다.
“승인 절차가 생략됐습니다.”
“대사제의 명령은 절차보다 위에 있습니다.”
“그 명령이 문서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지금 남기면 됩니다.”
오르덴은 군중이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높였다.
“이 여자는 신성한 구휼을 훔치고 굶주린 이들의 몫을 팔았습니다. 더는 의심할 까닭이 없습니다.”
“의심은 죄가 아닙니다.”
에단의 시선이 리에나에게 닿았다.
“네가 말한 장부는 어디 있지?”
리에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말하면 경비들이 몸을 수색할 것이다. 장부 조각은 사라지고 아이들의 이름도 드러날 수 있었다. 자신이 창고에서 본 것을 알고 있는 아이들을 신전이 찾는 이유는 뻔했다.
“장부는 이미 압수됐습니다.”
리에나는 거짓말을 골랐다.
“하지만 그 안에 적힌 숫자는 기억합니다.”
“기억은 증거가 아니다.”
“반지는 증거가 될 수 있겠죠.”
그때 분수 뒤에서 작은 재채기 소리가 났다.
경비 하나가 고개를 돌렸다. 빨간 목도리의 아이가 돌기둥 뒤로 숨으려다 발을 헛디뎠다. 젖은 돌바닥 위로 작은 몸이 드러났다.
“저기 아이들이 있다!”
두 명의 경비가 분수 쪽으로 달려갔다. 아이들은 흩어지려 했지만 사람들이 빽빽하게 둘러서 있어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
리에나는 밧줄을 잡아당겼다.
“그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네가 시킨 대로 움직인 공범들이겠지.”
오르덴이 말했다.
“아이들을 데려오너라. 죄가 있다면 구휼을 베풀고 죄가 없다면 진실을 확인하면 된다.”
구휼이라는 말이 군중을 안심시켰다. 아이들을 잡아가는 명령이 보호처럼 들렸다.
리에나는 알았다. 신전의 지하 창고는 아이들이 사라지기 좋은 장소였다.
셀레나가 입술을 열었다.
“대사제님. 아이들은 처형장에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성녀님은 자비를 베풀고 싶으신 모양이군요.”
“자비가 아니라 규정의 문제입니다. 미성년자의 심문은 보호관 입회 아래 이루어져야 합니다.”
“물론이지요. 신전이 보호하겠습니다.”
셀레나의 손 안에서 금빛 성물이 떨렸다. 오르덴의 손가락이 팔걸이를 두 번 두드리자 그녀는 곧바로 시선을 내렸다.
리에나는 깨달았다. 여기서 자신을 구해 줄 사람은 없었다. 에단은 이상을 발견했지만 명령을 뒤집지 못했다. 셀레나는 아이들을 걱정했지만 대사제의 한마디에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해야 했다.
경비가 빨간 목도리의 아이에게 손을 뻗었다.
리에나는 힘껏 몸을 틀었다. 밧줄이 팽팽해지며 화형대의 낡은 난간이 삐걱거렸다.
“여기 봐!”
그녀가 소리쳤다.
“네가 찾는 장부는 여기 있어. 내가 삼킨 줄 알았으면 배부터 갈라 보든가!”
군중이 술렁였다. 관리의 얼굴에서 피가 빠졌다.
에단의 눈이 그녀의 구두로 내려갔다. 리에나는 그 시선을 알아차리고 발끝으로 장작을 걷어찼다.
마른 나무 하나가 굴러가 집행관의 발에 부딪혔다. 집행관이 균형을 잃었고 허리에 걸린 횃불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불꽃이 기름 먹인 천에 옮겨 붙었다.
화르륵.
불은 순식간에 퍼졌다.
“불을 꺼!”
집행관이 외쳤지만 경비들은 아이들을 붙잡으려 움직이는 중이었다. 군중은 뒤로 물러나며 서로를 밀쳤다. 비명과 욕설이 한꺼번에 터졌다.
리에나는 발을 더 세게 내리쳤다. 장작이 갈라지고 불길이 종아리를 향해 솟았다.
분수 옆에서 빨간 목도리의 아이가 경비의 손을 물었다. 경비가 욕을 내뱉으며 손을 휘둘렀다.
리에나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던졌다.
“안 돼!”
경비의 손이 아이의 머리 위로 내려가는 순간 리에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살려 달라고 말해야 했다.
자신을.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달랐다.
“제발 저 아이들만은 살려 주세요.”
불길이 발목을 스쳤다.
“제가 죽어도 괜찮아요. 저 아이들이 광장 밖으로 나갈 때까지만 아무도 붙잡지 못하게 해 주세요.”
누구에게 말하는지도 몰랐다. 신에게 기도한 적은 많았지만 답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빵 한 조각을 달라고 빌 때도 비가 그치게 해 달라고 빌 때도 하늘은 늘 같은 색이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멈출 수 없었다.
“부탁이에요.”
그 순간 광장의 모든 소리가 끊겼다.
사람들의 비명도 경비의 발소리도 불길이 타오르는 소리도 사라졌다. 리에나는 자신의 심장 뛰는 소리만 들었다.
그리고 하늘에서 금이 가는 소리가 났다.
쩌저적.
맑은 오후의 한가운데에 가느다란 선이 생겼다. 선은 곧 수직으로 벌어졌다. 푸른 하늘 너머에 또 다른 빛이 숨겨져 있었던 것처럼 눈부신 흰색이 광장 위로 쏟아졌다.
빛이 화형대를 덮었다. 불길은 그녀의 옷자락에 닿기 직전 멈췄다. 밧줄을 감싼 열기가 사라지고 손목을 조이던 삼실이 바닥으로 풀렸다.
분수 쪽에서는 경비들이 동시에 주저앉았다. 빨간 목도리의 아이는 아무에게도 붙잡히지 않은 채 돌기둥 뒤로 굴러갔다.
셀레나가 들고 있던 금빛 성물이 산산이 떨렸다. 에단은 문서를 놓치지 않으려 손가락을 굳게 세웠지만 회색 눈동자에는 처음 보는 것이 선명하게 비쳤다.
성물에서 나오는 빛이 아니었다.
오르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화한 얼굴이 처음으로 무너졌다.
“이건…….”
하늘의 균열에서 떨어진 빛은 불꽃을 삼키지 않았다. 불꽃의 가장자리를 따라 둥글게 번졌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타오르는 장작을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리에나는 풀린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한 일은 없었다. 주문도 성물도 없었다. 그저 아이들을 살려 달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하늘이 대답하고 있었다.
빛 속에서 희미한 향기가 퍼졌다. 불에 그을린 냄새 사이로 갓 꺾은 백합 같은 향이 섞였다. 흰빛의 조각 하나가 리에나의 눈앞을 천천히 스쳐 지나갔다.
리에나는 숨을 삼켰다.
“누구…… 누구예요?”
대답은 없었다.
대신 태양광장 위로 두 번째 균열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하늘 전체가 내려앉는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