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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한 남편이 예언을 속이려 나를 미워한 줄 몰랐다14화

무정한 남편이 예언을 속이려 나를 미워한 줄 몰랐다

무정한 남편이 예언을 속이려 나를 미워한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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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뺨의 연극

이른 아침 골목 안개 속으로 인쇄소 심부름꾼이 먼저 달려 나갔다.

라일라가 밤새 써 내려간 두 장의 서신이었다. 별궁의 마르타 부인과 동문 의원장에게 보낸 경고였다. 정화 위탁이라는 이름으로 사본의 보관인과 주소를 캐물으러 올 자들이 있으니 문을 굳게 걸어 잠그라는 내용이었다. 직접 문장을 점검하고 인장을 찍어 보낸 뒤에야 우리는 외투를 걸쳤다.

상회 앞마당을 나서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손바닥 안쪽에는 어제 세라피나가 남겨 두고 간 제안서의 서늘한 감촉이 남아 있는 듯했다.

"대표님. 정말 각하께서도 나오실까요?"

마차 안에서 라일라가 붉은 서류철을 꼭 쥔 채 물었다.

"성녀가 직접 전하겠다고 했어. 카시안이든 신전이든 내게서 서류를 뺏고 싶다면 그 자리에 나타나겠지."

마차가 귀족법원 정문 앞에 멈춰 섰다. 어제 임시 심리가 열렸던 중앙 심리정과 달리 오늘 우리가 향한 곳은 서류가 오가는 중앙 접수홀이었다. 높은 천장 아래로 제국의 귀족들과 청원 서기관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우리가 접수홀 안으로 들어서자 시선들이 한꺼번에 쏠렸다. 어제 법정에서 대공의 청구를 일부 막아낸 전 대공비의 등장이었다.

접수대 가장 넓은 자리에는 이미 순백의 성녀 세라피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어제 상회를 찾았던 수행 사제가 두툼한 양피지 원부를 든 채 서 있었다. 세라피나를 둘러싼 은백색의 마력 결은 아침 햇살 속에서도 고요하고 투명했다.

"오셨군요. 에블린 영애."

세라피나가 온화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숙였다.

"약속하신 인연심사실의 기록은 가져오셨습니까?"

"물론입니다. 당사자가 모두 모여야 열람할 수 있다는 조건만 지켜진다면요."

성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접수홀 입구 쪽에서 묵직한 군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웅성거리던 귀족들이 일제히 숨을 들이키며 양옆으로 갈라졌다. 살벌한 냉기가 넓은 홀 안으로 들이닥쳤다.

카시안 데 발렌티노였다.

그는 흑철색 늑대 모피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망토 아래 숨겨진 왼팔은 여전히 굳어 있었지만 딛는 걸음걸이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뒤로는 집사 바르텔이 창백한 안색으로 따르고 있었다.

카시안의 시선이 내 얼굴을 스쳤다.

그러나 그 눈동자에는 어제 회랑에서 보았던 핏빛 균열이나 떨림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나를 질식하게 만들었던 무자비한 무채색의 장막만이 그를 철저하게 감싸고 있었다.

그는 내 곁에 멈추어 서면서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오직 접수대 너머의 서기관과 성녀만을 차갑게 응시할 뿐이었다.


접수처 책임 서기관이 마른침을 삼키며 양측의 서류를 넘겨받았다.

"양 당사자께서 모두 입회하셨으므로 성소 인연심사실의 혼인 보증 발급 원부 항목을 대조하겠습니다."

서기관의 떨리는 손끝이 양피지 원부의 첫 장을 넘겼다.

세라피나가 눈짓하자 수행 사제가 손가락으로 특정 항목을 짚었다. 3년 전 로제 가문과 발렌티노 대공가가 혼인 서약을 맺던 날의 기록이었다.

"3년 전 혼인 등록 당시 태양 신전은 북부 대공가의 오랜 맹약과 잠재적 예언 위험을 근거로 본 혼인에 성소 봉인을 부여했습니다. 혼인 관계의 해체나 변경 시 성소의 영적 심사를 거치도록 규정한 특별 보증입니다."

사제의 설명에 서기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 시선은 그 아래 적힌 최근 날짜의 붉은 추기 항목에 멈추었다.

"그 아래 항목은 뭡니까?"

내가 서류를 가리키자 사제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이혼 합의서 서명 직후 접수된 보증 갱신 항목입니다. 당사자의 신변 위험이 지속되는 동안 혼인 보증의 효력을 유지한다는 내용입니다."

"누구의 요청으로 갱신된 겁니까? 저는 그런 갱신에 동의한 적이 없습니다."

서기관이 당황한 듯 안경을 고쳐 쓰며 기록을 살폈다.

"신청 권한자로 발렌티노 대공가의 가주 인장이 날인되어 있습니다. 배우자의 안전과 가문의 명예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후견권 행사로 명시되어 있군요."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제7조에 따라 이혼 서명과 동시에 모든 후견권은 영구히 소멸했습니다. 당사자 한쪽이 일방적으로 신전과 결탁해 효력 없는 보증을 갱신하는 것이 제국 법률상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내가 서기관을 똑바로 쏘아보며 따져 물을 때였다.

"주제넘게 굴지 마라."

서늘하고 무거운 음성이 내 말을 단칼에 잘라 버렸다.

카시안이었다.

그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서기관을 향해 오만한 어조로 읊조렸다.

"몰락한 가문의 계집이 대공가의 맹약과 신전의 규율을 입에 담을 자격은 없다. 너는 그저 3년 동안 귀찮은 혼담을 막기 위해 고용되었던 허울뿐인 장식품에 불과했다."

접수홀에 모여선 귀족들 사이에서 억눌린 비웃음이 번져 나갔다.

"고용된 아내 주제에 제 처지도 모르고 신전의 권위에 기어오르려 하다니."

카시안의 모진 말은 거침없이 내 심장을 찔러 왔다. 그는 마치 벌레를 내려다보듯 서늘한 눈빛으로 서기관에게 명령했다.

"발렌티노의 이름으로 내린 보증이다. 하찮은 상인의 동의는 애초에 필요하지 않다. 기록 대조가 끝났다면 즉시 공증을 마쳐라."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었다.

하지만 나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카시안의 잔인한 입술 대신 그 말을 듣고 있는 세라피나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어제 상회에서 다짐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세라피나의 입가에 옅은 호선이 그려져 있었다.

그녀를 감싸고 있던 은백색의 마력 결이 만족스러운 듯 잘게 일렁이고 있었다. 성녀의 눈동자는 카시안이 나를 무참하게 짓밟는 광경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뜯어보고 있었다.

그들이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명확했다.

발렌티노 대공이 정말로 나를 버렸는가. 그 얼음 같은 사내의 가슴속에 나를 향한 애정이나 미련 따위가 단 한 줌이라도 남아 있는가.

신전은 그 불씨를 감시하러 성녀를 보낸 것이었다. 카시안의 독설은 그들의 의심을 잠재우기에 너무나도 완벽한 먹잇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내 모욕을 정당화할 수는 없었다.

카시안이 내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높은 체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이 내 머리 위로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접수홀 전체를 울렸다.

"이혼 서류에 서명해 준 것은 지난 3년 동안 방 한구석을 지킨 수고에 대한 마지막 동정이었다. 약간의 위자료를 쥐여 내보냈더니 제 분수도 잊은 채 거리를 설쳐 대는 꼴이 가관이더군."

그의 검은 눈동자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네 하찮은 약초 상회 따위가 발렌티노의 발끝에라도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나? 네 반항도 네 발악도 내게는 한낱 먼지의 날림에 불과하다. 에블린. 너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다."

귀족들의 혀 차는 소리가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카시안은 몸을 숙였다. 오직 나만이 똑똑히 들을 수 있을 만큼 서늘한 숨결이 귓가를 스쳤다.

"살고 싶다면 당장 네 그 더러운 뒷골목 구멍가게로 기어들어가 숨죽여라. 두 번 다시 대공가의 이름을 더럽힌다면 네 머리 위의 그 보잘것없는 지붕마저 완전히 무너뜨려 주겠다."

차가운 협박이었다.

그러나 그 찰나였다.

지독하도록 냉혹한 그의 눈빛 깊은 곳에서 숨 막히는 균열이 스쳐 지나갔다.

그의 굳게 다문 턱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망토 아래 숨겨진 주먹이 하얗게 쥐어져 있었다. 무채색의 얼음벽 너머로 처절하게 타들어 가는 핏빛 고통이 비명처럼 새어 나왔다.

'제발 도망쳐. 신전의 눈에서 벗어나.'

그의 침묵이 그렇게 울부짖고 있었다.

나를 진흙탕 속에 처박아 버림으로써 신전의 살의로부터 나를 떼어내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비틀린 구원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나를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내 존엄을 짓밟고 나를 한낱 무력한 인형으로 만들어 세상의 조롱거리로 던져 버리는 방식. 그것은 보호가 아니라 폭력이었다.

카시안은 또다시 나를 배제한 채 혼자만의 순교자가 되려 하고 있었다. 내 삶의 주권을 빼앗아 자신의 죄책감 뒤에 숨겨 두려 하고 있었다.

신전의 의심을 끊어내고 싶다면.

우리가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원수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다면.

그가 내게 던진 굴욕을 고스란히 돌려주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었다.

나는 숨을 들이켜며 오른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리고 온 힘을 실어 그의 뺨을 향해 내리쳤다.

찰싹!


맑고 날카로운 파열음이 대리석 기둥을 타고 접수홀 천장까지 울려 퍼졌다.

모든 소리가 일시에 증발했다.

서기관의 손에서 펜이 굴러떨어졌고 웅성거리던 귀족들의 턱이 얼어붙은 듯 딱 벌어졌다. 수행 사제가 쥐고 있던 양피지 원부가 바닥으로 떨어져 나뒹굴었다.

제국의 철혈 대공 카시안 데 발렌티노의 고개가 왼쪽으로 거칠게 꺾여 있었다.

그의 창백한 뺨 위로 선명하고 붉은 손자국이 순식간에 번져 올랐다.

카시안의 검은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흔들렸다. 3년 동안 그 어떤 전장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남자의 얼굴이 단 한 번의 일격에 완벽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를 둘러싸고 있던 무채색의 장막이 산산이 조각났다. 갈라진 얼음벽 사이로 주체할 수 없이 번져 나오는 멍처럼 깊은 보랏빛 파문과 찢어지는 고통의 색이 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내 오른손 바닥이 불에 덴 것처럼 얼얼하게 타들어 갔다.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턱을 빳빳하게 치켜들고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동정을 입에 올리지 마세요. 발렌티노 각하."

내 목소리는 떨림 없이 차갑고 단호하게 접수홀을 갈랐다.

"3년 동안의 침묵은 당신의 오만이었지만 내 삶은 오롯이 나의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소유물도 아니며 당신의 자비로 목숨을 구걸하는 천한 짐짝도 아닙니다."

숨을 죽인 채 나를 바라보는 귀족들과 사제들의 시선 속으로 내 선언이 쐐기처럼 박혔다.

나는 고개를 돌려 얼어붙어 있는 세라피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성녀를 감싸고 있던 고요한 은백색의 마력이 거센 폭풍을 맞은 듯 사납게 일렁이고 있었다. 항상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던 성녀의 입술이 미세하게 굳어져 있었다.

"보셨습니까. 성녀님."

나는 떨어진 양피지 원부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것이 발렌티노 대공과 나 사이에 남은 유일한 진실입니다. 우리 사이에는 어떠한 미련도 화해도 없습니다. 오직 경멸과 증오만이 남았을 뿐입니다."

세라피나는 입을 열지 못했다.

신전은 미련의 흔적을 찾으려 했다. 부부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은밀한 애정을 증명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이 목격한 것은 제국 전체가 경악할 만한 공개적인 파탄과 돌이킬 수 없는 모욕이었다.

카시안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붉게 물든 뺨 위로 차가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의 입술이 달싹였지만 어떤 변명도 어떤 명령도 밖으로 터져 나오지 못했다. 그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억지로 부서진 무채색의 파편들을 끌어모아 자신을 가두었다.

그의 눈동자 속에 담긴 처절한 고통을 보았지만 나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서류를 챙겨 줘. 라일라."

"네. 대표님."

라일라가 붉은 서류철을 품에 안았다.

나는 멍하니 굳어 있는 서기관을 향해 짧게 목례를 건넸다.

"보증의 갱신 경위는 확인했습니다. 본안 재판에서 그 무효를 분명히 입증해 보이지요."

나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웅성거림조차 잊은 채 굳어 있는 귀족들의 틈을 가르고 접수홀의 거대한 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등 뒤로 카시안의 무거운 시선과 세라피나의 서늘한 기척이 따라붙었지만 나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접수홀 문을 밀고 나서자 눈부신 아침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손바닥은 여전히 화끈거렸고 가슴 한구석은 시리도록 아파 왔다.

하지만 내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나는 이제 누군가의 보호 아래 숨죽이는 아내가 아니었다. 내 삶과 상회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방패를 세운 한 사람의 당당한 대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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