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의 용병단, 장부 하나로 전장을 지배함

7화: 따뜻한 국물이 군대를 살린다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좁은 협곡은 거대한 진흙 구덩이로 변해 있었다.
수십 대의 수송 마차가 바위벽 사이에 뒤엉켜 있었다. 비를 머금어 두 배나 무거워진 거친 마포대가 차축을 짓눌렀고 곳곳에서 마차가 옆으로 뒹굴었다. 터진 포대 틈새로는 빗물에 갠 밀가루 반죽이 허옇게 흘러내렸다.
"비켜라! 내 마차부터 빼내야 해!"
"어딜 밀치는 거야! 우리 쪽 바퀴가 완전히 진흙에 박혔다고!"
제국 정규군 제7보급수송대와 선발 용병대의 병사들이 진흙탕 위에서 멱살을 잡고 나뒹굴었다. 비에 흠뻑 젖은 군복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덜덜 떨리는 입술 사이로 욕설과 비명이 뒤섞였다.
그 아수라장 너머로 물 한 방울 묻지 않은 청회색 방수포를 덮은 블랙로즈 용병단의 마차 행렬이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저, 저길 봐라!"
진흙탕에 주저앉아 있던 병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용병 놈들의 짐칸은 멀쩡하다!"
"마른 장작이다! 식량도 젖지 않았어!"
절망과 추위에 이성을 잃은 제국군 병사 수십 명이 블랙로즈의 선두 마차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무기도 쥐지 못한 손들이 마차로 뻗어 나왔다.
스릉-!
빗줄기를 가르는 파공음과 함께 서슬 퍼런 붉은 검기가 바닥을 길게 갈라놓았다.
콰아앙!
흙탕물이 치솟으며 달려들던 병사들의 발치에 깊은 도랑이 파였다.
"한 걸음만 더 다가오면 그 팔을 짐칸 대신 바닥에 묻어주마."
검을 비껴 쥔 이사벨라가 서늘한 살기를 뿜어냈다. 푸른 눈동자에서 번뜩이는 기세에 병사들이 기겁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블랙로즈의 짐에 손을 대는 자는 도적으로 간주해 즉결 처형한다. 물러서라!"
이사벨라의 호령이 협곡 바위벽을 쩌렁쩌렁 울렸다.
제국군 병사들이 뒤로 주춤거릴 때 한스가 안경을 밀어 올리며 차분한 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진흙탕에 처박힌 수송대 깃발 밑에서 사내 하나가 넋을 잃고 주저앉아 있었다. 어깨에 달린 금빛 견장이 진흙에 더럽혀진 채 흔들리고 있었다.
"당신이 제7보급수송대장입니까?"
사내가 초점 없는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렇소... 제국 정규군 보급대장 바르톡 대위요. 다 끝났소. 마차는 부러졌고 식량은 전부 썩었소. 병사들은 얼어 죽어가는데 우린 본대에 닿기도 전에 끝장이야..."
한스는 찢겨 나간 마포대 파편을 집어 들었다. 거친 올 사이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겉면에는 제국 제3병참청의 낡은 검인 도장이 찍혀 있었다.
"방수 처리도 하지 않은 3등급 마포대에 하중 허용치도 계산하지 않고 규격 미달의 차축을 쓴 마차군요. 군수국 제3병참청 놈들이 창고 구석에 썩어가던 폐기 대상 자재를 당신들에게 강제로 떠넘긴 겁니다."
바르톡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걸 어떻게...?"
"장부와 현장을 보면 모를 수가 없습니다."
한스는 품에서 방수 가죽으로 감싼 서류 한 장을 꺼냈다.
"대위님, 절망할 시간에 계산을 하십시오. 이대로 두면 당신 병사 300명 중 절반은 오늘 밤 저체온증과 탈진으로 사망합니다. 그리고 전방 본대는 보급품을 받지 못해 궤멸하겠지요. 당신은 군법재판에 넘겨져 사형당할 겁니다."
"살려... 살려주시오!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오!"
바르톡이 한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려 들었다. 한스는 깃펜과 인주를 내밀었다.
"우리가 가진 마른 장작과 식량을 불출하겠습니다. 단, 공짜는 아닙니다. 제국 군사규약 제14조에 의거한 '전장 긴급 보급 차용 계약서'입니다. 투입 물자와 인건비는 전방 도착 즉시 군수국 본청에 청구될 것이며 지금부터 협곡 통과 시까지 보급 전권은 제가 행사합니다. 서명하십시오."
바르톡은 서류를 따질 겨를도 없었다. 눈앞의 청년이 풍기는 기이할 정도의 냉정함과 확신만이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서명하겠소! 인장도 찍겠소! 살려만 주시오!"
바르톡이 떨리는 손으로 인장을 짓누르자 한스는 서류를 즉시 품에 넣었다.
"계약 체결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전원 제 지시를 따르십시오."
한스가 뒤를 돌아 가르크와 밀라를 향해 명령했다.
"밀라, 취사조 전원 배치! 가르크 조장님, 마차 네 대를 끌고 와 ㄷ자 방벽을 치십시오!"
가르크와 베테랑 용병들이 수송 마차 네 대를 협곡 모퉁이에 밀착시켜 비바람을 막는 ㄷ자 방벽을 구축했다. 마차 지붕과 바위 절벽 틈새에는 2등급 방수 천이 팽팽하게 걸렸다.
순식간에 비 한 방울 들이치지 않는 대형 간이 취사 공간이 완성되었다.
"장작 내려라! 화로 피워!"
가르크의 호령에 맞춰 마차 바닥 격자목 위에 보관되어 있던 바싹 마른 장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밀라와 취사조원들이 기름 묻힌 부싯깃에 불씨 통을 갖다 대자 탁탁거리는 소리와 함께 주황색 불꽃이 매섭게 피어올랐다.
연기가 천막 틈새로 빠져나가며 따뜻한 열기가 취사 공간을 채웠다.
진흙 바닥에서 떨던 제국군 병사들이 온기를 느끼고 넋을 잃은 채 몰려들었다.
"차례를 지켜라!"
가르크가 몽둥이를 들고 서서 질서를 잡았다.
"보급관님 말씀 못 들었어? 줄 서라, 줄!"
한스는 대형 무쇠솥 세 개를 화로 위에 걸도록 지시했다.
"밀라, 빗물을 그대로 끓이지 마십시오. 활성탄과 모래를 채운 정수 통을 통과시켜 찌꺼기를 걸러낸 뒤 솥에 부으십시오."
"네, 보급관님!"
밀라가 통나무 정수기를 연결했다. 검은 숯과 모래를 거쳐 나온 물은 놀랍도록 맑고 투명했다. 솥 아래에서 타오르는 불길에 물이 순식간에 끓어오르며 하얀 김을 토해냈다.
"식사 전에 온수부터 배출합니다. 1인당 반 바가지씩 반드시 뜨거운 김을 불어가며 마시게 하십시오."
제국군 병사 하나가 떨리는 양손으로 나무 바가지를 받아 들었다. 김이 피어오르는 뜨거운 물이었다.
꿀꺽, 꿀꺽.
온수가 얼어붙어 있던 식도를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파랗게 질려 있던 병사의 뺨에 붉은 핏기가 돌았다.
"사, 살았다..."
병사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몸에 피가 돌아...!"
곳곳에서 흐느낌과 탄성이 터져 나왔다. 추위 속에서 흙탕물을 마셨다간 곧바로 복통과 이질이 번져 부대가 무너진다. 한스는 끓인 온수로 체온을 끌어올리는 동시에 수인성 전염병의 싹을 잘라냈다.
체온을 되찾은 병사들에게 진정한 기적이 배달되었다.
"썩은 밀가루 포대는 전부 버려라! 곰팡내 나는 걸 먹었다간 내일 관짝에 들어간다!"
한스의 지시에 제7수송대 병사들은 물 먹은 밀가루 반죽을 도랑에 처박았다.
그 대신 한스는 블랙로즈의 마차에서 청회색 방수 천에 싸인 표준 행군 포대들을 내왔다. 포대 매듭을 풀자 볶아낸 귀리가루와 말린 콩가루 그리고 얇게 저민 염장육 꾸러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빗속에서도 단 한 톨 눅눅해지지 않은 완벽한 건조 상태였다.
"솥 하나당 표준 포대 세 개 분량을 넣어라! 소금 두 주먹에 말린 허브 한 줌 추가!"
밀라와 취사조원들이 주걱으로 솥을 힘차게 저었다.
부글부글 끓는 물에 가루가 풀리고 염장육이 녹아들자 구수하고 짭조름한 고기 냄새가 협곡에 진동했다.
"고기죽이다! 진짜 고기 냄새야!"
병사들의 눈빛이 맹수처럼 번뜩였다.
"전원 식판을 들어라! 배식 시작한다!"
걸쭉한 귀리 염장육 죽이 병사들의 그릇에 담겼다. 한 숟가락 입에 넣은 병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귀리의 고소함과 염장육의 감칠맛 그리고 추위를 날려버리는 소금기가 혀를 강타했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죽은 처음 먹어봅니다!"
바르톡 대위 역시 그릇에 코를 박고 허겁지겁 죽을 들이켰다. 뜨거운 국물이 뱃속을 든든하게 채우자 잃어버렸던 군인의 기운이 솟구쳐 올랐다.
[전시 물류 효과 적용: 체온 회복률 98.7%]
[아군 및 수송대 사기: 절망 상태에서 급상승]
[예상 전염병 발생률: 0.2% 미만으로 억제]
한스는 장부에 숫자를 적었다. 표준 포대는 수분을 날려 압축했으나 끓는 물을 만나면 세 배 이상 불어나며 필수 열량과 염분을 즉각 공급했다. 적은 물자로 300명을 먹여 살린 비결이었다.
가르크가 땀을 닦으며 다가왔다.
"서기 놈아. 저 제국군 놈들 꼴 좀 봐라. 평소엔 우릴 용병 똥개라고 거들먹거리더니 지금은 네 발밑에 엎드릴 기세다."
"배고픈 사람에게 자존심은 재고 목록에 없습니다. 배를 채워줬으니 이제 값을 치르게 해야지요."
몸을 말린 병사들은 더 이상 오합지졸이 아니었다.
"식사를 마친 인원은 전원 연장을 들어라! 부러진 마차를 해체한다!"
한스의 지휘 아래 작업이 시작되었다. 차축이 부러진 마차 여섯 대가 해체되어 땔감과 받침목으로 쪼개졌다. 멀쩡한 마차 열두 대에 남은 보급품을 균등하게 싣자 바퀴가 더는 진흙에 빠지지 않았다.
"밀어라! 하나, 둘, 셋!"
300명의 군단이 달라붙자 협곡을 막고 있던 마차들이 길 한쪽으로 빠져나갔다. 마침내 좁은 협곡 통로가 시원하게 뚫렸다. 빗줄기가 점차 잦아들며 구름 사이로 빛이 내리쬐었다.
"길이 열렸다!"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바르톡 대위가 이사벨라와 한스 앞에 서서 경례를 붙였다.
"용병단장님 그리고 한스 보급관님. 여러분이 아니었다면 우린 전멸했을 것입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이사벨라가 장검을 검집에 넣으며 씩 웃었다.
"감사는 우리 보급관의 장부에나 표해라. 우린 계약대로 움직였을 뿐이니까."
그때 바르톡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품에서 구겨진 전령용 통신 깃발을 꺼냈다.
"하지만 안도할 틈이 없습니다. 전방 능선 최전선의 상황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이사벨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본대 쪽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연합군의 선봉 기동대가 북부 능선 요충지인 망령의 협곡을 우회해 제국군 주력 부대의 퇴로와 보급선을 틀어막았습니다. 본대는 지금 식수도 식량도 없이 바위 요새에 고립되었습니다. 사흘 안에 보급이 닿지 않으면... 5천 명의 전선이 무너집니다!"
바르톡의 보고에 이사벨라의 붉은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그녀는 검자루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5천 명이 고립되었다고? 그렇다면 지체할 시간이 없다! 전 부대, 속도를 올려 망령의 협곡을 정면 돌파한다! 적의 포위망을 단칼에 베어 넘기고 본대와 합류한다!"
이사벨라의 투지가 폭발하며 명령이 떨어졌다. 단원들이 함성을 내지르려는 찰나 한스가 장부를 덮으며 앞을 가로막아 섰다.
"안 됩니다."
차가운 한마디가 협곡의 열기를 얼려버렸다.
"뭐라고?"
이사벨라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한스, 아군 5천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 내 칼로 포위망을 뚫으면 그만이다!"
"단장님의 칼로 적 열 명은 벨 수 있어도 5천 명의 식량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적이 노리는 건 바로 그 정면 돌격입니다. 좁은 협곡으로 돌진하는 순간 낙석과 화살에 보급 마차는 전멸하고 우리 또한 굶어 죽는 짐짝이 될 뿐입니다."
한스의 안경 너머 날카로운 눈빛이 이사벨라의 붉은 눈동자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칼을 거두십시오. 전면 돌격 대신 적의 숨통을 끊을 다른 길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