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후 이혼 도장부터 찍었습니다

2화: 3년의 지옥, 끝이다
카일론이 나간 뒤에도 문손잡이는 한동안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리아드네는 창가에 선 채 그 금빛 손잡이를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그녀의 앞에서 이혼 서류를 찢으려던 손이었다.
카일론이 멈춘 이유는 단 하나였다. 붉은 장부라는 말이 공작가의 허울보다 더 무거웠기 때문이다.
"부인."
등 뒤에서 마리가 숨을 죽인 채 불렀다.
"정말 장부가 있는 건가요?"
아리아드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있어. 그리고 내일 아침이면 더는 숨길 수 없게 될 거야."
마리는 불안한 얼굴로 문을 보았다.
"공작님께서 사람을 붙이시면 어떡해요? 지하 금고는 기사들이 지키잖아요."
"금고를 지키는 사람은 금고 안의 모든 것을 알지 못해."
전생에 아리아드네는 수석 회계사의 장례를 치른 뒤에야 붉은 장부를 손에 넣었다. 늙은 회계사는 마지막 순간까지 공작가를 살릴 방법을 찾았다. 그러나 그가 남긴 것은 충성의 기록이 아니라 오래된 거짓의 기록이었다.
혼인 전부터 시작된 차입금. 담보로 넘긴 영지의 수익. 그리고 아리아드네의 지참금이 들어오면 급한 이자부터 막으라는 지시.
그때의 그녀는 그 장부를 덮고 공작가를 살릴 궁리부터 했다.
그 선택이 세 해의 지옥을 만들었다.
아리아드네는 책상 위의 촛불을 껐다.
"마리. 지금 신전에 사람을 보내. 계약 서기관을 내일 아침 첫 종이 울리기 전에 모셔 와 달라고 해."
"신전 서기관이요?"
"혼인 계약의 위반을 확인할 사람이 필요해. 내 이름으로 요청했다고 전해."
마리가 망설였다.
"백작가에 먼저 알리지 않아도 괜찮으세요?"
아리아드네는 마리를 돌아보았다.
"내 혼인을 끝내는 일에 친정의 허락은 필요 없어."
단정한 목소리였다. 마리는 잠시 입술을 깨물더니 고개를 깊이 숙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직접 다녀올게요."
마리가 나간 뒤 아리아드네는 검은 망토를 걸쳤다.
지하 금고로 내려가는 계단은 차갑고 가팔랐다. 벽에 걸린 마력등이 걸음을 따라 희미하게 켜졌다. 전생에는 이 길 끝마다 해결해야 할 장부와 청구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하나만 찾으면 됐다.
금고 안쪽 세 번째 선반에는 값비싼 와인과 봉인된 문서 상자가 줄지어 있었다. 아리아드네는 망설임 없이 가장 아래의 검은 상자를 밀어 냈다.
뒤쪽 벽돌 하나가 손바닥만큼 안으로 들어갔다.
벽돌을 누르자 낮은 마력음이 울렸다. 선반 뒤가 손가락 하나 들어갈 만큼 열렸다. 그 좁은 틈에서 그녀는 붉은 가죽 표지의 장부를 꺼냈다.
표지는 오래된 피처럼 어두웠다.
아리아드네는 금고 바닥에 앉아 첫 장을 펼쳤다. 북부 운송조합. 벨리온 은행. 페르마 항구 세관 보증금.
익숙한 이름들이 빽빽한 숫자 사이에 박혀 있었다.
장부 중간에는 두꺼운 계약서가 실로 묶여 있었다. 대출 갱신 문서의 마지막 장에 펠른 공작가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카일론의 서명은 없었다.
그러나 그가 공작이 된 뒤에도 같은 인장이 계속 쓰였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적어도 공작가가 빚을 몰랐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아리아드네는 다음 장을 넘겼다.
헤스티아 영애의 지참금 수령 즉시 북부 운송조합 이자분을 우선 정산할 것.
손끝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그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의 자신이 떠올랐다. 하늘이 무너진 듯했지만 그녀는 그 문장을 찢지 않았다. 언젠가 카일론이 자신의 노력을 알아줄 것이라 믿었다.
참으로 어리석었다.
아리아드네는 장부와 문서를 품에 안고 일어섰다.
이번에는 누군가의 빚을 대신 갚지 않는다.
다음 날 아침 응접실에는 차가 식기도 전에 카일론이 와 있었다.
검은 제복 대신 짙은 회색 정장을 입은 그는 밤을 거의 새지 않은 얼굴이었다. 피곤한 기색마저 감추려 했지만 눈 밑에 드리운 옅은 그늘은 어쩌지 못했다.
그는 아리아드네가 들어서자 의자에서 일어났다.
"어젯밤 일은 없던 일로 해라."
아리아드네는 맞은편 자리에 앉지 않았다. 탁자 중앙에 붉은 장부를 내려놓았다.
"그 말은 장부를 읽고 하세요."
카일론의 눈빛이 표지에 닿았다. 아주 잠깐 그의 턱선이 굳었다.
"어디서 손에 넣었지?"
"공작가 금고에서요. 들어 있는 문서도요."
"그곳은 네가 함부로 열 곳이 아니다."
"제 지참금을 함부로 갚을 곳도 아니었죠."
카일론이 장부를 열었다. 페이지를 넘기는 손길은 침착했지만 종이를 누르는 엄지에 힘이 들어갔다.
아리아드네는 그가 해당 장에 다다를 때까지 기다렸다.
"혼인식 이틀 전 기록이에요. 제 지참금이 들어오면 운송조합 이자부터 갚겠다는 지시가 적혀 있죠."
"수석 회계사의 메모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건 뭔가요?"
그녀는 실로 묶인 갱신 문서를 꺼내 펼쳤다. 밀랍 위에 찍힌 펠른의 사자 문장이 아침빛 아래 선명했다.
"혼인 전에 체결된 대출 갱신서예요. 채무를 고지하지 않은 채 제 지참금을 상환 재원으로 잡았고 공작가 인장으로 승인했어요."
카일론의 시선이 문서와 아리아드네 사이를 오갔다.
"내가 직접 지시한 일이 아니다."
"그 말이 제게 무슨 위로가 되죠?"
아리아드네의 목소리는 낮았다.
"공작님은 몰랐다는 이유로 제 돈을 당연히 쓰셨고 저는 알아도 공작가를 살렸어요. 그 결과가 바뀌지는 않아요."
카일론은 문서를 내려놓았다.
"아리아드네. 넌 지금 화가 나서 판단을 그르치고 있다. 공작부인이라는 자리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이러는 건가?"
"잘 알아요."
그녀는 한 걸음 다가갔다.
"제가 원하는 것은 한 번도 손에 넣지 못하고 제가 가진 것만 끝없이 내놓아야 하는 자리였죠."
"헤스티아 백작가도 네가 이혼녀가 되는 걸 반기지 않을 텐데."
"그들이 반긴 적 있는 선택을 할 생각이 없어요."
카일론의 눈매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렇게 나가서 뭘 할 수 있지? 네가 누린 것들은 모두 펠른의 이름 덕분이다."
아리아드네는 잠시 침묵했다.
그 말은 전생의 그녀를 가장 오래 묶어 둔 사슬이었다. 자신의 수완으로 계약을 따내도 펠른의 이름 덕이라 들었다. 밤새 숫자를 맞춰 위기를 넘겨도 공작부인이 해야 할 일이라 들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더 잘하면 인정받을 거라고 믿었다.
"그 이름 없이도 제가 누구인지 알게 될 거예요."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마리가 문을 열자 회색 신전복을 입은 여자가 들어왔다. 은빛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이벨라는 가슴에 계약의 신을 뜻하는 작은 저울 문장을 달고 있었다.
"펠른 공작부인께서 요청하신 계약 서기관 이벨라입니다."
카일론의 시선이 아리아드네에게 꽂혔다.
"신전까지 끌어들였나."
"어제 선택할 시간을 드렸어요. 공작님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죠."
이벨라는 두 사람에게 짧게 예를 갖춘 뒤 탁자로 다가왔다. 아리아드네는 혼인 계약서와 붉은 장부 그리고 대출 갱신 문서를 차례로 내놓았다.
"혼인 전 채무 고지 조항 위반을 확인해 주세요."
서기관은 계약서 제칠 조항을 읽었다. 이어 장부의 날짜와 갱신서의 인장을 오래 살폈다. 응접실에는 종이 넘기는 소리만 남았다.
마침내 이벨라가 고개를 들었다.
"혼인 성립 전의 채무가 상대 배우자에게 고지되지 않았고 그 배우자의 지참금을 상환 재원으로 삼으려 한 기록이 확인됩니다. 계약 위반 사유로 접수할 수 있습니다."
카일론의 입가가 굳었다.
"접수만 가능하다는 말이군. 그것만으로 혼인이 끝나는 건 아니지 않나."
"당사자 두 분의 인장이 있으면 오늘 해소 기록을 남길 수 있습니다. 공작님께서 거부하신다면 위반 심리로 넘어갑니다."
이벨라의 목소리는 감정 없이 고요했다.
"심리가 열리면 해당 장부와 대출 문서는 신전 금고에 보관되고 채권자에게도 사실 확인 절차가 통지됩니다."
카일론의 눈빛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열흘 뒤 상환일을 앞둔 가문이었다. 채권자들이 공작가의 숨은 빚을 알게 되면 약정 연장은 끝이다. 귀족가의 체면보다 신용이 먼저 무너질 터였다.
카일론이 갑자기 장부를 집어 들었다.
그가 벽난로를 향해 몸을 돌리는 순간 아리아드네는 움직이지 않았다.
"태우셔도 돼요."
카일론이 멈췄다.
아리아드네는 이벨라의 손에 들린 봉인 서류를 바라보았다.
"장부를 찾기 전에 필요한 장은 전부 옮겨 적었어요. 서기관님께 드린 사본에는 제 서명과 증인 서명이 있어요. 원본을 없애면 증거 인멸까지 기록될 뿐이에요."
마리는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이벨라는 사본을 품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론의 손에 든 장부가 천천히 내려왔다.
아리아드네는 이혼 서류를 그의 앞에 밀었다.
"저는 위자료를 요구하지 않아요. 대신 제 지참금과 개인 명의 수익을 돌려받고 공작가의 채무에서는 빠지겠습니다."
"그게 네가 원하는 전부인가?"
"아니요."
그녀는 카일론을 똑바로 바라봤다.
"제게서 당연하게 빼앗아 간 시간을 끝내는 게 제가 원하는 전부예요."
카일론의 얼굴에서 분노가 사라졌다. 대신 그녀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선 눈빛이 남았다.
아리아드네는 그 눈빛에 아무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다.
그가 마침내 책상 서랍을 열었다. 펠른 공작가의 인장이 손바닥 위에 놓였다.
"후회하게 될 거다."
"이미 충분히 했어요."
카일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이혼 서류의 마지막 장에 밀랍을 떨어뜨렸다. 붉은 밀랍이 굳기 전 인장이 내려왔다.
사자의 문장이 종이 위에 깊게 찍혔다.
아리아드네는 그 작은 소리를 들었다.
목을 죄던 사슬이 끊어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이벨라는 두 사람의 인장을 확인하고 신전의 은빛 봉인을 더했다.
"제국력 712년 12월 4일부로 두 분의 혼인 해소를 기록합니다. 정식 등본은 해 질 무렵 각 가문에 전달될 것입니다."
카일론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리아드네는 처음으로 길게 숨을 내쉬었다. 가슴이 비어야 할 자리에 차가운 겨울 공기가 들어찼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숨쉬기가 쉬웠다.
"사흘 뒤 저택을 떠나겠습니다."
카일론이 고개를 들었다.
"재산 정리는 공작가의 집사가 확인한다. 네가 멋대로 가져갈 수는 없어."
"확인하세요."
아리아드네는 미리 준비한 목록을 탁자 위에 놓았다.
"혼인 전 제 명의였던 보석과 지참금 잔액. 혼인 뒤 제가 개인 명의로 운용해 얻은 수익. 제 옷과 책 그리고 제 시녀의 물건뿐이에요. 펠른 공작가의 은수저 하나도 가져가지 않겠습니다."
카일론이 목록을 훑었다. 그가 예상했던 탐욕도 미련도 거기에는 없었다.
"마리."
아리아드네는 문가에 선 시녀를 불렀다.
"너는 오늘 안에 정해. 나와 함께 나가도 되고 이곳에 남아도 돼. 어느 쪽이든 네게 필요한 추천장과 급여는 챙겨 줄게."
마리의 눈가가 붉어졌다.
"저는 부인과 가겠습니다. 아니요. 아리아드네 님과 가고 싶어요."
아리아드네는 잠시 마리를 바라봤다. 누군가가 자신의 곁에 남겠다고 말했는데도 두려움보다 고마움이 먼저 느껴졌다.
"그래. 그럼 함께 준비하자."
그녀는 더는 카일론을 돌아보지 않고 응접실을 나왔다.
복도 끝에는 개인 금고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었다. 손안에는 아직 금고 열쇠가 쥐어져 있었다.
공작부인으로 살던 세 해는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공작가의 물건이 아닌 자신의 것을 챙기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