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용병단, 장부 하나로 전장을 지배함

8화: 장부는 돌격을 허락하지 않는다
"칼을 거두십시오. 전면 돌격 대신 적의 숨통을 끊을 다른 길이 있습니다."
한스의 서늘한 목소리가 협곡의 찬 공기를 갈랐다.
이사벨라의 붉은 눈동자에 사나운 불꽃이 일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장검 손잡이를 바스러질 듯 옥죄었다. 검집 틈새로 새어 나온 붉은 검기가 진흙탕을 부글부글 끓어오르게 했다.
"한스. 네놈이 보급을 뚫고 밥을 지어 부대를 살린 공은 인정한다."
이사벨라가 한 걸음 다가섰다.
"하지만 작전 지휘는 내 권한이다. 본대 5천 명이 망령의 협곡에 갇혀 사흘 뒤면 몰살당할 위기다. 그런데 칼을 거두라고? 겁먹은 서기 놈 따위가 전장의 명예와 생사를 논하는 거냐?"
도열해 있던 병사들이 숨을 죽였다. 붉은 머리칼을 흩날리는 이사벨라의 서슬 퍼런 모습은 '피의 이사벨라' 그 자체였다.
하지만 한스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안경을 치켜올렸다.
"단장님. 전장의 명예는 살아남은 자가 장부에 전과를 기록할 때만 유효합니다. 시체가 된 150명의 용병에겐 명예가 아니라 매장 비용 장부만 남을 뿐입니다."
"기어코 내 칼에 목이 달아나고 싶어 작정했구나!"
이사벨라가 장검을 반 뼘쯤 뽑아 들었다. 서슬 퍼런 붉은 도신이 섬뜩한 빛을 뿜었다.
한스는 물러서지 않고 부러진 마차 파편을 집어 바닥의 마른 바위 표면에 거침없이 선을 그었다.
"제 목을 베기 전에 이 선이나 보십시오."
바위 표면에 그려진 것은 좁고 긴 회랑 형태의 단면도였다.
"망령의 협곡은 진입로 폭 15미터, 길이 4킬로미터에 양측 절벽 높이만 50미터입니다. 바르톡 대위님, 맞습니까?"
바르톡 대위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소. 안쪽은 마차 세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고 험하오."
한스가 돌멩이 하나를 입구에 놓았다.
"수송 마차 열두 대와 말, 보병 150명이 늘어서면 대열 길이만 300미터입니다. 선봉이 적을 벤들 좁은 통로에서 마차 행렬을 무슨 수로 지킵니까?"
이사벨라의 눈썹이 꿈틀했다. 한스는 바위 위를 깃발 끝으로 내리찍었다.
"절벽 위를 점거한 연합군 선봉대는 최소 2천입니다. 놈들이 절벽 위에서 낙석을 굴려 선두 마차 단 한 대만 부러뜨려도 뒤따르는 마차들은 멈춰 서야 합니다. 그 순간 300미터 행렬 전체가 바위 절벽 사이에 갇힌 독 안의 쥐가 됩니다."
한스의 망막 위로 푸른빛의 물류 연산 수치가 쉴 새 없이 점멸했다.
[전시 물류 직관 가동: 정면 돌파 시뮬레이션]
[예상 적 병력: 연합군 선봉대 2,100여 명]
[보급 마차 손실률: 100%]
[아군 전멸 확률: 95.8%]
[단장 개인 돌파 성공률: 23% (포위 고립 후 전사)]
"위에서는 불화살과 낙석이 쏟아지고 마차는 불타며 말들은 아군을 짓밟을 겁니다. 50미터 절벽 위의 적을 전부 벨 수는 없습니다. 이건 승률 4%짜리 자살 도박입니다. 제 장부는 그런 학살에 도장을 찍어줄 수 없습니다."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사벨라는 뽑아 들었던 장검을 멈춘 채 바위에 그려진 그림을 응시했다. 한스가 지적한 공간의 한계와 마차 행렬의 치명적 결함을 모를 리 없었다. 5천 명의 아군이 죽어간다는 조급함이 전황 판단을 가렸을 뿐이었다.
이사벨라의 턱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렇다면 본대 5천 명이 저 안에서 굶어 죽는 것을 손놓고 지켜보란 말이냐?"
"제가 언제 버린다고 했습니까? 정면으로 들이받지 않고 적의 숨통을 끊을 다른 길이 있습니다."
이사벨라가 검을 칼집에 쑤셔 넣었다.
"말해 봐라. 마차를 끌고 갈 다른 길이 어디에 있다는 거지?"
한스는 품에서 군용 지도를 펼쳐 망령의 협곡 서쪽으로 길게 뻗은 암벽 능선을 짚었다.
"여기입니다. 늑대 턱 능선."
바르톡 대위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늑대 턱 능선이라니! 거긴 해발 800미터에 경사 35도인 암벽길이오! 마차가 닿는 순간 뒤집혀서 계곡 아래로 곤두박질칠 게 뻔하오!"
가르크도 턱을 괴며 혀를 찼다.
"말도 버거운 돌길에 마차 열두 대를 끌고 가겠다고? 미친 짓이다."
"누가 마차를 끌고 간다고 했습니까? 마차는 버립니다."
한스의 단호한 선언에 이사벨라의 눈이 크게 뜨였다.
"마차를 버린다고? 그럼 식량은 어떻게 옮기겠다는 거냐?"
"원정 전 요새에서 표준 행군 포대를 왜 만들었겠습니까? 압축 건조 식재료로 규격화해 부피는 3분의 1, 무게는 절반 이하입니다."
한스는 계산기를 두드리듯 명확한 숫자를 짚었다.
"필요한 표준 포대는 총 450포대입니다. 말 서른일곱 필에 여덟 개씩 결속하면 296포대를 싣습니다. 남은 154포대는 단원 150명의 배낭에 하나씩 분산 적재합니다. 포대 하나의 무게는 고작 8킬로그램입니다."
가르크의 입이 떡 벌어졌다.
"8킬로그램……? 평소 메던 잡동사니 배낭은 25킬로그램이 넘었는데 고작 8킬로그램이라고?"
"그렇습니다. 마차를 버리고 전 병력을 경량 산악 기동 보급대로 전환하면 반나절 만에 늑대 턱 능선을 주파할 수 있습니다."
이사벨라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무거운 마차라는 고정관념을 지워버리자 험준한 산악 지형이 단숨에 고속 기동로로 변모했다.
"하지만……."
바르톡 대위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그렇게 능선을 넘는다 한들 우리가 가져가는 식량은 150명분 나흘 치요. 5천 명의 본대를 먹이기엔 턱없이 모자라지 않소?"
한스는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가진 짐으로 본대를 먹여 살린다고 말한 적 없습니다. 적의 식량으로 먹입니다."
"적의 식량이라고?"
이사벨라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한스는 망령의 협곡 북쪽 출구 인근의 버려진 폐광산 표시를 가리켰다.
"칼바위 터."
한스의 입술에서 낯선 지명이 흘러나왔다.
"연합군 선봉대 2천 명이 협곡 절벽 위에서 제국군 본대를 포위한 지 벌써 닷새째입니다. 2천 명의 군사가 이슬만 먹고 살 수는 없습니다. 하루에 소모되는 곡물만 최소 60포대, 화살과 투석용 자재도 막대합니다. 그렇다면 그 물자는 어디서 올까요?"
한스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전시 물류 직관 가동: 공급망 역추적]
[연합군 선봉대 일일 소비량: 곡물 3,000kg, 식수 4,000L]
[협곡 정상 수송 한계선: 반경 3km 이내 집하장 필수]
[유력 후보지: 폐광산 칼바위 터]
"협곡 정상은 바위투성이라 물자를 쌓을 수 없습니다. 비바람을 피할 전진 집하장이 반드시 필요한데 이 일대에서 그 조건을 만족하는 곳은 폐광산 칼바위 터뿐입니다."
바르톡 대위가 헛숨을 들이켰다.
"맞소……! 척후병들이 저 폐광산 주변에서 연합군 수송 마차가 오가는 것을 목격했다고 보고했었소!"
"연합군의 시선은 지금 온통 망령의 협곡 진입로에 쏠려 있습니다. 제국군이 정면으로 오기만을 기다리며 복병을 배치해 두었지요. 그렇다면 후방 창고의 경비는 어떻겠습니까?"
이사벨라의 입꼬리가 천천히 말려 올라갔다.
"경비가 허술하겠군. 놈들은 제국군이 마차를 끌고 협곡 정면으로 올 거라 확신하고 있을 테니까."
"칼바위 터 창고의 수비는 100명 안팎일 겁니다. 우리가 능선을 우회해 배후를 치면 창고는 한 시간 만에 무너집니다. 보급창이 털리는 순간 협곡 위의 적 2천 명은 고립됩니다. 식량이 끊기면 포위를 풀고 내려올 수밖에 없으니 본대의 포위는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풀립니다."
"그리고……."
이사벨라가 흥분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을 받았다.
"우린 칼바위 터 창고에 쌓인 적의 식량과 수레를 통째로 빼앗아 요새에 갇힌 5천 본대에게 먹이면 되는 거로군!"
"정확합니다. 적의 밥줄을 끊어 스스로 무너지게 만들고 그들의 창고를 털어 아군을 살리는 청구업자. 이것이 제가 제안하는 우회 보급로 작전입니다."
적의 숨통을 쥐고 흔드는 전략에 베테랑 용병들의 눈빛이 번뜩였다.
"크하하하!"
이사벨라가 허리를 젖히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허리춤의 장검을 뽑아 바닥에 깊숙이 꽂아 넣었다.
"장부쟁이 놈 뱃속에 악마가 앉아 있었군! 칼을 쓰는 건 나인데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적을 무너뜨릴 궁리를 하다니!"
그녀가 다가와 한스의 어깨를 묵직하게 쥐었다.
"좋다, 한스. 네 장부대로 움직인다! 계산이 맞다면 저 칼바위 터 창고에 있는 곡물과 보물은 전부 네 장부에 넘겨주마!"
"제 장부는 결코 오차를 내지 않습니다."
한스가 차분하게 답했다.
작전이 결정되자 블랙로즈의 움직임은 전광석화처럼 빨라졌다.
"마차에서 짐을 내려라! 표준 포대만 골라내서 말등에 얹어!"
가르크의 고함 속에 용병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미리 규격화해 둔 표준 행군 포대들이 말 안장에 단단히 결속되었다. 병사들은 각자의 배낭에 8킬로그램짜리 포대 하나씩을 넣고 끈을 조였다. 수송 마차 열두 대는 협곡 입구에 남겨졌다.
한스는 바르톡 대위를 불렀다.
"대위님과 부상병 여든 명은 이곳에 남아 주십시오. 젖은 장작과 풀을 모아 협곡 입구 서른 곳에서 연기를 피우십시오. 빈 솥을 두드리며 병사들이 밥을 짓고 출전을 준비하는 것처럼 소란을 피워 연합군의 시선을 협곡 입구에 묶어두는 겁니다."
바르톡의 눈이 번쩍 뜨였다.
"기만 작전이군요! 연기는 오늘 밤까지 끊이지 않게 피우겠소. 솥뚜껑 두드리는 건 우리 수송대의 전공이오!"
바르톡이 가슴을 탕탕 치며 결의를 다졌다.
모든 준비는 한 시간 만에 끝났다. 마차를 버리고 가벼운 군장만을 짊어진 블랙로즈 150명의 대열은 날렵하게 재편되었다.
"출발한다. 소리를 죽여라."
이사벨라의 나지막한 명령과 함께 붉은 장미 군단이 협곡 옆 바위 능선으로 발을 디뎠다.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늑대 턱 능선은 험준했다. 발밑에서는 자갈이 굴러떨어졌고 날카로운 바위가 솟아 있었다. 25킬로그램의 짐 대신 8킬로그램의 규격 포대만 짊어진 덕분에 병사들과 짐말의 발걸음은 가파른 비탈길에서도 경쾌했다.
[산악 기동 보급 대형 유지율: 98.2%]
[부대 행군 속도: 평지 대비 87% 달성]
[적 척후 감지 위험도: 0.8% (기만 연기 효과 발휘 중)]
한스는 장부를 든 채 대열 중앙에서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숨이 차올랐지만 안경 너머 그의 눈동자는 차갑게 빛났다.
능선의 가파른 고비를 넘어서자 차가운 산바람이 짙은 안개를 걷어냈다.
선두에 서 있던 가르크가 멈춰 서며 엎드렸다.
"저길 봐라……!"
이사벨라와 한스가 바위 그늘 아래로 몸을 낮췄다.
저 멀리 산자락 아래 분지에 버려진 폐광산 갱도 입구 주변으로 수십 채의 목조 막사와 수송 마차들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었다.
막사 울타리 위에는 연합군의 붉은 까마귀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수백 개의 거대한 곡물 포대와 화살 상자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는 모습이 한스의 망막에 또렷하게 잡혔다. 경비병들은 무기를 기대어 둔 채 하품을 하거나 모닥불가에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후방이라는 안도감에 취해 경계는 완전히 풀려 있었다.
이사벨라가 붉은 입술을 핥으며 검자루를 천천히 쥐었다.
"네 장부가 맞았군, 한스."
한스가 안경을 밀어 올리며 품에서 깃펜을 꺼내 들었다.
"이제 저 창고의 물자들을 우리 장부에 입고시킬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