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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없는 왕관과의 계약1화

말없는 왕관과의 계약

말없는 왕관과의 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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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황태자의 청혼서

아델은 황태자의 편지를 소리 내어 읽지 않았다. 봉투는 열려 있었고, 종이 위에는 세 문장이 단정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내 청혼을 받아들여 주십시오. 사랑을 약속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당신이 침묵을 해석할 권리를 주겠습니다.’

마지막 문장이 가장 위험했다. 궁정 통역사는 말을 옮길 뿐 뜻을 정하지 않는다. 그 규칙을 어기면 귀족의 비밀을 훔친 자가 된다. 아델은 편지를 내려놓고 황태자 루시안이 손으로 쓴 서명을 살폈다. 잉크가 끝에서 번져 있었다. 그의 손이 떨렸던 것일까, 아니면 급히 쓴 것일까.

“답장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레크가 말했다.

황태자 시종장은 문가에 서 있었다. 백발을 뒤로 넘기고 은색 안경을 쓴 그는 표정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델은 편지를 봉투에 넣었다.

“이 청혼은 황실 명령인가요?”

“아닙니다. 황태자 전하의 개인 제안입니다.”

“제가 거절하면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 대답은 너무 매끄러웠다. 궁정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은 대개 누군가가 이미 일을 막았다는 뜻이었다. 아델은 창밖을 바라봤다. 겨울 정원에는 서리만 남아 있었다. 황태자의 약혼 상대는 보통 대공가의 딸이나 이웃 왕국의 공주였다. 통역사인 자신을 고른 것은 정치적 계산이 분명했다.

“전하를 만나 직접 묻겠습니다.”

마레크는 짧게 고개를 숙였다. “오늘 백지 의식이 있습니다. 그 뒤에 알현이 가능할 겁니다.”

백지 의식은 황태자가 왕관을 쓰고 자신이 본 기억을 기록하는 행사였다. 왕관의 기억은 계승자에게 선대의 장면을 보여 준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의식의 기록은 언제나 비어 있었다. 루시안은 세 해 전 목소리를 잃은 뒤 한 번도 공식 발언을 하지 못했다. 대신 법령을 손으로 쓰고, 귀족 앞에서 고개를 숙이거나 손바닥을 펴 뜻을 전했다.

“왕관이 기억을 보여 준다는 이야기가 사실인가요?”

마레크는 대답하기 전에 아델을 살폈다. “황실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습니다.”

“침묵이 사실이라는 뜻은 아니겠죠.”

“침묵은 기록이 없다는 뜻입니다.”

아델은 그 말을 마음에 새겼다. 그는 대화를 끝내려 했지만, 그녀는 편지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꺼냈다.

“전하가 침묵을 해석할 권리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권리는 어디까지입니까?”

마레크는 잠시 망설였다. “오늘 의식에서 확인하십시오.”

의식장은 황궁의 가장 오래된 방이었다. 천장에는 계승자의 이름이 금박으로 새겨져 있었고, 바닥에는 왕관을 중심으로 은색 선이 둥글게 그어져 있었다. 귀족들은 의식의 바깥쪽에 앉았다. 아델은 통역사 자리에서 고궁수어 기록을 펼쳤다. 그녀의 어머니가 남긴 낡은 사전이었다. 황실이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옛 손짓들이 적혀 있었다.

루시안은 검은 예복을 입고 왕관 앞에 섰다. 그의 목을 가로지른 흉터는 옷깃 아래로 일부만 드러났다. 그는 아델과 눈을 마주친 뒤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펼쳤다. ‘기다려.’ 고궁수어의 첫 번째 글자였다. 아델은 그 손짓을 알아보았지만, 다른 통역사는 단순한 예의로 여겼다.

왕관이 그의 머리에 놓였다. 금속의 표면에 박힌 작은 돌들이 차례로 빛났다. 루시안의 몸이 굳었다. 그는 눈을 감고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의식장에는 숨죽인 기척만 남았다.

그 순간 아델은 자신도 보지 못할 장면을 보았다. 검은 문 앞에 선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흰 장갑을 끼고, 손끝으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방 안에는 깨진 잔과 뒤집힌 의자가 있었다. 멀리서 종이 타는 냄새가 났다. 여인의 손은 문을 닫으라고 말하는 듯했고, 어깨는 누군가를 막아서듯 기울어 있었다.

아델은 숨을 삼켰다. 눈을 깜박이자 의식장이 돌아왔다. 왕관은 여전히 루시안의 머리에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떨리며 짧은 수어를 만들었다. ‘문. 여자. 멈춤.’

아델은 기록지에 그 움직임을 옮겼다. 하지만 그녀가 아는 고궁수어와 조금 달랐다. ‘멈춤’으로 번역한 손짓은 사실 ‘봉인’일 수도 있었다. 단어 하나를 잘못 옮기면 누군가의 기억이 달라질 수 있었다.

루시안은 왕관을 벗었다. 그는 무릎을 짚고 숨을 골랐다. 귀족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번졌다. 섭정대공의 서기관이 백지 기록을 가져가려 했지만, 루시안은 손을 들어 막았다. 그는 기록판을 아델에게 건넸다.

“왜 제게 주십니까?” 아델이 낮게 물었다.

루시안은 대답 대신 세 손가락을 펼쳤다가 두 손가락을 접었다. ‘세 장면 중 두 개만 기억한다.’ 아델은 그의 뜻을 읽고 종이에 적었다.

“제가 본 것도 기록할까요?”

그는 놀란 듯 그녀를 바라봤다. 이어서 손가락으로 자기 눈을 가리킨 뒤 아델을 가리켰다. ‘당신도 보았나.’

아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들이 이 대화를 눈치채기 전에 루시안은 손을 내렸다. 의식이 끝나자 섭정대공의 서기관들이 기록판을 회수했다. 루시안은 빈 종이에 문장을 적어 아델에게 보였다. ‘오늘 밤, 서쪽 기록실. 혼자 오지 말 것.’

그날 저녁 아델은 마레크와 함께 기록실에 갔다. 방 안에는 오래된 계승 기록이 보관되어 있었다. 루시안은 책상 위에 두 장의 계약서를 놓았다. 한 장은 혼인 계약, 다른 한 장은 기억 해석에 대한 약속이었다.

“제가 황태자비가 되면 통역사 일을 그만둬야 하나요?” 아델이 물었다.

루시안은 고개를 저었다. 종이에 ‘당신의 기록을 궁정의 소유로 만들지 않겠다’고 적었다.

아델은 그 문장을 손끝으로 눌렀다. “왕관의 기억을 공개할 때 제 이름을 함께 기록해 주세요. 그리고 제 해석을 동의 없이 공식 연대기에 넣지 마세요.”

루시안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혼인 계약의 첫 조항을 가리켰다. ‘상호 동의 없는 신체 접촉과 사적 의무를 강요하지 않는다.’ 둘째 조항은 결혼 기간을 1년으로 제한하고, 양쪽이 갱신을 거부하면 무효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계약을 쓰면 황실이 반대할 겁니다.” 마레크가 말했다.

루시안은 펜을 들어 여백에 적었다. ‘그러면 반대 이유를 기록하라.’

아델은 그를 바라봤다. 그의 손짓은 명령보다 질문에 가까웠다. 그녀는 계약서를 처음부터 읽었다. 황태자의 배우자가 되면 공적인 행사에 참석해야 했다. 하지만 자신의 통역 기록을 보유할 권리, 의식 도중 퇴장할 권리, 왕관 기억의 검토를 거부할 권리도 적혀 있었다. 루시안은 자신에게 유리한 조항만 넣지 않았다.

“왜 저를 선택했습니까?”

그는 한 장의 쪽지를 내밀었다. ‘당신은 오늘 내가 본 것을 바로잡으려 하지 않았다. 모른다고 기록했다.’

아델은 그 말이 기쁘면서도 무거웠다. “제가 틀렸을 수도 있어요.”

루시안은 손바닥을 위로 펴 보였다. ‘그래서 함께 확인하자.’

그들이 계약서에 서명하려는 순간, 기록실 문이 열렸다. 섭정대공의 비서가 황실 인장을 든 채 들어왔다. 그는 백지 의식의 기록판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왕관의 기억은 계승 심사의 기밀이며, 개인 통역사에게 보여 줄 수 없다는 이유였다.

루시안은 기록판을 자신의 앞에 놓았다. 비서는 황실 명령서를 펼쳤다. 아델은 명령서의 봉인 자국이 왕관의 의식에 쓰이는 인장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서명자는 섭정대공이었지만, 문서 맨 아래에는 선대 황제의 옛 표식이 찍혀 있었다.

“이 표식은 언제부터 쓰였습니까?” 아델이 물었다.

비서는 답하지 않았다. “통역사는 질문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건 통역 문제가 아닙니다. 문서의 진위를 확인하는 일입니다.”

비서는 기록판을 집어 들려 했다. 루시안은 그의 손목을 잡지 않았다. 대신 손바닥을 문서 위에 올렸다. 손가락 두 개가 떨리며 같은 수어를 만들었다. ‘검은 문을 열지 마라.’

이번에는 아델만 그 뜻을 본 것이 아니었다. 마레크도 손짓을 알아봤다. 그의 얼굴에서 피가 가셨다.

“그 문장은 어디서 배웠습니까?” 아델이 물었다.

마레크는 기록실 문을 닫았다. “선대 황제의 서신에 있었습니다. 왕관의 기억과 같은 문장입니다.”

루시안은 계약서의 서명란을 밀어 아델 앞으로 보냈다. 혼인 계약과 기억 해석 계약이 나란히 놓였다. 섭정대공의 비서는 여전히 문서 제출을 요구하고 있었다. 아델은 두 장 모두에 이름을 적었다. 자신의 서명을 마친 뒤, 그녀는 기록지에 오늘 본 장면을 따로 기록했다. ‘검은 문 앞의 여인. 문을 닫으라고 말했는지, 봉인하라고 말했는지는 미확정.’

루시안은 그녀의 기록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왕관을 쓸 때마다 기억은 완전하지 않다. 아델의 해석도 완전하지 않다. 둘은 그 사실을 계약의 첫 비밀로 남겼다.

기록실을 나오자 복도 끝에 섭정대공이 서 있었다. 그는 축하를 건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황태자비가 되셨군요. 내일 아침, 왕관의 기억을 전부 공개하시겠습니까?”

아델은 대답하기 전에 루시안을 보았다. 그는 고개를 젓지 않았다. 그렇다고 동의도 하지 않았다. 선택은 그녀에게 남겨져 있었다.

계약서를 보관할 장소도 정해야 했다. 궁정 문서고는 섭정대공이 관리했고, 아델의 방은 언제든 수색될 수 있었다. 루시안은 원본을 자신의 서재 금고에 넣고, 사본 두 장은 마레크와 아델이 각각 보관하자고 썼다. 아델은 세 사본의 가장자리에 서로 다른 작은 표식을 남겼다. 어느 사본이 훼손되어도 누가 손댔는지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계약 마지막 장에 ‘기억을 보지 않기로 선택할 권리’를 다시 적었다. 루시안이 서명한 뒤, 그 문장을 자신의 손으로 덧붙였다. 그는 잠시 그 글씨를 살피더니 아델에게 펜을 내밀었다. 그녀는 펜을 받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이미 자신의 이름을 썼고, 약속은 지켜질 때 의미가 있었다. 그들은 문서 위에 손을 포개지 않았다. 대신 각자 자기 사본을 접어 품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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