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후 이혼 도장부터 찍었습니다

3화: 짐은 내가 챙깁니다
개인 금고의 자물쇠는 아리아드네의 손끝을 기억하고 있었다.
작은 은열쇠가 세 번 돌아가자 묵직한 문이 안쪽으로 밀렸다. 겨울 햇빛이 닿지 않는 방 안에는 보석 상자와 문서함과 향낭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전생의 그녀는 이곳을 볼 때마다 안심했다. 펠른의 이름으로 받은 것들이 자신을 지켜 줄 거라 믿었다.
이제는 알았다.
남의 이름이 새겨진 금은 결국 남의 족쇄가 된다.
"아리아드네 님. 이건 정말 두고 가실 건가요?"
마리가 진주 목걸이가 든 상자를 들고 물었다. 알알이 고른 진주는 빛이 좋았다. 결혼식 뒤 황태자비가 보낸 축하 예물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상자 뚜껑 안쪽을 보았다. 펠른의 사자 문장이 작게 새겨져 있었다.
"두고 가."
"하지만 선물로 들어온 물건이잖아요."
"펠른 공작부인에게 온 선물이지. 내게 온 게 아니야."
그녀는 상자를 닫아 붉은 끈으로 묶었다. 끈 위에는 공작가 재산 반환 목록 첫 줄이 붙었다.
펠른 진주 목걸이. 공작가 예물실 귀속.
마리는 못내 아쉬운 얼굴이었다. 아리아드네는 웃지 않았다.
"비싼 것을 버리는 게 아니야. 나중에 내 발목을 잡을 이름표를 떼어 놓는 거지."
그 말에 마리는 상자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아리아드네가 챙긴 것은 많지 않았다. 헤스티아 백작가에서 혼인 전 가져온 작은 루비 브로치. 유모가 몰래 쥐여 주었던 금화 주머니. 자신의 명의로 운용한 항구 소형 지분 증서와 환어음 세 장.
그리고 얇은 검은 장부 한 권.
그 장부에는 공작가의 빚이 아니라 그녀의 수익이 적혀 있었다. 카일론의 이름을 빌리지 않고 차곡차곡 굴린 돈이었다. 전생에는 급한 불을 끄느라 모두 공작가에 밀어 넣었던 씨앗이었다.
이번에는 씨앗으로 남겨 둘 생각이었다.
항구 지분은 작아도 현금 흐름이 있었다. 환어음은 하루 안에 골드로 바꿀 수 있었다. 낡은 상점 하나를 얻고 간판 하나를 새로 걸기에는 충분했다.
아리아드네는 검은 장부를 가장 안쪽 상자에 넣었다.
"마리. 네 물건도 이 상자에 넣어."
"제 건 많지 않아요."
"그래도 네 거야. 누구에게도 허락받지 않아도 되는 물건부터 챙겨."
마리는 잠시 멈춰 섰다. 그러고는 낡은 리본과 작은 기도서와 동전 지갑을 꺼내 천천히 넣었다.
아리아드네는 개인 보석함에 신전 봉인을 붙였다. 봉인을 떼면 흔적이 남는 은빛 종이였다. 금고 문 옆 탁자에는 남기는 물건 목록과 가져가는 물건 목록을 나누어 놓았다.
바로 그때 복도에서 낮은 헛기침이 들렸다.
"전 공작부인."
집사 헤런이었다. 그는 평소보다 더 꼿꼿하게 서 있었다. 옆에는 수석 시녀 베라가 얇은 미소를 걸고 있었다.
"공작가 재산 확인을 위해 짐을 열어 보아야겠습니다."
아리아드네는 문턱 앞에서 그를 바라보았다.
"확인은 목록으로 하세요."
"목록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펠른의 진주 목걸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마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베라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어제까지 부인께서 쓰시던 목걸이입니다. 혹시 실수로 개인 짐에 들어갔을지도 모르지요."
실수.
아리아드네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흠집을 남기려는 것이다. 공작가의 귀중품을 들고 도망친 이혼녀라는 말은 사교계에 퍼지기 쉽다.
"마리. 반환 목록 세 번째 장."
마리가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넘겼다.
아리아드네는 종이를 받아 헤런 앞에 내밀었다.
"펠른 진주 목걸이는 예물실 대여품입니다. 혼인 다음 날 예물실에서 대출 처리됐고 반납 예정일은 오늘입니다. 보관 위치는 금고 왼쪽 선반 둘째 칸. 봉인 번호까지 적혀 있어요."
헤런의 눈썹이 흔들렸다.
"그런 기록은 제가 확인한 바 없습니다."
"집사님이 확인하지 않은 것이 기록이 없다는 뜻은 아니죠."
아리아드네는 금고 안으로 들어가 왼쪽 선반 둘째 칸의 상자를 꺼냈다. 붉은 끈과 봉인은 손대지 않은 채였다.
"보세요. 봉인도 그대로입니다."
베라의 미소가 사라졌다. 헤런은 상자를 받아 들었지만 바로 열지 못했다. 봉인을 뜯는 순간 거짓 보고의 책임이 자기에게 돌아오기 때문이었다.
"전 공작부인께서 예민하게 받아들이시는군요."
"아니요. 정확하게 받아들이는 겁니다."
아리아드네는 가져가는 물건 목록을 한 장 더 내밀었다.
"제 짐은 신전 봉인으로 닫습니다. 공작가가 의심한다면 신전 서기관 앞에서 여세요. 그 자리에서 누락된 물건이 나오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대신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면 허위 고발로 기록해 주세요."
헤런의 입이 닫혔다.
마리는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헤런을 향해 한 걸음 앞으로 섰다.
"제가 봉인을 보았습니다. 아리아드네 님께서는 공작가 물건을 손대지 않으셨습니다."
베라가 싸늘하게 마리를 보았다.
"너는 아직 펠른의 시녀다."
"오늘 급여 정산이 끝나면 아닙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분명했다.
아리아드네는 마리를 돌아보았다. 두려움이 남아 있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뒤로 물러서지는 않았다.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멈췄다.
카일론이 서 있었다.
그는 상자와 봉인과 서류를 한 번에 훑었다. 상황을 이해하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은 듯했다.
"소란스럽군."
헤런이 고개를 숙였다.
"공작가 재산 확인 중이었습니다."
"확인이라기보다 덫에 가깝네요."
아리아드네가 말했다.
카일론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네가 떳떳하다면 문제 될 것 없지 않나."
"그래서 문제 되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신전 봉인을 붙였고 목록도 남겼어요."
그녀는 보석 상자를 닫았다.
"공작님께서 원하신 확인 절차는 끝났습니다. 이제 비켜 주세요."
카일론은 움직이지 않았다.
"사흘은 머문다고 했다."
"사흘 안에 떠난다고 했죠. 오늘 끝나면 오늘 떠납니다."
"장부 인수인계가 남았다. 공작가 살림은 네가 가장 잘 안다."
그 말이 복도에 떨어지는 순간 하인들의 시선이 바닥으로 내려갔다.
아리아드네는 천천히 카일론에게 다가갔다. 손에는 얇은 회색 서류철이 들려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카일론은 받지 않았다.
"이게 전부인가?"
"이번 달 하인 급여일. 북부 운송조합 이자 납부일. 벨리온 은행 담당자의 이름. 식료품상과 마차 관리인의 미지급 잔액. 제가 무료로 넘길 수 있는 정보는 여기까지입니다."
"무료?"
카일론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저는 더는 공작부인이 아닙니다. 제 노동이 필요하다면 계약서를 쓰고 보수를 제시하세요."
헤런이 숨을 삼켰다. 베라의 눈이 커졌다.
카일론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아리아드네를 보았다.
"너는 이 집을 네 손으로 무너뜨리고 싶은 건가?"
"아니요. 제가 떠났을 뿐입니다."
아리아드네는 서류철을 가까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무너지느냐 버티느냐는 공작가의 몫이에요. 원래도 그래야 했고요."
카일론의 눈이 서류철 위에서 멈췄다. 얇은 종이 몇 장뿐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당장 오늘 저녁 주방에 지급해야 할 식료품값과 내일 아침 하인들에게 줄 급여와 열흘 뒤 닥칠 은행 담당자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그는 그제야 침묵했다.
공작가의 품위가 식탁 위 은촛대에서 시작된다고 믿던 남자였다. 그러나 은촛대에 불을 붙이는 초와 그 초를 사 오는 돈과 돈이 빠져나가는 날짜를 그는 알지 못했다.
아리아드네는 손목에서 은빛 팔찌를 풀었다. 결혼식 날 카일론이 채워 주었던 팔찌였다. 안쪽에는 펠른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그녀는 팔찌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어 허리춤의 열쇠 꾸러미를 풀었다. 식료품 창고. 예물실. 안주인의 서재. 하인 급여 금고.
쇠붙이들이 부딪히며 차가운 소리를 냈다.
"공작부인의 열쇠입니다. 이제 주인이 필요하겠네요."
카일론은 열쇠를 보았다. 그 열쇠들이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얼굴이었다.
아리아드네는 더 기다리지 않았다.
"마리. 가자."
현관에는 작은 짐마차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실린 것은 상자 세 개와 옷가방 둘뿐이었다. 펠른 공작가에서 세 해를 버틴 여자가 가져가기에는 우스울 만큼 적은 짐이었다.
하지만 아리아드네에게는 충분했다.
현관 기둥 사이로 베라가 따라 나왔다.
"공작부인."
아리아드네가 멈췄다.
베라는 습관처럼 허리를 굽혔다.
"정말 이대로 나가시면 돌아오기 어려우실 겁니다."
"호칭부터 틀렸어요."
아리아드네는 차분하게 말했다.
"저는 더는 공작부인이 아닙니다."
베라의 얼굴이 굳었다.
뒤에서 카일론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리아드네."
이번에는 분노보다 낯선 빈틈이 섞여 있었다. 그녀가 뒤돌아보면 무언가 말할 준비를 한 얼굴일지도 몰랐다.
아리아드네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돌아봐 주는 시간에 익숙했다. 대답을 기다려 주는 침묵에 익숙했다. 오늘부터 그 시간은 사라졌다.
마리가 먼저 마차 문을 열었다. 아리아드네는 발판에 올라섰다.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쳤다.
저택의 높은 문이 열렸다.
바깥길에는 눈이 얇게 쌓여 있었다. 마차 바퀴가 첫 자국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때 정문 너머에서 다른 마차 한 대가 급히 다가왔다. 문장 깃발이 겨울바람에 흔들렸다.
흰 백합과 금빛 방패.
헤스티아 백작가의 문장이었다.
마리가 작게 숨을 들이켰다.
"아리아드네 님. 백작가 마차예요."
아리아드네는 창밖을 보았다. 전생에는 그 문장을 볼 때마다 도망칠 곳을 찾았고 결국 어디에도 숨지 못했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는다.
"멈추지 마."
마부가 망설였다.
아리아드네는 더 또렷하게 말했다.
"내 길을 막는 마차가 있다면 비켜서게 만들면 돼."
헤스티아의 마차가 정문 앞을 가로막았다.
아리아드네는 검은 장갑을 천천히 끼었다.
공작가의 문밖으로 나왔을 뿐이었다.
끊어야 할 목줄은 아직 하나 더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