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의 등선자(登仙者)

13화: 곁에 선 검
수선간 문밖으로 나서자 서늘한 밤바람이 목덜미를 스쳤다.
연무장 주변은 인적이 끊겨 고요했다. 한리는 옷자락을 여미며 어두운 돌길로 걸음을 옮겼다. 철검의 고정쇠를 맞추느라 기운을 썼던 오른손 손끝이 여전히 뻐근했다.
"사형 손은 괜찮으세요?"
임영영이 보폭을 맞추며 물었다.
"무리해서 쓴 기운이 아니라 괜찮습니다. 조금 저린 정도예요."
한리는 품에서 장걸이 다듬어 준 쇳조각 두 개를 꺼냈다. 모서리가 둥글게 갈려 매끄러웠다.
"이걸 가져가세요. 대롱 받침으로 괴어 두면 새벽바람에 흔들리지 않을 겁니다."
임영영은 두 손으로 쇳조각을 받았다.
"고맙습니다. 나뭇가지가 물을 먹어 휘는 바람에 분무 각도가 틀어질까 걱정했거든요. 내일 새벽에는 훨씬 수월하겠어요."
"월광초 잎에 닿는 안개가 고르게 퍼지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날이 밝기 전에만 작업하고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하세요."
"명심할게요. 사형도 어서 들어가 쉬세요."
갈림길에서 임영영을 보낸 뒤 한리는 서쪽 비탈길을 홀로 올랐다.
달빛이 구름에 가려 오솔길은 짙은 그늘에 잠겨 있었다. 한리의 동부는 외문에서도 가장 외진 비탈 아래에 처박혀 있어 밤에는 인적이 끊겼다.
낮에 장걸이 전해 준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회색 도포를 입은 자가 서쪽 동부에 사는 새 제자가 누구인지 해 진 뒤에도 일하는지 캐물었다고 했다.
거처 앞에 이르자 문턱과 창살은 자신이 떠날 때 그대로 닫혀 있었다. 하지만 한리는 발을 멈추었다.
동부 입구 앞 진흙 바닥에 결이 전혀 다른 신발 자국이 찍혀 있었다.
시야 한구석에서 푸른 커널 로그가 깜빡였다.
`지표면 잔류 영류 감지`
`관측 궤적: 서쪽 진입로 → 동부 전면 배회 → 측면 수로 접근`
`체류 시간: 약 4분 30초`
`생성 시각: 약 30분 전`
`문짝 물리적 훼손 없음`
누군가 다녀갔다.
방 안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창살 틈으로 엿보다 물러난 흔적이었다. 곧장 돌아왔다면 마주쳤을지도 몰랐다.
한리는 숨을 죽이며 문을 열고 들어섰다. 등잔불은 켜지 않았다.
문빗장을 잠근 뒤 바닥 짚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임영영이 건네준 청심초 추출액을 조금 머금자 쓴 기운이 지친 신경을 가라앉혔다.
하단전의 기운은 맑았지만 아직 연기기 1성의 웅덩이는 얕았다.
동부 지하의 Tower-01 봉인석과 북쪽 수로의 바이패스 코드 그리고 문앞의 발자국. 위협이 서서히 좁혀져 오고 있었다.
한리는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르며 밤을 넘겼다.
동쪽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밝아올 무렵 한리는 눈을 떴다.
손끝의 통증은 가라앉아 있었고 하단전의 영기도 끊김 없이 돌았다. 밖으로 나오자 상쾌한 새벽 공기가 폐부를 채웠다.
울타리 돌 위에 작은 푸른 잎사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임영영이 새벽 분무를 무사히 마쳤다는 약속된 신호였다.
한리는 비탈길을 따라 내려갔다. 식혀 둔 장걸의 철검을 재점검하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길목에 다다랐을 때 저 아래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건장한 소년이 등에 천으로 감싼 장검을 멘 채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팔뚝에는 숯검정이 묻어 있었고 눈 밑에는 짙은 피로가 앉아 있었다. 장걸이었다.
"장걸 씨."
장걸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한리 님 일찍 나오셨군요."
"안색이 핼쑥합니다. 수선간에서 밤을 새운 겁니까?"
장걸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풀무질 한 시진을 어젯밤에 다 채웠습니다. 빚을 남겨 두고는 잠이 오지 않아서요."
"그것 때문에 밤을 꼬박 새웠다는 말입니까?"
"그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장걸이 주변을 둘러본 뒤 목소리를 낮추었다.
"어젯밤 서쪽 비탈 아래 삼거리에서 장작을 팼습니다. 수선간 땔감이 모자란다고 하기에 겸사겸사 그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삼거리는 외문 본채에서 한리의 동부로 올라오는 유일한 길목이었다.
"밤길을 지키고 서 있었던 겁니까?"
"낮에 그 회색 도포를 입은 자가 한리 님의 거처를 묻고 다녔던 게 마음에 걸렸습니다."
장걸이 마른 침을 삼켰다.
"자정이 넘었을 때였습니다. 회색 도포를 뒤집어쓴 자 하나가 비탈길을 올라오더군요. 제가 횃불 아래서 도끼로 장작을 내리치고 있으니 그자가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보았습니다."
"그 뒤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도끼를 쥔 채 다가가 무슨 일로 서쪽 길을 찾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무 말도 없이 몸을 돌려 숲길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초저녁에 동부가 빈 것을 확인한 자가 자정 무렵 다시 침입하려 했던 것이다. 길목에 장걸이 버티고 서 있지 않았다면 자신이 잠든 방 안으로 들이닥쳤을지도 몰랐다.
혼자 감당해야 한다고 여겼던 길에 든든한 방패가 서 있었다.
"고맙습니다. 장걸 씨 덕분에 큰 화를 면했습니다."
한리가 고개를 숙이자 장걸은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검을 고쳐 주신 은혜에 비하면 당연한 일입니다."
두 사람은 동부 뒤편 너럭바위로 자리를 옮겼다. 병풍처럼 둘러선 대나무 숲이 아침 햇살을 가려 주었다.
"검을 꺼내 보십시오."
장걸은 메고 있던 검을 내려 감개를 풀었다.
밤새 열기가 빠져나간 철검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칼끝 결손과 검신의 실금은 여전했지만 고정쇠는 어제 맞춘 자리에 단단히 물려 있었다.
한리는 손끝을 고정쇠 모서리에 대고 미세한 기운을 흘려보냈다.
`철검 냉각 후 상태 검측`
`고정쇠 내측 모서리 변형률: 0%`
`영류 홈 정렬: 완벽 유지`
`추정 유효 전달률: 65% (기준 출력 대비)`
`경고: 검신 피로 균열 잔존 / 전력 주입 시 파단 위험`
"자리가 잘 잡혔군요. 밤새 쇠가 식으면서 틀어지지 않았습니다."
한리는 물러서며 턱짓했다.
"검을 쥐고 평소 기운의 삼분의 일만 흘려보세요. 그 이상은 안 됩니다."
장걸이 떨리는 손으로 검자루를 잡았다. 숨을 들이마시자 손바닥에서 은은한 백색 기운이 피어올라 자루 속으로 스며들었다.
스으으.
기운이 고정쇠 아래를 통과해 뭉툭한 칼끝까지 곧게 뻗어 나갔다. 장걸의 손가락은 벌어지지 않았고 상처투성이 손바닥에 아무런 역류도 없었다.
"어떻습니까?"
"기운이 손으로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장걸이 멍한 얼굴로 손을 내려다보았다. 매번 손뼈를 부술 듯 파고들던 통증이 사라져 있었다.
"손바닥을 찢던 흐름이 사라졌어요. 힘을 주어도 검이 제 기운을 밀어내지 않습니다."
"흐름을 누르던 모서리를 펴서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한리가 검신을 가리켰다.
"금을 지운 것이 아닙니다. 바위나 단단한 쇳덩이를 치면 검신이 먼저 부러집니다. 지금은 대나무나 짚단처럼 무른 것을 가르는 수준에 만족해야 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이 정도로도 제게는 기적입니다."
장걸은 검을 두 손으로 받쳐 들더니 바위 위에 무릎을 꿇었다.
한리는 눈을 깜빡였다.
"장걸 씨 왜 이러십니까? 일어나세요."
"한리 님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장걸이 고개를 숙인 채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검은 가문이 몰락할 때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쥐어 주신 물건입니다. 검을 버리지 않는 한 무사의 길은 끝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외문에 온 뒤 모두가 부러진 고철이라며 내버리라고 비웃었습니다. 숫돌조차 빌려주지 않았습니다."
장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오직 한리 님만이 제 찢어진 손을 먼저 보아주셨습니다. 버리라 하지 않고 숨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제게 이 검은 목숨이고 아버지의 유언입니다. 그 목숨을 한리 님이 살려 주신 겁니다."
한리는 장걸의 거친 손을 내려다보았다.
처음에는 위험한 수로 탐색의 방패막이로 쓰려던 계산이었다. 하지만 무릎을 꿇은 소년의 진심 앞에서 타산적인 생각이 부끄러워졌다.
이 소년은 단순히 무력이 필요한 무사가 아니라 자신의 길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버텨온 또 하나의 외로운 제자였다.
장걸은 머리를 들어 한리의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눈빛에는 단단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외문에서 저는 늘 혼자였습니다. 가문도 잃고 잡역 출신이라 손가락질받으며 허드렛일로 숫돌을 빌려 연명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제 검이 누구를 향해야 하는지."
장걸은 검을 높이 받쳐 들었다.
"저를 거두어 주십시오. 한리 사형의 등 뒤를 제가 지키겠습니다."
사형이라는 두 글자가 아침 공기를 갈랐다. 자신의 등과 목숨을 온전히 맡기겠다는 맹약이었다.
한리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내 등 뒤에 서는 것은 안전한 자리가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나를 노리는 자들은 단순한 불량배가 아닐 수 있습니다. 분배대를 쥐고 흔들던 상급 제자들의 배후에는 외문의 더 깊은 어둠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내 곁에 서면 사제 역시 그 어둠의 표적이 될 겁니다."
장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칼을 쥔 자가 상대를 두려워해 물러선다면 이미 검수가 아닙니다. 사형의 앞길을 막아서는 자가 있다면 제 철검이 부러질 때까지 먼저 베겠습니다."
바람이 불어 대나무 잎들이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한리는 손을 뻗어 장걸의 어깨를 잡고 일으켜 세웠다.
"좋습니다. 내 등 뒤는 장걸 사제에게 맡기겠습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그 대신 약속하십시오. 내 허락 없이 사제의 목숨과 검을 함부로 버리지 마십시오."
"명심하겠습니다 사형."
장걸의 얼굴에 비로소 밝은 미소가 번졌다.
그때 대나무 숲길 저편에서 작은 약초 바구니를 든 임영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형 여기 계셨네요."
다가오던 임영영은 나란히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눈을 깜빡였다. 둘 사이에 흐르는 공기가 어제와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걸이 단정하게 포권을 취하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영영 사매 어제 주신 약물이 손을 치료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임영영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도 마주 포권을 취했다.
"철검은 잘 고쳐졌나요?"
"사형 덕분에 되살아났습니다."
한리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가슴이 묵직해졌다.
영약을 가꾸는 임영영 앞을 가로막는 위협을 벨 장걸 그리고 모든 흐름을 관측하고 조율하는 자신. 냉혹한 문파에서 서로의 빈틈을 채워 줄 셋의 연합이 완성되었다.
그때 저 아래 외문 관리처 방향에서 다급한 징소리가 세 번 울렸다.
장걸이 즉시 검자루를 쥐었다.
"관리처의 소집 징입니다."
임영영도 긴장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조 집사님이 분배대 장부를 대조하다 상급 제자들의 횡령 규모가 크다는 것을 밝혔다고 들었어요. 지금 감사실에서 외문 장로회에 정식 조사를 요청했다고 합니다."
서도진과 마호진의 비리가 드디어 윗선으로 번져 나가고 있었다.
한리는 품 안의 외문 명패를 만졌다. 명패 속 미세한 진동은 분배대 지하를 가리키며 울리고 있었다.
외문의 썩은 장부가 흔들릴 때가 바로 자신이 파고들 틈새였다.
"사형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장걸이 곁에 서서 결연하게 물었다.
한리는 연무장 너머 장로들의 누각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가 나설 때가 되었습니다."
곁에 선 철검이 아침 햇살을 받아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